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깊은 곳으로, 아니 더 깊은 곳으로... (눅 5:1-11)

  • 잡초 잡초
  • 653
  • 0

첨부 1


할렐루야!
무더위 속에서도 한 주간 건강히 잘 지내셨는지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불, 화를 잠재우시고 시원케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예배하는 성도들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설교에 맞게 성가대의 찬양이 정해지는 일이 있긴 합니다만, 오늘은 특별히 성가대의 찬양에 제가 설교주제를 맞췄습니다. 박진하 집사께서 오늘 성가대가 부를 찬양을 인터넷에 올려 놓은 것을 제가 들으면서 많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으로 외친대로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깊이와 무게가 상실된 위기의 시대라고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벼움도 참을 수 없지만, 얕음, 얄팍함도 참을 수 없는 괴로움 중에 하나입니다.

신앙에도 깊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파도가 칠 때에도 불과 몇 m만 물 밑으로 들어가도 전혀 파도를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물에 떠있는 부초처럼 자그마한 물살에도 이리저리 휩쓸리는 얕은 신앙을 볼 수도 있고, 누가 뭐래도 자기 신앙의 심지를 지키면서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깊이 있는 신앙인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깊이 있는 신앙이란 어떤 신앙인을 말하는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처럼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시는 신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위대한 역사의 시작은 빈 배로부터...
그날, 베드로의 삶은 실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빈 그물과 빈 배는 그가 적어도 그 전날 밤의 그물질에서는 패배했다는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배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올라 타실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날 아침, 호숫가에는 두 배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비어있는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시몬의 배였습니다. 이 장면이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던 사람 시몬이라는 사람이 인류 역사에 남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 오늘날 서양 사람들의 이름 가운데 숱하게 짓는 이름인 Peter, 즉 베드로가 되는 전기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삶을 바꾼 것은 빈배였습니다. 그의 빈배는 실패와 좌절의 상징일 수 있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위대한 역사는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빈배가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유물론적 관점입니다. 얕은 시각으로 보지 마십시오. 얄팍한 판단으로 쉽게 행·불행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뭐 좀 잘된다 하면 복 받았다고 야단 하다가도 조금만 배가 비게 되면 저주라는 둥, 하나님이 치셨다는 둥... 얄팍하게 삶의 무게를 달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길게, 깊게 봐야 합니다. 찰방찰방하게 요동하는 수면 위에서만 노는 사람은 매일 흔들리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저 간신히 자기 혼자 탈 수 있는 쪽배를 탄 사람은 작은 물살에도 배가 요동을 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 러시아 영성훈련 후에 탔던 큰 여객선은 배의 층수가 12층이나 되는 큰 배였습니다. 웬만한 파도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배랍니다. 배가 무거워서 그 몸체가 깊은 바다 속에 잠겨있으니 작은 파도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죠.

빈 배라고 울지 마십시오. 채워진 배라고 우쭐대지 마십시오. 빈 배일지라도 그 자리가 하늘의 문을 여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시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모하는 영혼은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목마른 사람”으로, 주린 영혼은 “배고픈 사람”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영어 표현대로, thirsty & hungry입니다.
목마르고, 배고프고.... 이 얼마나 불쌍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또 이런 상황의 영혼에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때 이 사람은 또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사 57:15) 『지극히 높으신 이, 보좌에 영원히 앉아 계시는 이, 거룩하신 분이라 불리는 이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높고 거룩한 보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얻어 맞아 용기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살며 잃은 용기를 되살려 주고,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해 주리라.』

■ 깊은 곳으로 가는 길목 - 하나님의 시험.
예수님은 그날 아침,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는 어부들을 보셨습니다. 밤새 그물을 내리고 걷었건만 아마 그물에 수초만 가득히 걸린 그물을 씻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실망감, 피로감이 가득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예수님이 오르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목소리가 다 들리지 않게 되자 예수님은 호수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시고 적당한 거리를 떼어 많은 사람이 들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배를 이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만일 예수님과 같은 상황을 만났다면, 또 제가 똑같은 능력을 베풀 수만 있다면 저는 먼저 배에 고기를 가득히 잡게 한 다음에, “자, 이제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혔으니 이제는 나를 위해서 배를 빌려주시고,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어 주시지요.” 라고 요청했을 겁니다.
불난 집에 기름 끼얹는 식으로 그나마 밤새도록 헛 그물질해서 기운도 없어 죽겠는데 보아하니 가진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 새파란 30살의 젊은이가 배에 올라타서 다시 노를 저어 호수 쪽으로 가자고 하니 이거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복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된 다음에 하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되기 전에 하라!”는 요구의 원리입니다. 기근이 들었던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시돈지방의 사르밧이라는 동네에 사는 한 미망인을 찾아가 공궤를 받으라고 명합니다. 엘리야는 나무를 줍는 여인에게 자신을 위해서 먼저 물 한 모금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가 어느 때라고요? 네 맞습니다. 기근 때입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시내가 말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물없는 곳이 이스라엘 땅인데, 웬 나그네가... 그것도 여인 혼자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미망인의 집에 찾아와 물을 달라고 하다니요? 그저 순종하고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다시 불러 세워 엘리야가 말합니다. 갔다 올 때에 떡 한 조각을 가져다 주십시오... 라고 말이죠. 여인이 이렇게 말하죠. 난 떡이 없습니다. 다만 통에 가루 한 웅큼과 기름 조금 뿐이라고 말입니다. 아~!, 이런 말을 듣고 계속해서 떡을 내 놓으라고 말할 용기가 있을까요? 참 하나님이 가혹하지 않습니까?

얕은 삶은 사람에게는 미움 받으면 되로 돌려주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께 드리는 일도 멈춰야 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순간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있다면 불황 때에는 투자고 개발이고, 연구고 뭐고 다 중지 시키고 웅크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직한 경영자는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더 제품의 질을 높이고, 남들이 다 안된다고 할 때에 앞을 보고 투자합니다.

하나님은 더 깊은 곳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더 먼 곳을 보십니다. 그러기에 밤새도록 일해서 지친 시몬에게 배를 육지에서 띄기를 요청하십니다. 사르밧의 과부에게 가루 한 웅큼과 기름 한 방울로 떡을 만들어 나를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시간이 없는 사람에게 나를 위해서 시간을 드려 봉사를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경제적인 환란을 당한 이에게 오히려 물질적으로 봉사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마음에 쓰라림을 갖고 있는 자에게 오히려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섬길 것을 요구하십니다. 상처를 입은 자에게 다른 이들의 상처를 싸매고,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얕은 물가에서 찰방거리다가 인생을 마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성격대로 살다가 갈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내 스타일대로 살다가 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깊은 데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깊은 데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우리에게 강요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때론 비상식적일 수도 있습니다. 때론 가혹한 요구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꼭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오히려 네가 갖고 있는 그 나머지 것마저 내가 써야겠다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기분대로라면 “아니오.”라고 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예.”할 것을 요청하시니 이것 참... 얄팍한 판단으로 볼 때에는 미칠법한 일이지 않습니까?

빈 배에 오르셔서 이 배를 내가 써야겠다고 요청하신 예수님... 아직 아무 보상도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무리한 요구를 시몬에게 하셨던 예수님...
그날 아침... 베드로는 묵묵히 “예...”하였습니다. 그 순종으로 그의 인생은 놀랍게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게네사렛 호숫가가 주무대였던 그의 인생은 온 세계를 상대하게 되었습니다. 어부였던 그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고기를 잡던 그가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그의 믿음의 고백 한마디 위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깊이있는 베드로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 깊이 있는 삶 - 말씀에 의지하는 삶!
시몬의 빈 배는 이제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의 임시 강대상이 되었습니다. 호숫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가물가물 들려오는 예수님의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강대상 바로 밑에서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었던 베드로에게는 시원시원하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참 한국교회에 성령운동이 뜨겁게 일어날 때에 목사님의 침이 떨어지는 데가 은혜받는 자리라고 먼저 와서 앞 다퉈서 앉았던 때, 은혜받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어떨 땐 늦으면 뒷자리 뺏길까봐 빨리 가서 뒷자리 차지하려고 일찍 오는 분들도 계신답니다. 미리 와서 예배준비하면 예배에 은혜 받을까봐 일부러 예배시간 기다렸다가 11시 딱 되면 그제서야 집에서 출발하시는 분들도 계시진 않나요? *^^*

깊이있는 신앙의 삶으로 가기 위해서는 감정에 휘둘리는 은혜가 아니라, 말씀으로 은혜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다녀오신 영성훈련이 있지 않습니까? 현재 저를 포함해 3명의 운영위원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만나서 좋은만남의 발전적인 성장을 위해서, 더 깊이있는 영성훈련을 위해서 토론하고 연구하고, 또 프로그램을 수정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고민 중의 하나는 감정으로 은혜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걱정입니다. 뜨거운 찬양, 또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 마음과 감정을 두들기는 그런 프로그램이 말씀을 듣는 강의 시간을 압도하지 않도록 늘 조절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적인 은혜를 받아 눈물 한번 흘리고, 가슴 한번 뭉클한 것만으로 어떻게 주님나라 갈 때까지 우리 앞에 다가오는 숱한 상황들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프로그램은 말씀, 강의에 은혜받기 위한 도구로 한 계단 낮춰놓기 위한 연구를 끊임없이 합니다.

7,80년대 성령운동이 있을 때에도 감정적으로 은혜받았다는 분들, 교회에서 제대로 봉사자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게 쓰여지지 못했습니다. 은혜받더라고 그 은혜를 정상적인 교회 생활과 예배생활로 말씀으로 다지지 못했을 때 쉽게 사그라지고 말 은혜가 되고 만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을 보면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 결과 "그렇게 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가 이루어 낸 기적입니다.
시몬은 말씀에 의지하여 사는 맛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어부 시몬에서 사도 베드로로 깊이있는 삶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 얄팍한 성공에 취해 있지 말라!
시몬에게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지고 들어 올릴 수 없을 만치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동업자들을 불러 고기를 두 배에 채웠는데도 배가 잠길 지경이 되었습니다.

만선의 꿈!
이 어찌 어부들만의 꿈이겠습니까? 땅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꿈이 아닙니까?
그런데 베드로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겼습니다. 이제 그의 눈에는 눈에 가득한 고기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조용히 바라보고 서 있는 예수님이 눈 앞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만선의 기쁨에 취해있을 때... 그 때가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얄팍한 성공에 취해서 정신이 없을 때... 저의 짧은 목회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에도 그럴 때에 대부분 신앙이 식어지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빈 배로 시작된 인생, 이제 그의 앞에는 언제 그랬다는 듯이 펄펄 뛰는 팔뚝만한 물고기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럴 때엔 눈이 멉니다. 고기에 파묻혀 버립니다. 마치 우리가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 신밧드의 모험에서처럼 ‘열려라 참깨’의 주문을 외워서 보물이 가득 찬 동굴에 들어간 맘씨 나쁜 사람이 보물의 빛에 취해서 그만 다시 동굴 문을 여는 암호를 잃어버린 격입니다. 동화에서 보면 그는 보물이 가득 차 있는 곳에서 죽어서 세계에서 최고로 비싼 무덤에서 죽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승리에 취해서, 명예에 취해서, 쾌락에 취해서, 물질에 취해서 옆에 서있는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이 살아가기 시작할 때, 그 삶에는 깊이가 사라져 갑니다.

과연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깊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집니다.
“선생이여!” 라고 부르던 호칭이 “주여.”라고 바뀌었습니다. 교양미 넘치는 선생님, 좋은 얘기, 도덕적인 얘기나 해 주시고, 내가 필요한 요구나 채워주시는 예수님과는 깊은 곳으로 떠날 수 없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참 신기하다고 생각됩니다. 도대체 물고기 잡힌 것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어울리는 말인가? 요즘 말대로 이 무슨 쌩뚱맞은 말입니까?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서 뜬금없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울부짖는 베드로의 모습은 아마 주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 깊은 곳을 떠나 더 깊은 곳으로...
그러나 이 장면은 오늘의 말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깊은 곳으로 가서 만선의 기쁨을 맛본 베드로가 깊은 곳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가기 시작한 삶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삶이 더 깊은 곳으로 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영적인 눈으로 정확히 들여다 보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이사야가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였을 때,

(사 6:5)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예수님은 자신의 발 아래 엎드려 떨고 있는 건장한 한 사나이를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시면서 그에게 자신과 함께 더 깊은 곳으로 가자고 초대하셨습니다.
이제는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고기 쫓던 삶에서 사람을 낚는 삶으로, 만선의 꿈을 꾸는 뱃사람의 삶에서 교회를 세우는 선교사의 삶으로, 게네사렛을 무대로 삼던 삶에서 이젠 온 세계와 열방을 향하여 복음의 나팔을 부는 자의 삶으로!!!

나는 소망합니다.
저의 삶도 더 깊어지길 간절히 원합니다. 제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또 다짐하고 싶은 말,
“정연수 목사야, 적어도 얄팍한 목사는 되지 말자! 삯꾼은 되지 말자. 얄팍한 이익에 요리조리 흔들리는 사람은 되지 말자. 감정에 휘둘려서 웃고 우는 사람은 되지 말자. 이익보다는 명분을 선택하는 굵은 삶을 살자.”

사랑하는 오천가족 여러분,
빈 배로 실망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혹 반대로 배에 가득 찬 것에 눈이 현혹되어 본질을 보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말씀에 순종할 용기가 없는 분이 계십니까?
인생이 이게 아닌데... 하는 회의가 들고, 좀 더 내 인생의 가치있는 일은 무엇일까? 하는 거룩한 고민을 갖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깊은 곳에서 우리는 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깊은 곳에서 우린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만 머물러 있기에는 내 삶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것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 비하면 우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취해서 더 깊은 것을 맛보지 못하고 산다면 억울하지 않으세요?

물고기가 가득 차있는 배와 그물을 뒤로한 채 떠오르는 아침의 햇살을 머금고 조용히 갈릴리의 예언자 예수님의 뒤를 따라 새로운 삶, 미지의 삶, 불확실하지만 그래야만 후회없는 생을 살 것 같다는 믿음으로 길 떠나는 시몬, 야고보, 요한... 그들의 이름에 이어 바로 당신의 이름도 함께 쓰여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정 연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