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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육체적인 그리스도인을 극복하라 (갈 5: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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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 5:16)

  사람들은 서로를 평가하기를 좋아합니다. 평가하는데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부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을 그 평가의 형태에 따라 성격과 기질과 삶의 형태 등,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해 보곤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향해 “나는 어떤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을까?” 라고 질문해 보는 것과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라고 평가해 보는 것은 자기이해와 함께 자신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나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다고 봅니까? 우리 자신은 어떤 부류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신앙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잘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으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평가함에 세 부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 부류에 속해 있음을 봅니다. 

  육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의 사람으로 자연인 그대로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나 생활이 육체가 좋아하는 대로 지배받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즐길까? 의 육체적인 욕구로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살전 5:19-20)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바로 이렇게 육체의 일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성의 의(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마음속에서나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양심의 가책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훌륭한 선생이나, 성자나 예언자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고 성경의 모든 기적은 하나의 신화와 같은 것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일들이 생소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이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우스광스러운 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니 축복이니 하는 것들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장님이 꽃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고 귀머거리가 교향곡의 아름다움을 감탄치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이러한 것을 알고 깨닫게 하는 영적인 기능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자연인들은 영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영의 일들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일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라는 것, 지옥이니 천국이니, 영생이나 멸망이니 하는 것을 믿게 하려고 논쟁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논쟁으로 설득된 사람은 또 다른 논쟁으로 설득되면 그 믿음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과 능력이지 설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도다”(고전 2:4-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적인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 곳에서 자유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적인 사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5장 21절에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육신적인 자연인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되십시오.

  영적인 신앙의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 하셔야만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의 영이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과 생활이 더 이상 육체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드와잍 무디(Dwight Moody)목사님께 찾아와 “목사님, 목사님께서 만약 저의 10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시기만 하면 제가 예수를 믿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아주 좋은 제안 같군요. 그러나 제가 먼저 한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지금 저와 함께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내일 아침 10가지의 질문을 가져오시면 제가 대답해 드릴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청년은 “예,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하면서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시기를 구하였습니다. 이튿날 그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자, 준비되었습니다. 질문을 하시지요.” 그러자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지난 밤 하나님께서 저의 의문에 모두다 응답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의 사람이 되면 영적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이해력을 열어주시기에 알게되고 믿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은 믿는 사람이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헬라어에서는 ‘안다’는 말이 두 낱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기노스코(ginosko)’입니다. 이것은 경험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말은 ‘오이다(oida)’라는 말로 ‘직관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경험으로 알기도 하지만 직관으로 아는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안에서 영적인 직관으로 깨닫게 하여 알게 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불을 켜는 것과 같습니다. 갑자기 모든 일들이 불을 켜듯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구주로 알게되고 믿어지며 천국과 지옥이 알아지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알게되고 모든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영의 세계를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만드는 성품을 이루어 갑니다.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영적인 사람이 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의 세계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 영의 세계는 기쁨을 가지게 하고 그 세계는 즐거움과 평화를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런 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사람이 왜 기쁜고 즐거운지, 왜 평화로운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왜 교회를 가기를 좋아하고 예배를 귀히 여기는지, 왜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지, 왜 걱정하지 않는지, 왜 술집에 가지 않는지, 왜 손해를 보면서도 굳이 깨끗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적인 신앙 세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신앙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알게 하시는 영적인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육체적인 그리스도인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사람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가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이되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 그 사람이 육체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육체적인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지만, 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도록 자신을 온전히 복종시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여전히 육체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의 세계를 깨닫고 영의 기쁨과 즐거움 평화를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육체적인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상태가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한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서 더 이상 자라기를 멈춘 것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매일 젖만 먹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영적인 깊이가 없어서 말씀의 깊이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지 못하는 연단 되지 못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육체의 욕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주 주장하고 쉽게 격분하고 투기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쉽게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지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했고,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사로 투기하지 말찌니라”(갈5:26)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 중에서 육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머물지 말고 자라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3-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삶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고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육체적인 그리스도인에 머물러서는 아니 됩니다. 더욱 분명하고 온전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대도시에서 무디(Dwight Moody)를 초청해서 연합으로 부흥회를 하기로  결정하고 그 일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원회 회의석상에서 한 젊은 목사님이 일나더니 이렇게 불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꼭 무디를 초빙해서 부흥회를 열어야 합니까? 무디 말고도 훌륭한 부흥사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무디 한 사람이 성령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이 때 다른 목사님이 조용히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무디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무디가 성령을 독점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내 말은 성령이 무디를 독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신이신 거룩한 영, 성령이 우리를 독점하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분명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육체적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사실만 가지고 만족해서는 아니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진정한 주인이 되시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영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육체적 그리스도인으로 평가되고 분류되지 마십시오. 영적인 사람으로 더욱 온전하십시오. 육체적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극복해 가는 아름다운 성도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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