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모자람도 축복입니다! (왕하 17:1-16)

  • 잡초 잡초
  • 203
  • 0

첨부 1


# 1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왕조실록, 곧 왕을 중심으로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하나님의 선민이라 하는 저들의 역사가 너무도 처참한 비극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그에 따른 비극 하나 없는 왕조사란 없다 하겠으나, 저들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들여다보노라면,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을까? 의아해지는 것, 사실입니다.

저들의 비극은 이스라엘 민족의 분단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3대 왕이었던 솔로몬이 죽은 이후,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의 소용들이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인데요, 그 중 남 왕국 유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북 왕국 이스라엘은 그에 반대하는 <여로보암>이 통치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창기 역사가 더욱 처참하고 비극적이었음을 볼 수 있는데요, 이 비극의 출발점엔 북 왕국의 태조인 <여로보암>이 있었습니다. 22년간 북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 대신 숭배하게 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신했고, 백성들을 함께 오직 죄악의 길로만 치달았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는데, 성경은 그를 가리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다!>(15:26)고 전해줍니다. 부전자전이라 했던가요? 아비 따라 죄의 길로 행하였다는 건데요. 그랬습니다. 저들 부자, 대를 물려 악을 행하며 죄를 쌓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답>은 왕이 된지 2년 만에 그의 군대장관 <바아사>의 칼에 목숨을 잃고, 왕위를 빼앗깁니다. 한 마디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것인데요, 모든 쿠데타가 그러하듯, <바아사> 장군 역시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멸하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북 왕국 태조의 왕손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숙청했던 것인데요, 그 후 <바아사> 장군은 24년간을 통치하면서 죄에 죄를 더 쌓아갑니다. 해서 성경은 그를 향해서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역사가 <여로보암>의 원죄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원죄가 계속해서 대물림 되고 있는 거죠.

<바아사> 장군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엘라>가 왕위에 오르는데, 불행히도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자의 아들의 말로가 참으로 비참한데요, 그는 왕관을 물려받긴 했지만, 감당치 못하고, 결국 왕궁에서 밤낮으로 술만 퍼마시다가, 왕이 된 지 2년 만에 역시 군대 장관이었던 <시므리>의 칼에 죽임을 당합니다. 다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던 것인데요, 이 때 <시므리> 장군 역시, <바아사> 장군의 온 집을 죽이되, 그 친구들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숙청을 했다고 합니다. 죄가 대를 물리면서 더 잔혹해졌다는 뜻인데요, 그렇게 <바아사> 장군과 그의 아들은 자신들이 <여로보암> 가문에 저질렀던 죄악 그대로를 되돌려 받으면서, 비명에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라>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시므리> 장군의 경우는 더 처참합니다. 그는 왕이 된지 겨우 7일 만에 불에 타 죽고 맙니다. 저들 역사상 가장 단명했던 왕인데요, 어쨌든 <시므리>장군의 뒤를 이어 <오므리>라는 사람이 왕이 되었지만, 그도 6년 만에 죽고 맙니다. 해서 이젠 백성들 모두가 다윗의 뒤를 잇는 선왕이 출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마침 <오므리>의 아들이 있어, 군사 쿠데타 없이 평온한 가운데 왕권을 이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어쩜 그렇게 부전자전일까요?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그전의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사악한 왕이니 말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전합니다. / 왕상 16:30 / (읽기) /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한 왕>, 그가 바로 <아합>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최고로 사악한 왕 <아합> 뒤에는 그 보다 한 술 더 뜨는 죄인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부인 <이세벨>이었습니다. 해서 <아합과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가장 사악하고, 가장 잔인하고, 가장 나쁜 왕과 왕비로 그 이름을 남겼던 것입니다.

문제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조합인 <아합과 이세벨>이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저들 선조 때부터 오랜 세월을 두고 죄악이 대물림 되면서, 그 결과로 빚어진 악의 총화요 악의 화신이라는 겁니다. 해서 늘 노래 부르듯 복 빌어 드리는 말씀, 기억하시죠? 믿음이 대물림 되면서 축복도 함께 대물림 되는 가정되시기 바랍니다. 정말입니다. 죄 대신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시고, 그 믿음과 함께 저주 대신 축복을 대물림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2
이러한 암흑기에 하나님은 그래도 저들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못하시고, 또 한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그가 바로 열왕기상 17장에서부터 등장하는 선지자 엘리야인데요,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엘리야, 그가 드디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하여, 사악한 왕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17장 1절,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사람, 나 엘리야가 입을 열지 않으면, 비도 내리지 않고, 이슬도 내리지 않을 거라는 경고지요, 속이 다 후련합니다. 시원합니다. 통쾌합니다. 이제 <아합>이 무릎 꿇고 사죄하며 용서를 비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에서 하나님은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십니다. 직접 들어보실까요? / 17:2-3 / (읽기) / <아니,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라니요,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니요, 제가 누군데요, 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인데요, 저 지금 처음 등장했는데요, 그런데 어서 가서 숨으라니요, 그리고 까마귀를 명하여 먹게 하신다니요. 하나님, 저 엘리야거든요?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나님!>

<아니, 기왕에 <아합>왕에게 이 종을 보내셨으면, 무슨 이적이나 기사를 나타내 보여주셔서, 저 나쁜 놈, 아합이 당장 무릎 꿇고, 회개하게 해 주실 일이지, 이제 겨우 말 한마디 한 것뿐인데, 어서 떠나 도망하여 숨으라니요, 이래서야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의 체면이 설 수 있겠습니까?> 모두 다 이유 있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엘리야에게 어서 가서 숨으라고만 하십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깊이 묵상하며 헤아려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하필이면 까마귀를 명하여 먹게 해 주신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아니, 기왕이면 사람을 시켜 먹을 것을 가져오게 하셔야지요. 아니면 좀 더 그럴 듯하고 믿음직한 짐승을 시켜 먹을 것을 가져오게 하시든지, 아니 하필이면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부정한 새로 여기는 까마귀를 시켜 먹게 해 주신다니, 얼른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엔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한 마디로 태조 <여로보암> 이후 북 왕국의 왕들과 그 백성들이 하는 짓을 보니, 너희가 부정하다고 멸시하거 경원시하는 저 까마귀 보다 못한 족속들이라는 겁니다. 내가 저 사악한 것들, 저 못난 것들을 통해 역사하느니, 차라리 까마귀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쳐 갈 것이니, 너는 똑바로 보고, 똑바로 전하라는 겁니다. 까마귀 보다 못한 것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우리의 엘리야는 우리와 달랐습니다. 어서 가서 숨으라 하니,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릿 시냇가로 갑니다. 6절에 보니, 까마귀가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가져왔다고 전해 줍니다. 그 떡과 고기를 시냇물과 함께 먹고 마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까마귀와 시냇물이 없으면 영락없이 굶어 죽어야 하는 상황, 뒤집으면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해야 하는 상황, 바로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먹고 마실 것조차 모자라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지요. 모자람 속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17장 7절을 보니,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자, 얼마 후 그 시내까지 말라 버렸던 것입니다. 저 같았으면 대번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따졌을 겁니다. <아니, 하나님, 여기까지 오라 하시어 왔으면, 최소한 시냇물은 마르지 않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 이젠  물도 빼앗아 가시렵니까? 하나님께 순종한 저에게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만 합니까? 정말 해도 너무 하십니다. 하나님!> 이번에도 이유 있는 항변 맞습니다.

그랬습니다. 점점 타들어가는 시내 바닥을 바라보며 엘리야의 심정도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대들지도 않았습니다. 물이 말랐으니, 우물을 판다는 둥, 인간적인 대안을 마련하려고 애를 썼던 흔적도 없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명령대로만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를 하나님은 한 순간도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주간 새벽 제단에서 받은 말씀 한 마디, 복습하고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내 머리로 이해될 때는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무조건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되어서 순종하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고요,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 절대 명령으로 받아 무조건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되면 순종, 이해가 되지 않으면 복종, 이것이 엘리야의 후예들이 취해야 할 마땅한 자세이기 때문임니다.

# 3
말라버린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명령만을 기다리던 엘리야에게 드디어 음성이 들려옵니다. 8절인데요,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번에도 얼른 이해하기 힘든 명령을 하십니다. 직접 들어보실까요? / 17:9 / (읽기) / 왜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 하실까? 그것도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번엔 까마귀였는데, 이번엔 과부를 통해 먹을 것을 주신다는 말씀은 또 무슨 뜻일까? 왜 이렇게 하시는 걸까?

그러나 이해가 되진 않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그 길로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갑니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상당히 부유한 과부를 예비해 두셨을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동안 시냇가 노천에서 노숙 생활을 해온 이 종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번엔 돈 많은 집에서 편히 쉬게 해 주실 모양이다! 고마우신 우리 하나님!> 아마, 저라도 그런 상상과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저 멀리 사르밧 성이 보입니다. 그런데 성문 가까이에 도착하자, 한 과부가 거기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여인인 것 같긴 한데, 그런데 직접 성문 앞까지 나와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다니, 이 대목에서 기대가 어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왜? 돈 많은 과부라면 직접 성문 앞까지 나와 땔감을 줍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선지자 엘리야가 이 여인에게 묻습니다. 10절이지요?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그러자 고맙게도 그 여인이 즉시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합니다. 그 때 다시 엘리야가 그녀를 불러 세우고는 한 가지를 더 청합니다. 11절이지요.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자 비로소 여인이 입을 열어 한 마디 하는데요, 기가 막힌 내용입니다. 직접 들어보실까요? / 17:12 / (읽기)

무슨 뜻입니까? 나에겐 떡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 이제 더 이상 살아갈 수조차 없다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으로 음식을 해서 아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눈 뒤, 이제 죽을까 한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목숨을 부지하기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거지요.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 모든 것이 다 모자라는 상태, 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아마 선지자 엘리야의 속이 또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제 좀 편히 쉬나 했더니, 오히려 먹고 죽으려는 가난한 과부와 그 아들을 살려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처음 와 보는 타향에서 엘리야가 돈을 벌수도 없는 일, 인간적으론 매우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모자라는 상황, 그 무엇으로도 모자람을 채우기 힘든 상황, 결국 또 다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 4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상태의 선지자 엘리야와, 이제 마지막 남은 것 마저 아들과 함께 끓여 먹고 동반자살 하기 직전의 과부는, 이렇게 만났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모자라는 두 사람이 만났던 것인데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모자람 속에서 만난 두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모자람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열어 가시며, 저들을 놀라운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선지자와 과부의 만남 이후에 일어났던 아름다운 일들에 대해선 여러분이 잘 아실 줄 믿고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단, 성경이 전하는 그 결론 대목만 함께 읽으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으로 받고 싶습니다. / 17:15-16 / (읽기) / 거기 15절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는 대목, 표시하시고, 별표 다섯 개, 그리고 16절의 서술어, <다하지 아니하고, 없어지지 아니 하니라!>에 역시 표시하시고, 별표 다섯 개, 참으로 중요한 대목인데요, 모든 것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저 여인은 선지자의 말대로 순종하여, 목숨도 건졌고, 아들도 살렸고, 은혜와 축복이 다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은 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종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이해가 되면 순종하시고, 이해가 안 되면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억지 부리는 것 아닙니다. 가능하면 순종하시고, 어려우시면 복종이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가장 귀한 메시지,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아무리 모자라는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모자람 없이 채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할 것, 하나님은 처음부터 풍족한 곳으로 인도하시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모자람을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물이 부족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이나, 물댄 동산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내 말라 버리는 시내, 한 마디로 물이 모자라는 시냇가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먹을 것도 마찬가지,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먹을 것이 풍성한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황량한 곳, 그것도 아침저녁으로만 물어다 주니, 점심은 굶어야 하는, 한 마디로 먹을 것조차 모자라는 곳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엘리야로 하여금,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훈련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합으로 상징되는 저 악의 세력과 맞서 싸워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나에겐 왜 이리 부족한 것이 많으냐고 한탄하십니까? 나에겐 왜 이리 모자란 것이 많으냐고 원망하십니까? <아합과 이세벨>을 보니 저렇게 나쁜 짓을 하고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하나님을 믿는 나만 이리 못사느냐고 탄식하십니까? 아니오, 내 인생의 모자람은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모자람을 통해서 나를 더 큰 믿음의 종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훈련 과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자람 속에서 오직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인 차원의 모자람,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릿 시냇가에서의 일차 훈련이 끝나자, 하나님은 또 다시 선지자 엘리야를 모든 것이 부족한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를 위한 제2차 훈련 과정이 시작된 것이지요. 거기 사르밧에서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로 하여금, 한 움큼의 밀가루와 조금 남은 기름으로도 함께 먹고 살 수 있음을 깨달아 알게 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의 삶이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놀라운 생의 진리를 터득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모자람 속에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에 놀라운 은총과 기적이 임한다는 사실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사르밧>이라는 단어, 히브리어로 <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이란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울 선지자 엘리야를 훈련시키고자, 모든 것이 부족한 그릿 시냇가를 거쳐 사르밧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르밧의 과부는 아합 왕과 맞서 싸워야 할 엘리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 맞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과부, 모든 것이 모자라는 불쌍한 여인 보다는, 힘 있고 권세 있고 가진 것 많은 사람이 선지자 엘리야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모자라는 여인을 통해 선지자 엘리야를 훈련시키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모자라는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이 모자라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왜 나에겐 귀인을 보내 주시지 않느냐고 한탄하십니까?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왜 나에겐 백마 탄 기사를 보내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하십니까?  왜 나에겐 이렇게 모자라는 사람만 주시는 거냐고 탄식하십니까? 아니오, 모자람이 오히려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자람을 통해 나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훈련 과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 모자란 상대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 주신 천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모자라는 사람 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선 아주 존귀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요, 모자람도 축복입니다.

# 5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이 너무나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건도, 사람도, 넘쳐납니다. 보리 고개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먹을 것이 넘쳐 납니다. 아니, 먹다 버리는 음식 쓰레기를 처리하는 비용만 연간 15조원을 넘는다 합니다. 아직도 멀쩡한 물건들도 많이 버려지고 있습니다. 학교에 가보면 물건 아까운 줄 모르고 버려지는 학용품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전히 재활용이 생활화 되지 못한 우리의 생활, 그러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걸핏 하면 내다 버립니다.

문제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정신적 빈곤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살기는 30년 전보다 훨씬 더 잘 사는데,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는 더 나아지지 못한 것 사실입니다. 사람은 넘쳐나는데 믿을 만한 사람은 점점 더 찾기 힘든 세태를 살고 있습니다.

왜? 모자람을 통한 훈련 없이 너무 갑자기 잘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자람을 통한 믿음의 훈련을 지금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삶의 중심인 믿음이 바로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넘치는 물질, 넘치는 사람에 치여, 믿음이 오그라들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문제는 현대인들은 모자람을 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 모자람은 죄악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준 것보다 모자라게 돌아올 때 무척 화를 냅니다. 그리곤 무엇이든 넘치게 받기만을 원합니다.

아니오, 오늘 주시는 말씀, 모자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모자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자람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세상은 줄 수 없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무엇인가 모자라는 상황은, 오히려 복을 주시려는 훈련 과정인 것을 믿으시고, 이 무더운 여름 날, 모자람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