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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심있는 그리스도인 (딛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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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열심 있는 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의 배후에 있는 추진력이 바로 열정입니다. 위대한 음악이나 문학, 드라마나 건축의 배후에 있는 힘이 바로 열정입니다. 열정은 위대한 일을 만들게 합니다.

열정은 전쟁에서 군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희생하게 하는 힘입니다. 바로 황우석 같은 과학자로 하여금 새로운 업적을 이루게 하는 추진력입니다. 열심이야말로 토인비와 같은 학자로 열 두 권의 역사의 연구를 쓰게 하는 추진력입니다. 운동선수로 하여금 기록을 갱신케 하는 힘입니다.

열심 없이는 아무런 위대한 작품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열정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케 합니다. 생을 활기차게 만들며 새롭게 합니다. 열정이 식으면 삶이란 따분하고 피곤하고 무료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날 때부터 허락하신 열정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단 두 마디로 요약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풀어서 설명합니다. “너의 모든 열심을 다해, 모든 기도를 다해, 모든 지성을 다해, 모든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앙은 가진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주 “마음을 다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열정을 다해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합니다. 열심을 다해 복종하고 신뢰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은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무엇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열심을 다해서 하십시오. 무엇을 하든지 그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나 여러분이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일이나 집안을 치우는 일이나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다면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대강하지 마십시오. 대강하려면 아예 시작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2장 11절은 말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동적으로 열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불을 댕겨 놓는다고 불이 저절로 잘 타오를 것만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부채질을 해 가면서 활활 타 오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은 말합니다.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롬 12:11, 표준새번역) 영적 열심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부채질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심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연세 드신 분도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열정은 성격과도 무관합니다. 내성적이든지 외향적이든지 상관없이 열정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나타나는 표현이 달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실 때 감정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감정적으로 느끼도록 만드셨습니다. 때로는 환경이 체제가 우리를 억누를 수 있지만 열정이란 자연적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기분이 좋아도 나빠도 감정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열정은 식습니까? 매사에 대한 이전의 열심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부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열정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열정을 삼키는 원인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불분명한 목적

목적이 없는 삶은 사람들의 열정을 빼앗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입니다. 삶의 목적이 없으면 왜 살려고 노력하겠습니까? 누가 애를 쓰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려고 애쓰며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겠습니까?

삶의 목적을 잃으면 산다는 것은 무료해집니다.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잃고 살아가면 점점 더 열정은 사라집니다. 열정과 목적은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없는 삶이란 무덤덤해집니다. 사는 것이 고달플 따름입니다. 이사야도 한 때 자신의 삶을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사49:4, 표준새번역)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느낌을 느껴보지 못했습니까? 목적 없이는 열정은 없습니다.

반면에 분명한 목적은 뜨거운 열정을 창조합니다. 삶의 목적이 뚜렷해지면 사는 것이 새로워지고 활기가 넘치기 마련입니다. 기껏해야 자신을 위해서 산다면 삶에 대한 커다란 열정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위대한 목적을 가진다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일에 대한 열심을 품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으로서 열정이 타오를 것입니다. 

나이가 많던 적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중대한 일이 기다리면 잠자리를 박차고 아침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꾸물거리고 기다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상한 목적은 뜨거운 열심을 품게 합니다.

2. 사용하지 않는 재능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재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남다른 것을 다 주셨습니다. 신앙인으로 태어날 때 우리는 한 가지 이상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탁월한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사는 게 시들해지고 맙니다. 활활 타 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직업을 갖지 못하면 자식들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에 나기지만 그 걸음이 활기 찰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직업에 매여 있으면 열심히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삶의 열정을 잃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자기의 잠재력을 100%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질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은 밥 먹고 살라고 주신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이나 능력은 먹고 살기 위해서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만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주신 것이 아니라 더불어서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성도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를 사용하는 즐거움을 맛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목적이 있어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재능과 은사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면 열정이 회복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각 사람은 주께서 그에게 나누어 주신 대로, 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그대로 살아가십시오.”(고전7:17, 표준새번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에 따라서 살아가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를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직업보다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적합한 사역을 찾아 섬기는 기쁨을 회복하십시오. 받은 은사와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면 여러분의 삶은 활기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으로 창조되었는지 거울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십시오. 생긴 모습만큼이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은사가 다릅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삶의 과정이 다릅니다. 여러분이 배운 것들이 다릅니다. 여러분이 잘 할 수 있는 기질이 다 다릅니다. 울산교회는 설립 50주년을 맞이해서 그동안 훈련받은 모든 성도들이 적재적소에서 섬길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사역개발원을 통해서 자신의 사역을 발견하고 섬김으로 섬김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도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50주년 기념해서 큰 빌딩을 세우지는 못할지 모르지만 건물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정말 사는 기쁨을 회복할 수 있도록 영적인 열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우리가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3. 균형을 잃은 시간표

우리 모두가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쓸까 고민을 합니다. 과도해도 그렇고 그렇다고 펑펑 논다고 해서 삶의 의욕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은 일에 시달려서 열정이 식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계속 빈둥댐으로 삶의 열정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삶은 균형이 필요합니다.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에 균형이 요구됩니다. 언제나 주기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변에는 언제나 도와야 할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섬겨주어야 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쉬지를 못하고 받지를 못하고 재충전할 기회를 얻지를 못합니다. 그런 분이 여기 계시다면 이 설교를 듣는 것보다 가서 쉬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 오면 그동안에 섬긴다고 너무 허덕였는지 아버지 집에만 오면 마음이 풀어져서 주무시고 있으면 아예 집에서 주무시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오늘 주보에 보니까 “목사답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는 칼럼이 있는데요 교회 나온 사람보고 집에 가서 주무시라고 하니까 담임목사가 목사답지 못해서 부목사들이 모두다 목사답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주기만 하면 자신도 다른 사람도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과 저는 슈퍼맨이 아닙니다. 슈퍼우먼이 아닙니다.

하기는 정반대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언제나 받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저기서 받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집회에 참석하기를 원하는 사람이고 성경공부라고 하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배우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무언가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주님 당대에도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들었던 것 같아요. 그도 그럴 수 밖에 없죠. 그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인해서 모든 청중들의 시선이 주님께로 향했고 주님이 계신 곳에는 이렇게 빈자리가 남아있지를 않았습니다. 주님이 답답해 하셨던 것은 듣기는 열심히 와서 듣는데 그들의 삶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불은 왜 켭니까? 불을 켜서 박스 안에 넣어두기 위해서 켭니까? 아니면 등잔위에서 비취도록 하기 위해서입니까?  여러분은 설교 왜 듣습니까? 그 들은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라고 주님은 도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공부 해야 되지만 우리는 공부한 것 가지고 사용하는, 활용하는 장을 갖지 못하면 듣기만 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50년 동안 우리 울산교회가 열심히 해서 정말 교육 프로그램이 잘 짜여져 있고 훈련을 잘 시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데 대해서 자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서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역시 좋은 프로그램에 훈련을 잘 시켰더니 세상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울산교회 성도들이 아주 탁월하다 그렇게 말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실 여러분들 가운데서 그런 분들이 많은 것 때문에 자부심을 가집니다. 저는 제가 은퇴할 때 쯤 되어서는 책을 한권 만들고 싶습니다. “울산교회 사람들” 울산교회 사람들이 어떻게 광역시의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들이었는지 여러분들의 헌신의 기록들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이렇게 많은 자리에서 예배에 참석하기는 하지만 그냥 무임승차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울산교회 한 성도로서 자기 역할을 감당하지 않고 그냥 묻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전체가 하나님의 열심 있는 친 백성이 되어서 해야 할 일이 이 땅에는 남아있습니다. 균형 있는 식단이 신체에 필요하듯이 균형 있는 프로그램을 영적으로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다섯 가지 하나님의 목적을 지난 연말에 우리는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성경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

4. 고백하지 않은 죄

죄 짓고 열심을 낼 수는 없습니다. 재빨리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고 신속히 우리의 열정을 앗아가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백하지 않은 죄입니다. 죄를 지으면 사람들은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합리화 합니다. 고백하지 않는 죄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우리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 .  온종일 괴로움과 슬픔에 싸여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시38:4) 여러분은 열정과 죄의식을 함께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죄의식을 처리할 수 있는 아주 손쉬운 방안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부끄럽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하고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사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평강 주시고, 기쁨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죄짓고 무엇 때문에 몇 달씩, 몇 주식, 며칠씩 마음속에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미쁘고 의로우사 우릴 용서하시길 기뻐하십니다.

잘못한 일이 생각나면 곧바로 하나님께 아뢰고 용서받은 자의 삶을 시작하십시오.

5. 풀지 못한 갈등

하루에 대한 기대를 갖고 일어났는데 아침 밥상에서 함께 사는 가까운 사람과 티격태격하고 나면 기분이 상하고 하루 종일 회복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해결하지 않은 갈등은 우리의 기쁨을 삼키고 열정을 앗아갑니다.

가정에서뿐이겠습니까?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등이나 충돌이 생기면 당사자가 모두 기분이 상합니다. 이기고 지고가 없습니다. 아랫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 모두의 일입니다. 누구든 갈등을 풀지 못하면 삶의 열정을 빼앗깁니다.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열정적인 삶을 살기 원하면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든지 열정을 앗아가는 세 가지는 피해야 합니다. 분노와 시기와 원한입니다.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5:2) 18장 4절도 말합니다. “분통 터뜨려 봤자 자네 몸만 상할 뿐이지. 자네가 그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땅이 뭐 버림받기라도 할 것 같은가 ? 바위가 끄떡이라도 할 성싶은가?”(욥18:4, 현대어성경)

분노와 시기, 분통과 화는 언제나 삶의 열정을 빼앗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용서가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거듭거듭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의 삶에 평강과 열정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당한 것만 해도 억울한데 그 사람이 여러분의 감정까지, 그 사람이 여러분의 마음까지 계속 지배하도록 그렇게 내어 맡겨야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노와 시기가 미움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열심과 열정을 회복하길 원하면 용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6. 후원공동체가 없는 삶

혼자서 외롭게 지내면 삶의 열정이 식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아무라도 홀로 독처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독처하는 것”은 낙원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유일한 좋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결혼을 한 사람이든지 독신으로 지내는 분이든지 상관없이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상대방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고안해낸 무서운 형벌이 독방에 지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한 사람이 독방에 들어갔다고 뉴스에서 많이 떠들었지요? 독방에 가서 지내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생각해 낸 방법 에 가장 고통스러운 하나의 방법입니다. 결혼을 하든지 독신으로 살든지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어려움에 봉착할 때 지원공동체는 아주 소중합니다. 혼자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도 함께 풀면 풀립니다. 후원공동체가 있어서 여러분을 격려하고 지원하며 때로는 책망도 해야 우리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혼자 낑낑대다가는 삶의 기쁨과 의욕을 상실하기 십상입니다.

전도서 4장은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4:9-10)

아직도 소속된 구역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속한 소그룹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속고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살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도움이 필요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반드시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기 와서 예배하면서 구역이 없는 사람은 울산교회의 건강한 맴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일날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것만큼이나 주중에 같이 모여서 소그룹으로 교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꼭 친구가 필요합니다. 많지 않아도 좋지만 누군가 여러분을 이해하고 편들어주고 지원해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편들어주는 조부모가 있는 아이가 정서적으로 건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소그룹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 전화 한 통화 하면 함께 와서 손잡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이런 그룹들, 저는 지난 10년 울산에서 지내면서 목사님들 하고 그런 관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사실 참 이상한 말이지만 이 땅에 이 세상 나라를 주와 하나님의 나라로, 그리스도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일한다고 하면서도 교단이 다르면 목사들이 평생 만나지 않고 지내도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교단 다르면 안 만나도 사는데 지장이 없어요. 다 바쁘고. 그러나 지금 울산은 변하고 있습니다. 안보면 보고 싶어 하는 목사님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보면 반가와 할 줄 압니다. 지난번 서울 올라가서 사랑의 교회 세미나 받으면서 한분이 안 오셨길레 전화를 했어요. 당장 두 사람 비행기 타고 올라오라고. 세미나는 다 끝나지만 우리가 같이 지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라 오셨는데 제가 감동했습니다. 그래야 됩니다. 노는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탁하면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 결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지만 그래도 함께 지내기 위해서, 이것이 다음 일을 위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관계가 형성되어야 사역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도 함께 해야 힘이 나고 먹는 것도 함께 먹어야 맛이 난다고 말하질 않습니까?

마지막 일곱 번째 우리의 열정을 앗아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7. 영적인 굶주림

열정의 맨 밑바닥에는 영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심령의 문제입니다. 돈으로 열정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건강으로만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약물 복용으로 열심을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마음 안에서부터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만 가지고 있질 않습니다.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로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에 영양을 공급해야 합니다.

매주일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힘을 소진시키는 상황을 만납니다. 함께 사랑하고 살도록 하나님이 같은 지역에 보내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를 비난하고 우리를 잘못 오해하기도 합니다. 실망하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한 이런 상황을 여러분은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힘이 소진됩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서 힘써야만 합니다. 안 먹이면 아이들이 크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장사가 없습니다. 세끼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 끈질기게 다음달 “7, 8월호 복 있는 사람 할인된 가격으로 사무실에 가서 구할 수 있습니다.” 나도 대단한 것 같아요. 그리고 여러분도 대단한 것 같아요. 매일 영적인 양식이 공급되어야 되고 매주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영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굳어지고 차가와집니다. 저는 십 수년 동안 혼자 지낸 어떤 권사님을 만나서 한 7년 가까이 섬겼던 적이 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전혀 같은 신앙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이 안될 만큼 다른 이야기를 할 때는 잘 하다가도 성경 이야기 하려고 하면 눈감고 꺼버립니다. 느껴지지 않습니까? 설교자는 그것을 알아요. 어떤 사람들은 제가 모를 줄 알고 딴생각 하고 있다가 제하고 눈이 마주치면 끄덕끄덕 합니다. I know that. 저는 압니다. 그걸. 말씀을 듣고 있다가 은혜를 받는 건지 아니면 나하고 눈이 부딪히니까 미안해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건지 그것 모르고 내가 설교를 어떻게 합니까? 압니다. 그런데 이분은 진짜 다른 이야기를 잘 하다가도 성경 말씀만 딱 펴면 꺼버립니다. 내가 마치 무슨 돌 앞에, 벽 앞에 가서 이야기하는 것 같이. 여러분 오랫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면 사람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이야기 교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도 싫어합니다. 영이 뒤틀리고 피폐해집니다. 사막과 같아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숨이 멈추기 전에, 수년 전에 벌써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방이 없을까요? 의도적으로 영을 먹이고 살찌워야 합니다. 어떻게? 골로새서 2장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일상생활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생기 넘치는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께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분의 터 위에 서서 살아가십시오. 주님 안에서 성장하고 진리 안에 서서 강하고 건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일에 감사하며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십시오.”(골2:6, 현대어성경)

열정적으로 한 평생 살아가려면 항상 하나님께 접속하십시오. 우리는 자체적인 동력이 없습니다. 자가 발전기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접속 할 때에 그 영광스러운 힘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쓸 수가 있습니다. 더불어 조용한 시간을 갖도록 일정을 조정하십시오. 여러분의 영적인 뿌리를 주님께 깊이 내리도록 시간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날마다 여러분과 주님의 관계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열정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당신처럼 열정을 갖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흔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을 말합니다. 수난(Passion)이란 단어는 바로 열정(Passion)이란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수난, 거기에 바로 하나님의 열정이 나타난 장소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정이 그리스도의 수난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그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신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알기를 원하시며 여러분이 그분을 알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구약 출애굽기 34장은 소개합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34:14) 우리는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워낙 500년 동안 유교 문화에서 질투는 여자의 철거지악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이 질투하시나?’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기 아내를 다른 남자가 눈짓을 하는데도 마음에 아무 움직임이 없으면 어떻죠? 자기 남자를 다른 여자가 데리고 가서 시간을 보내는데 그래도 마음에 평온을 유지할 수 있으면 하해와 같이 마음이 넓은 여자입니까? 아닙니다. 비정상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쏟으신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기 까지는 만족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놓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은 언제 가장 기뻐하느냐 하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서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주를 지으신 분께서 나하고 만나는 걸 뭘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게 생각하는가, 쉽게 납득은 안됩니다마는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재물로 내어주셨다고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해서 잠잠히 바라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열정의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에 감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창조주께서 여러분이 그분을 알기를 원하시며 친밀한 관계를 갖기를 열렬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일날 교회 안 오는 것? 와서 졸고 있는 것, 와서도 십일조 안하는 것 그게 큰 죄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은 무엇입니까? 간음입니까? 동성연애입니까? 비난입니까? 살인입니까? 우리는 그렇게 착각들을 합니다.

계시록 3장은 말합니다. 교회의 주인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미지근함이라고 지적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예수님이 보시는 가장 큰 죄악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는 것입니다.  적당한 헌신이란 결코 크리스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부모가 교회로 내보낼 때 “너 적당히 해”, 남편이 아내를 내보내면서 “적당하게 믿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결코 적당할 수가 없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말합니다. “‘적당’이란 말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할 때만큼은 ‘적당’한 말이 아니다. 그 분의 거룩하심과 광대하심 그리고 우리를 위해 드리신 영원한 희생에 감사하는 정신에 휩싸일 때, 최선을 드리고자 하는 자세가 될 수밖에 없다” 적당하게 떼우고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시 정각 예배시간 되면 다 이 자리에 앉으셔야 합니다. 10분, 15분이 지난다음에 그것도 지난주일 그러고 그 지난주일 그러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입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왔다고 믿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열정 없는 사람은 시간을 아껴서 나오는 사람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데이트를 하는데 52번이나 계속 지각을 하면 여러분은 그런 사람에게 딱지를 안 놓겠어요? 그런 사람이 그래도 좋아요? 정말 놀랍습니다. 여러분은 어떨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해는 하시지만 그렇게 해서는 정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열정을 다해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된다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그런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필요한 것은 중직자 숫자가 모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착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4명 장로님 더 뽑지 않아도, 12명 장립집사, 11명 권사 세우지 않아도 중직자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헌신하는 중직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헌신하는 직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적당하게만 하면 처음 나온 사람들이 착각한다니까요. 예수 믿는 게 그런 것인 줄로.

세상을 향해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멋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많이 배운 사람 아닙니다. 많이 가진 사람 아닙니다.

세상에 충격을 주는 사람들은 열정의 사람들입니다. 열심을 다해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속에 불타는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어왔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아니하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자신을 던진 사람들입니다.

처음 예수 믿는 사람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지 내 죄가 사함 받았다는 그 사실로 인해서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고 노래하는 사람 아닙니까? 우리의 삶에 주인 되신 하나님이 계시고 장차 여기를 떠날 때 아버지의 나라에 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아서 찬송했던 그런 기억들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까? 왜 그런데 세월과 함께 천국 간다는 이야기조차도 “그래” 그러고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도 타오르는 사람은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고 감사와 찬송이 있으며 그 삶에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헌신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우리가 처음 접했을 때는 감격하다가 세월과 함께 당연한 사실로 여겨지면 새로워져야 합니다. 오늘 이 순간보다 전에 내가 예수 믿을 때 더 열심히 믿었다. 그때 참 뜨거웠다. 이렇게 생각하면 회개해야 됩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하나님에게서 밀어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저리 밀쳐내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아내는 그러데요. 남편 손이 잘못해서 스치기만 해도 마음이 상한다고. 왜 나를 밀어 내냐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밀쳐냈습니까? 마음이 상했습니까? 그래서 식었습니까?

이전에 더 가까이 주님을 섬긴 적이 있는 사람은 이제는 회복해야만 합니다.

먼저 주님의 진단입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이어서 주님의 처방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5)

현대어 성경은 더욱 실감나게 번역합니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의 앗아가는 일곱 가지 이유를 말씀했습니다. 그 일곱 가지를 멀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열정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저는 우리 울산교회가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더 이상 적당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백만 영혼을 위해서 헌신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한 주간 열정을 회복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정 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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