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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과 분별 (마 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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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은 하나님 백성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삶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먼저 어떤 가르침에 접하느냐에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균형 잡지 않으면, 항상 왔다 갔다 하게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부분적으로만 읽으면 치우쳐서 편협하고 잘못된 이해를 가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깊게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이 통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비판과 분별’의 문제에 대해서 이러한 균형을 잡을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는 말씀을 그저 얄팍한 처세술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성경의 다른 말씀들 때문입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요 7:24),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라”(잠 17:15)는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정당한 비판이 있으며, 예리한 분별력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즉, 1절 말씀이 악을 보고도 침묵하거나 방관하라는 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의 의미는 2절에서 설명됩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 “비판”이라는 용어자체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고 긍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재단한다, 정죄한다, 최종 판결을 내린다’의 뜻도 있지만, ‘식별하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문제 삼으신 것은 비판 자체가 아니라 비판의 정당하지 못한 ‘기준과 태도’ 입니다.

“너희의 비판”은 ‘하나님의 비판’과 비판의 기준이 다릅니다. 사람들은 곧잘 자기 경험을 기준으로 ‘내가 그러했으니까 남도 그러하리라’고 속단하고, 자기 생각과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함부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묘하게 잘 둘러대는 습성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겠거니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보편적인 인간의 특징을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똑같이 적용해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저마다 독특성이 있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도 있고, 돈에 별 욕심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이 비판의 기준이 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비판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너희의 헤아림”은 ‘하나님의 헤아림’과 비판의 태도에 있어서 다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완벽한 균형 속에서 헤아리십니다. 죄는 결코 용서하시지 않으시나 죄인에 대해서는 한량없는 은혜와 긍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는 지극히 관대한 자비의 잣대로 헤아리며, 타인은 칼날같이 예리한 공의의 잣대로 헤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의 허물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용서하며 변호하려는 자세로 접근하지만,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비난하고 정죄하며 심판하려는 자세로 접근합니다. 나의 허물은 가려(덮어)주려는 태도를 가지지만, 남의 허물은 가려내려는 태도를 가집니다. 내 잘못은 축소하고 은폐하려 하지만 남의 잘못은 확대하고 공개하려 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정당하지 못한 판단의 기준과 태도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남에게 사용하는 우리의 기준과 태도는 남들이 우리를 대할 때 사용하는 기준과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라는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사용했던 판단의 기준과 태도들이 과연 정당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심문을 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3-4) 먼저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표독스러운 독기가 담겨 있고, 그 목구멍에서는 온갖 더러운 악이 흘러나옵니다. 남을 비판하고 있을 때,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면, 전혀 하나님 자녀답지 않은 사람, 오히려 잔인하고 무서운 악인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사람은 실상 그 마음에 사랑 대신 미움이 가득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남의 눈에 티가 자꾸 거슬리는 사람은 자기 눈에 들보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매우 교만한 사람이 가장 잘 부딪치는 사람은 다른 교만한 사람입니다.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견디기 가장 힘든 사람은 다른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능숙하게 둘러대는 사람은 미숙하게 둘러대는 사람을 즉각 공격합니다. 남의 눈에 티에 대해 참지 못하고 비판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눈에 들보가 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겸손하다면 교만한 사람을 품어버리기 때문에 마음의 분노가 생기지 않지만, 교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교만이 자꾸 눈에 거슬리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것이 자꾸 신경 쓰이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들었는데, 남의 눈에 티를 빼주려고 애쓰는 것은 참 우스운 일입니다. 어느 누가 눈에 대들보가 든 사람에게 자기 눈의 티를 빼도록 허락해 주겠습니까? 오히려 눈이 빠질까봐 결사적으로 저항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눈에 자주 거슬리게 하는 다른 사람의 허물이 발견된다면, 즉시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게도 티가 있지만 저 사람은 더 심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마음을 가진 ‘네 눈에 들보가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은 아끼는 마음에서 충고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눈에 거슬리는 상대방의 티를 참기 힘든 마음 때문이 아닌 지, 내가 너보다는 한 수 위라는 교만한 생각에서 그러한 것은 아닌지 말씀의 거울에 비춰 철저하게 자기 내면을 해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5절 말씀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고린도 전서 11:31-32절에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했습니다. 만약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했다면, ‘우리의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헤아림’도 ‘하나님의 헤아림’에 맡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형제의 허물을 바르게 분별하고, 하나님의 태도로 공의와 사랑을 겸비한 지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판은 아예 부도덕한 사람보다는 경건생활에 힘쓰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허물과 약점과 실수에 관대하기 쉽고, 그런 노력을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을 자기 기준에 따라 재단하고 심판하려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비판하는 태도에 빠질까봐 아예 경건의 노력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성숙하게 자라서 올바른 기준과 태도로 분별하는 일입니다. 더욱 예리한 분별력을 갖추는 것과 영적인 신중함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6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6) 우리가 함부로 사람들을 개, 돼지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간혹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정당한 기준과 태도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 주고,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은 진주 같이 귀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수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는 추호도 잘못이 없다는 완고한 마음으로 버티며, 오히려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잘 분별해서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고 말하고 있습니다.

7-10절까지 갑자기 기도에 대한 교훈이 왜 또 나올까요? 허물을 보고 비판하지 않는 것이 어렵고, 공의와 사랑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고, 바르게 분별하여 지도한다는 것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게 되고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b-3)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비판의 바른 기준과 태도를 주시고, 올바르게 분별하여 지도할 수 있는 분별력과 지혜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 “그러므로”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므로 라는 뜻입니다. 남을 대접하면 손해만 볼 것 같은 마음에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대접하고자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대접할 수 있는 힘과 대접할 수 있는 좋은 것을 그에게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줄 믿는 사람만이, 진실한 마음으로 먼저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늘 말씀이 구약 전체의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보다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며, 개돼지 취급 받기보다 존중 받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기보다 먼저 자기를 돌아보아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지도해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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