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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7대 표적 (2) : 신하 아들의 치유 (요 4: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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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표적 중 두 번째 사건의 기록입니다. 첫 번째 표적은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중병으로 거의 죽어가던 중 예수님을 통해 치유 받고 생명을 되찾은 사건입니다. 역시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기적에 담긴 ‘영적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을 가리켜 특히 ‘표적’(Sign)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표적은 통해 예수님 어떤 분인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오늘 살펴보는 두 번째 표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 자체를 한갓 이야깃거리로 지나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의미와 신앙적인 교훈을 찾아봐야 마땅합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위기는 신앙의 기회 : 참 신앙의 중요성

본문에 등장하는 왕의 신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지였습니다. 총독이 파견되어 통치했는데, 유대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괴뢰 정부를 내세웠습니다. 그게 곧 헤롯 왕가입니다. 아마 여기 나오는 신하는 헤롯 왕실의 신하로 고위관리였으리라 짐작됩니다. 어떤 학자는 이 사람이 눅8:3에 등장하는 헤롯의 청지기 ‘구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모르고, 어쨌든 당대에 부귀영화를 누리던 상류층 인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쉬울 게 없었던 그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 아들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46절 보면, ‘그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역시 정관사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그 아들이 외아들임을 암시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다 죽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급했겠습니까? 자기가 당한 것 이상으로 괴로웠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아무리 부귀영화와 권세가 있어도 속수무책인 자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한심스러웠겠습니까? 한마디로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그 사람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위기가 닥쳐옵니다. 혹은 질병, 혹은 사고, 혹은 사업 실패, 실직, 가정 문제, 자식 문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찾아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런 위기의 때에 흔히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는 기회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위기를 이렇게도 표현해 봅니다. “위기는 신앙의 기회이다!”

그렇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위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분들이 다수 계실 줄 압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예들이 수두룩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들어보죠.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 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구국 공신으로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뭐가 아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문둥병’이라는 위기가 닥쳐온 겁니다. 하지만 그는 예전에 포로로 붙잡아 와서 종으로 부리던 이스라엘 소녀의 전도를 받고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러 이스라엘까지 찾아갑니다. 엘리사의 명령대로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던 중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합니다.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에게 문둥병 자체는 고난이었지만, 그것을 계기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위기가 오히려 신앙의 기회, 축복의 기회가 된 셈입니다.

반면에 위기의 상황에 오히려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지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잡으려면 든든한 밧줄 같이 제대로 된 것을 잡아야지 지푸라기를 잡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위기 상황에 참 하나님을 잡으면, 예수님을 잡으면 제대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엉뚱한 것을 잡으면 멸망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위기 상황에서 세상을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이단이나 거짓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실패하고 망하게 됩니다.

어떤 부자 목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부자는 돈이 많다는 뜻이 아니고, 아버지도 목사, 아들도 목사라는 뜻입니다. 아들이 어려운 일을 당해서 고민 고민하다가 편지를 보냅니다. “아버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도와주세요.” 그런데 지혜로운 아버지가 그 편지를 읽고 이렇게 답장했다고 합니다. “번지수가 틀렸네. 하나님께 물어 보게나.” 인간을 붙잡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해결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8장을 보니까, 사울 왕 시대에 블레셋 군대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에 신접한 여인 찾아갑니다. 하나님을 만나야지 그러면 되나요? 망하는 지름길이죠. 사울은 바로 그 전쟁에서 비참하게 전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 점을 치러 가기도 합니다. 어느 시사 주간지 특집으로 「점술공화국」이란 기사가 나온 적있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니까 가관입니다. 고학력자, 상류층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가는지 모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교인들 중에 상당수가 그런 데 찾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점장이들의 말에 의하면 단골도 많다고 합니다. 어디 온전한 신앙인들이 그랬겠나 생각되지만, 어쨌든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기 상황 속에 이단에 빠지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옛날 전도관에서는 교주 박태선이 발 씻은 물을 끼얹으며 치유와 기적을 간구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요즘에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것 좋지만 잘 분별해야 됩니다. 어느 기도원에서는 성령 수술한다고 손톱으로 긁어 놓고 소독한다고 물을 발라 줍니다. 곪아서 큰 병 되는 경우도 있고, 간혹 병에서 낫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나았는지 모르지만 이건 정말 아닙니다. 전혀 잘못된 겁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것처럼 마귀도 기적을 행합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 ” 살후2:9~10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런 경우 혹시 병을 고치고 문제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멸망합니다. 그렇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러므로 혹시라도 그런 데 빠지면 안 됩니다. 잘 분별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 주변에 그런 분들이 생기지 않도록 뜯어말리시고, 미리 미리 참 하나님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위기의 때에 누구를 찾아갑니까? 하나님 찾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찾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왕의 신하는 그 다급한 위기 상황에 다행히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가버나움과 가나는 34~35 킬로미터 이상 되는 먼 거리입니다. 요즘 같으면 차로 한 시간도 안 걸리지만 당시로서는 꽤 먼 거리입니다. 게다가 지체 높은 나리가 아직 무명 인사 같았던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갑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 아들의 병을 치유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와 온 가족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53절) 그에게 위기는 신앙의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와 여러분도 혹시 위기가 찾아오면 오히려 신앙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참 신앙의 특징 : 하나님(예수님)을 순수히 믿고 따르는 것

왕의 신하가 처음 찾아와서 간청할 때 예수님의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아니, 은근히 책망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잘 읽어보면, 이것은 예수님이 이 사람을 물리치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참 신앙으로 이끄시려고 그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의 신앙 상태가 바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신앙을 참 신앙으로, 성숙한 신앙으로 지도해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① 기적 중심의 신앙 :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48절. “ ...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아마 그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신 것 같습니다. 아직은 온전한 믿음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그의 신앙 상태는 이른바 ‘기적 중심의 신앙’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을 따르려고 하기보다, 기적만 구하는 신앙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을 믿는 신앙 자체를 배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기적 중심의 신앙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신앙 행태는 믿음으로 기적으로 바라는 게 아니라, 기적을 보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기적을 행치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하나님의 기준 그대로 믿는 것인데, 자기 기준으로 자기 생각대로 믿고자 하니까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할 수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항상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할 수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항상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식이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거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마12:38~39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순수하게 믿으면 좋은데,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는 대라는 식으로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돌아서고, 기적이 일어나도 십중 팔구 기적만 챙긴 후 돌아섭니다.

예수님이 5천명을 배불리 먹인 ‘오병이어’ 기적 이후 우매한 군중들이 몰려옵니다. 이미 기적을 한번 행하셨으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순수하게 따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기적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떡을 만들어 달라고 떼를 씁니다. 요6:30, 6:34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적 이전에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 이후에 기적이 진짜 좋은 표적이지, 믿음이 없는 가운데 주어지는 기적은 단순한 기적에 불과하고 결코 유익이 안 됩니다. 아니, 기적을 봐도 강퍅한 인간은 하나님을 순순히 믿지 않습니다. 눅 16:27 이하를 보면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가운데 아브라함과 부자의 대화가 나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가서 불 속 갈증의 고통 받다가 천국의 나사로를 통해 물 한 방울 얻고자 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그후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다시 세상에 보내 자기 형제 다섯에게 지옥에 오지 말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역시 거절당합니다. 그 이유는 다시 세상으로 나가 살 수도 없거니와, 설사 그런 기적을 봐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선지자나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적을 체험하고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의 예를 많이 보았습니다. 중병에 걸려서 혹은 사업에 크게 실패해서 교회에 나왔다가 병을 고치고 사업에 호전된 후에 영영 교회를 떠나버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경우는 참 신앙이라고 볼 수 없죠. 기적만 구하고 축복만 구하는 잘못된 신앙 행태입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문제는 한번 해결되어도 또 생기는 겁니다. 질병은 치유되어도 다시 병들 수 있고, 결국은 죽는 게 인생입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무덤에서 살아났지만 나중에는 다시 죽었습니다. 완전한 치유는 오직 구원입니다. 오직 천국 영생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구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구원 천국 영생 부활을 믿지 않는 가운데 구하는 기적은 헛것입니다.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하에게 단순히 기적만 구하지 말고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정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지 테스트하십니다.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는가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정말 믿는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믿는 게 마땅합니다.

② 말씀 중심의 신앙 :

신하는 예수님께 가버나움 자기 집으로 함께 가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죽기 전에 빨리 가자고 조릅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그 신하의 신앙이 아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참 신앙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기준대로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그저 용한 의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직접 가야 되고, 죽기 전에 가야 된다고 요구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실히 믿었다면 에수님이 하시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을 하나님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해서 “아마 하나님은 이러 이러한 분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 기준을 설정해 놓고 내 방식으로 기도하고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순순히 하나님을 인정하고 따라는 게 참 신앙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 모세가 하나님께 어떻게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할지 질문했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출3:14에 나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

그래서 성경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대로 알 수 있는 곳은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성경에 계시해 놓았습니다. 그 외에 인간이 자기 생각과 상상으로 하나님이 이러 이러한 분이라고 믿으면 그게 잘못된 신앙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그게 참 신앙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때로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기적이 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사항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섭리 가운데 하나님이 판단하셔서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시는 겁니다. 우리 편에서는 주시면 감사, 안 주시면 감수하면 됩니다. 그게 참 신앙입니다.

50절(상) 보니까 그 신하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신하가 요구하는 것과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네 아들이 살았다!” 여기서 ‘살았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을 보면 현재형(ζη) 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미 회복되어 살아있으니까 걱정 말라는 겁니다. 이제 그냥 그렇게 믿고 집에 가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신하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데 ... 수십 킬로도 더 되는데, 가는 동안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가시나 안 가시나, 옆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안수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놀라운 것은 이 말씀에 신하가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50절(하). “ ... 믿고 가더니 ... ”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참 신앙입니다. 신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집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는 종들을 만납니다.(51절)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그 시각(제7시 = 오후1:00)이었습니다.(52절) 놀라운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이 된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이 오늘도 살아계심을 믿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표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기적이 나타나지 않아도 믿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허락지 않으실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 믿음을 지키는 게 참 신앙입니다. 그 신앙을 기뻐하십니다. 그 나름대로 축복하시고, 그 나름대도 인도하십니다.

다니엘 3장을 보면 풀무불 앞에서 참 신앙을 보인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단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물론 나중에 기적이 일어나서 살아났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믿지만 기적이 안 일어나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참 신앙인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 속에서 끝까지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신앙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이게 참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겁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의 위협에 처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면 얼마나 멋졌을까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스데반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후 하나님은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키는 등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살아있는 것보다 더 큰 일들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당신의 주권으로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믿음으로 순종하고 따라갈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 성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여성도이신데, 시골에서 살다가 간암에 걸려 큰 병원을 찾아 상경했습니다. 교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해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게 됐습니다. 그러나 본인도 온 교회도 기도했지만 병은 심해졌고 임종 가까워졌습니다. 그분은 임종이 가까워진 것을 예감하고 교회 성도들에게 심방을 요청하고 가족과 일가친척을 다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녹음기를 준비시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비록 병은 고치지 못했지만 예수 믿고 천국 가게 된 것 감사합니다. (남편을 향해) 여보! 예수 믿고 천국에서 꼭 만납시다! (자식들을 향해) 얘들아, 내 앞에서 녹음기에 대고 다짐해라. 예수 믿고 꼭 천국에서 만나자.” 비록 치유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침내 온 가족이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장례식은 천국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구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구원받으시고, 할 수 있으면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거나 잠자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어느 쪽이든 믿음으로 감사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 이 세상에 승리하다가 참 신앙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 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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