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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담대한 그리스도인 (요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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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용기 있는, 담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겁쟁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학교 다닐 때 생각해보면 겁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어떤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도 하려고 듭니다. 우리 모두는 용기 있는 사람, 담대한 사람을 존경합니다. 우리는 겁쟁이를 멸시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모두 용기 있고 담대한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악역을 맡은 사람은 대개 비열하고 겁쟁이로 등장하곤 합니다. 어떤 가문이든 명예를 중요시한다면 그 가족은 비열하고 겁 많은 사람이 아니라 용기 있고 담대한 처신을 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을 향해서 우리는 존경과 박수를 쳐 드립니다. 자기 생명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군인, 시민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경찰, 불타는 건물 안에 들어가서 사람을 구출하는 소방대원을 우리는 존경합니다.

사실 극적인 일들뿐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만나는 일상적인 도전들을 직면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살면서 비뚤어진 길로 가지 않고 바른 길을 걷기란 역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매일 선택을 해야 합니다. 매일 우리가 하는 일의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비겁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담대한 사람이 될 것인지 비겁한 사람으로 전락할 것인지가 판명됩니다.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서 거기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헌신해야 하며 진실해야 하며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자질의 배후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담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변화된 사람이 될 때에 세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변화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세상을 닮아가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과 혼합되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 흐름을 따라가면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흐름을 거슬러 가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기꺼이 변화를 자신의 삶에 수용 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그 말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 그러나 그런 말입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왜? 세상은 불의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십자가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 세상은 한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따라서 살려고 하면 주님이 받았던 핍박을, 주님이 받았던 환난을 우리가 피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환난을 당한다. 그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그것은 기정사실입니다. 놀랄 것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잘 믿어 보려고 하는데 어려움을 당합니까? 조소를 당합니까? 전혀 놀랄것이 없다는것, 당연한것입니다. 그럴 때에 “담대하라.”고 격려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우리가 담대할 이유는 주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 되시는 주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너희로 담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매일 살아가면서 담대할 수 있는 세 가지 기초를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불이 붙는 건물로 뛰어들지 않고도, 수류탄을 덮치지 않고도 매일의 일상 속에 담대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오늘 말씀하려고 합니다.

1. 담대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를 직면합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죄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이 죄라는 단어를 기피하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단어대신에 실수, 착오, 인격적인 결함,  판단오류라고 말하길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모두 죄를 범한다고 성경은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죄가 없다고 우기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만 옳다고 주장하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한다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너그러이 그렇게 인정해 주지 안챦아요? 그렇게 끝까지 주장하는 자기 스스로가 세뇌될지 모릅니다. 우리 속사람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실수 하는 것은, 잘못 하는 것은, 죄를 지을 수는 있는데 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인정하기를 우리는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서 자기 잘못을, 실수를,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가 정직하게 인정 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존경할 것입니다. “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 라고 말 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말로 비겁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미안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 용서해 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겁쟁이 입니다. 혹시 여기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 가운데서 아직 한 번도 그 말을 해 보지 못한 분은 없습니까?

특히 자녀들에게, 아내에게 “잘못했다”라는 말을 입 밖에 내어본 적이 없는 분은 없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 용서 해 주세요.”라는 말을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실수를 하면 인정하고 그것을 보상 하려는 행동을 할 때에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들어 내놓고 고백하기 두려운 것들은 없습니까? 결혼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에서 두려워서 말 못하는 죄악은 없습니까?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아니라고 우기며는 당분간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잠깐 동안은 가면을 쓰고도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항상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을 여러분 보셨습니까?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와 책임을 직면하지 못하면 결혼도 관계도 깨어집니다. 사업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을 못하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결혼생활을 파괴해 온 주범입니다.

우리 남자들이 이것을 더 어려워합니다. 길을 잃어도 잘 물으려고 하질 않고 헤매면서 마치 드라이브라도 하는 척 합니다. “멋있는 경치이네”하고 바람을 잡습니다. 남자답게 늠름한 처신은 불완전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나온 가식입니다. 남자다운 늠름함이 아니라 도덕적인 비겁함 때문입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을 만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실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실로 용기 있는, 담대한 사람입니다.

새롭게 시작할 삶의 영역을 직면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울에 비친 대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울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지 말고 내가 살이 더 붙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쉬운 겁니다.

세상에 영구한 변화를 가져다 준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무흠한 사람들입니다. 사기치는 것은 오래가질 않습니다. 진리가 오래갑니다. 진리와 함께 가면 삶이 평탄합니다. “이 부분은 나의 강점이고 이 부분은 나의 약점입니다. 여기에서 가끔 실수하기도 했지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담대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나를 따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매우 정직했기에 수 천 년이 지난 우리까지 그의 연약과 실수조차 알 수 있습니다. 용기는 자신의 죄를 직면하는데서 나타납니다.

2. 담대한 그리스도인은 믿는 대로 처신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합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고전16:13) 오늘날, 옳은 바를 위해서 일어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많지를 않습니다.

의를 위해서 나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관용이 진리보다 중시되는 사회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국민화합에 무슨 첫 번째 원칙이나 되는 것처럼 “우리가 남이가?” 이러면 무슨 잘못이든지 다 덮습니다. 남이 아닌 사람들이 정직하게 이야기를 해야지, 용기 있게 교정을 해줘야 됩니다. 대통령과 가장 친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바른 말을 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옳고 그른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좋은 것이고 이것은 나에게 선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위해 일어나기를 주저합니다. “비판적인 사람” “편견이 있는 사람” “시대에 뒤진 사람” “꽉 막힌 사람”이란 소릴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심지어는 주위에 어떤 신자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알면서도 개입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침묵합니다. 바로 말해주길 원치를 않습니다. 지적해서 고치려 들질 않습니다. 사랑으로 꾸짖으려 들지 않습니다. “잘못이긴 해도 내가 누군데 잘못을 지적하랴”고 물러섭니다.

여러분이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겔3:18)

잘 생각해 보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면서, 혼돈된 삶을 살며 잘못된 길을 걷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된 행동의 책임을 나에게 묻겠다는 말씀입니다.

한 해 이백만 이상의 영아들이 학살을 당하는 책임을 정부와 의사에게 지울 수는 없습니다. 침묵하는 여러분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아이들은 자기의 항변 한번 할 수도 없고 저항할 수 있는 힘도 없는데 핀셋으로 집어서 죽여 버리는 이런 죄를 범하는데 이백만이 일년에 대한민국에서 죽어나는데 여러분 대한민국이 무사태평하고 여러분의 개인의 삶이 웰빙을 할 것을 바랍니까? 그런 죄를 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이처럼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이지 그 죄악을 우리에게 갚는다고 하면 어떤 비참한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나도 우리는 입을 열수가 없습니다. 6.25동란, 동족상잔의 끔찍한 일이었지만 일년에 이백만씩 죽지는 않았습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줄 알면서도 거기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면 삶이 내리막을 치달으며 삶이 멸망을 향해 내닫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향해서 코웃음 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소리치고 나는 내 운명의 개척자라고 허풍을 떠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수요일 날 북한에 들어갔다가 토요일 날 나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처음 3년 전에 갔을 때에 북한에 가서 느꼈던 말씀 한 구절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느니라” 그 한 구절이 제 마음속에 와서 닿았어요. 어리석은 자는 이르기를 그 마음이 하나님이 없다 하느니라. 나라 망쳐놓은 꼴을 보니까 하나님이 없다, 무신론의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볼 수가 있더라고요. 어리석기가 끝간데가 없어요. 대학생들을 다그쳐서 저 동네의 상당히 높은 100m 이상 되는 산 까지도 다 개간을 해놓았어요. 한 평의 땅이라도 씨를 더 뿌려서 곡식을 얻을 거라고. 그런데 비가 내려줘야 거기야 말로 농사가 될 수 있는 곳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풀 한 포기 없고, 나무 한 포기 없으니까 땅이 완전히 황폐화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그걸 머금어줄 풀이 없고 나무가 없으니까 홍수로 변해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물어 망하고, 홍수 들어서 망하고 그 고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소위 그들이 말하는 ‘고난의 대 행군’이라고 하는 기간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자식을 굶겨 죽이는 거예요. 백성의 지도자가 인민에게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굶겨 죽이는 거예요. 한해는 농사를 잘 지었다고 좀 여유를 부렸는데 세상에 일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휴전선을 딱 갈라가지고 북쪽에만 해일이 덮쳤다는거 아닙니까? 지금은 제 2의 고난의 행군, 그런 말들이 나오고 있을 만큼 식량 사정이 좋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우리가 무관심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보리고개 지나가고 맥추감사헌금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다 잊어버렸지만 우리 한번 마음먹고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아직도 우리 곁에 있는 초등학생들에게 물어보니까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비슷한 나른 어떤 나랍니까? 하고 물으니까 모두다 대답이 “북한”이라고 했대요. 우리하고 가까운 동족임에 틀림없습니다. 뭔가 우리 마음먹으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참으로 많이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알콜 중독이나 약물중독에 빠져있기도 합니다. 아니면 잘못된 관계를 맺고 결혼생활이 파괴되어 가는데도 침묵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습적으로 상대방을 속이기도 하고, 자기가 다니는 회사 물건을 훔치기도, 근무시간을 도적질하기도 합니다. 울산교회 담임목사 하는 것도 쉽지는 않더라고요. 교인들이 만나려고 하면 첨에는 선뜻선뜻 만났어요. 그런데 어떤 분은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와서 저하고 만나면서 자기하고 담임목사가 가까운 것을 보여주고 난 다음에 과시하고는 그 장면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더라고요. 그래서 요새는 아무 사연 없이 제한테 다가오는 사람을 제가 잘 안 만나려고 합니다. 갑자기 밤 먹으로 가자고 그러면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지구를 담당한 교역자한테 확인을 해서 내가 만나도 괜찮은 사람인지.

상습적으로 거짓말 하는 사람들, 회사 다니면서 회사 물건 자기 집에 옮겨 놓는 사람들, 여덟 시간 근무하기로 계약하고 들어가서 그 여덟 시간을 마음대로 도적질 하는 사람들, 음란한 사진이나 동영상에 중독 되어서 헤어나질 못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우리가 침묵하고 있다면 우리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변명합니다. “잘 살고 있는 것 같던데요, 내가 누군데 감히 판단합니까? 행복해 보이는데요.” 성경은 말합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14:13)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그러한 모든 웃음은 결국 가슴이 메어지는 것으로 귀착됩니다.

자신을 신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주장한다면 사랑 가운데서 바로 말해 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에서부터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바른 말을 친구에게, 가족에게, 배우자에게, 때로는 부모나 자녀에게 해야만 합니다.

“지금 너 아주 잘못 가고 있어, 그 길의 끝은 절벽이야. 돌아서야 해” 잘못된 길로 가는 데도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 사랑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사나 축제 때 설교 하면서 그런 이야기 했지요? “아직까지 여러분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 교회 다니는 친구 있으면 그 사람은 좋은 친구가 아니라고” 때로 사랑은 강인해야 합니다. 냉혹해야 합니다. 사랑하기에 대결해야 합니다.

“너를 사랑하기에 바로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단다. 요즈음 네가 하는 행동은 바른 것 같지를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우리도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우리를 담대하게 만듭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우리는 겁내어 침묵하지 않고 담대히 나서서 진리를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고 거기에 진리와 지혜를 얻으면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담대하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진리를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은 용기를 갖게 합니다.

3. 담대한 그리스도인은 믿는 바를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주님을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십시오.”(딤후1:7,8)

베드로도 같은 맥락으로 말합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하게 높이며, 여러분이 가진 소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벧전3:15)

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괴롭히질 마십시오. 진리의 몽둥이로 사람들을 후려치지 마십시오. 진리란 사람들을 향해서 쏘아대는 총알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치는 권투 선수의 장갑도 아니고 사람들을 찌르는 양날선 단도도 아닙니다. 예의를 가지고 진리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린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찔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하고 그 사람이 무슨 관계가 있는데 무슨 신뢰를 쌓았기에 처음 만나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그렇게 찌를 수 있습니까? 말은 맞아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상대방에 대해서 존경해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정말 아끼고 정말 여러분의 목숨만큼이나 존귀히 생각될 때에 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게 전달이 되지요. 그냥 길거리에서 아무나 만나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무례한 짓이예요. 주님은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아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언제나 예의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자기 열심 때문에 그냥 아무데나 찌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정 반대로 전도하라 그러면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되어 아는 게 없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무슨 우주공학을 연구해야 되는 건 아닙니다. 쉽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울산교회는 지금부터 15년 전부터 새생명 훈련을 해왔습니다.

“사영리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사이 영계에도 영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제1원리: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위하여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혹 글을 읽지 못하더라고 전할 수 있습니다. “젊은 청년, 이 책자 나를 위해 한 번 읽어주게”라고 부탁하면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여러분의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논쟁을 해서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보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사랑을 그들의 마음으로 전달하면 됩니다. 사랑의 가교를 통해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오도록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전문가가 되어야 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새생명 훈련을 받은 울산교회 성도님들을 존경합니다. 여러분의 입에는 천국열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침묵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용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우주공학 자처럼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사람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타내기만 하면 됩니다. 기회가 오면 사영리로 무장하고, 진리를 전하십시오. 여러분이 믿는 진리를 전하는 일에 담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지금 여러분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대한민국에서 우리 울산교회 성도들만큼 이 일에 잘 구비된 분들은 없습니다. 사영리를 가지고 전도 하는데는 나보다 훨씬 잘하는 사람들이 여기 모여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구역마다 팀미팅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 일대일로 만나서 양육할 수 있는 사람들이 구역마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생각하면 저는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 이 일을 15년 동안 해 오셨다는 사실, 우리만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큰 축복이기 때문에 이제는 광역 새생명 훈련원으로 승격해서 오늘 태화교회에서 1기생 파송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모든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새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용기를 갖고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디서 이 담대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세상을 바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담대함을 회복할까요? 네 단계가 있습니다.

3.1 공적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더 이상 숨어서 신앙생활 하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나 이제 예수 믿기로 했습니다” 공적으로 나타내는 세례를 받으십시오. 아파서 죽음의 자리에 누워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세례는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베풀겠습니다. “나는 겁쟁이가 아니라 예수 따르기로 했습니다.”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더 이상 숨어서 주님을 따르지 않고 나는 이제 당당하게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믿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껏 주님을 마음으로 믿으면서도 세례를 받지 못한 분은 없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아직도 세례를 안받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세례를 받고 싶었는데 성경을 한번 못 읽어서 못 받았다고요? 글이라고는 전혀 읽지 않는 사람에게 저는 성경 못 읽었다고 세례 안 준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매일 매일 신문은 꼬박꼬박 잘 읽으면서, 소설책 읽고 동화책도 다 읽어줄 줄 알면서 성경은 안 읽으면 그건 안 되지요. 읽을 시간이 정 없으면 들어도 된다고 했잖아요. 신약을 한번 다 들으시면 학습 문답 할 준비가 된 것이고 구약까지 다 들으면 이제 세례 받을 준비가 되는 겁니다. 세례를 통해 활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성도들과 함께 십자가의 군병 노릇을 해야 됩니다.

3.2 담대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용기를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사도 바울도 이를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엡6:19) 나를 위하여 담대하게 복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고 에베소 성도들에게 부탁한 바울이 스스로 그 기도제목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기도는 닛시 중보기도단 한테 다 맡겨 버리고 말았을까요? 기도 제목을 내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자기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부탁까지 했습니다. 내가 담대히 말할 수 있도록 내가 입을 여는 순간 하나님께서 나한테 말씀 주시고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3.3 하나님이 사용해 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여기 땅 위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일에 담대할 것을 기대하며 소망합니다.”라고 아예 써서 눈에 잘 띠는 곳에 붙이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써서 외우라고 그러면 “목사님 나는 요즘 들어가면 바로 나가버립니다”그러는데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나 자꾸 드나들다 보면 나중에는 완전히 그냥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확실한 각인이 될 겁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빨리 외우지만 빨리 외우는 사람은 빨리 잊어버리고 천천히 외우게 되기 때문에 자기가 머리 나쁘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런 사람들은 절대 안 잊어버립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나타낼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요단강을 건너라, 홍해를 건너라 할 때에 법궤를 메고 발을 디디는 순간 물이 쫙 갈라졌다는 것을 기억하시죠? “요단강물만 마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보무당당 건너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건너가라고 그러면 발 한발 내디디십시오. 한발 내디딘다고 해서 빠져 죽습니까? 내 디뎌야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지요. 내 디디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헌신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 해 주십니다.

왜 우리는 바른 말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담대함을 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용해 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이번 선교대회에서 유한준 선교사님이 딱 한마디 하신 것 제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내가 평생 섬겨왔는데 왜 큰 것을 기대하지 못했는가”하는 것입니다. 33년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왜 하나님을 위해서 큰 것을 기대하지 못했는가? 내가 그 나이 되어서 동일한 후회 하지 않기 위해서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하였습니다.

3.4 종말을 기억하십시오. 마치 세상은 자기들이 승리한 것처럼 설칩니다. 언론은 기독교의 치부들을 들추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쉽게 낙심되고 용기를 잃기도 합니다. 담대함을 얻기보다 낙담되고 맙니다.

그러나 결코 낙담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종말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승리할 것입니다. 만물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날 모든 것이 청산되고 보상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검소하게 살고 여러분은 정직하게 살고 여러분은 헌신하며 살려고 했는데 같이 교회를 나가도 적당하게 봉사하는데 요리조리 빠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꾸는 데만, 자신의 거처를 넓히는 데만 관심을 쓰는 사람들을 볼 때 어떤 때는 시험이 들잖아요? 내가 이렇게 아이들 우유도 제대로 못 먹이면서 십일조 내고 헌신 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 이런 의심이 들 때가 있지요.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만물이 새로워질 그 날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날 모든 것이 청산되고 보상될 것입니다. 적당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그냥 면피용으로 헌금하고도 신앙생활 하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쫓아내는 교회 있습디까? 그러나 정말 옆에서 보면 목사가 봐도 “조금 쉬어가면서 하십시오” 하고 말하고 싶은 분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라도 한 시간 덜자고 싶다는 부담이 올 만큼 열심히 살면서 주를 위해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이 오셔서 꼭 같이 서리집사였다고 똑같이 상을 주실까요? 나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믿음을 가진 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정말 힘들게 어렵게 주를 위해서 섬긴 사람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적당하게 예수 믿은 사람도 구원을 받더라도 불 가운데서 구원 받는 것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어떻게 목회하면 여러분이 좋겠습니까? 누구든 나오기면 하면 잘했습니다. 잘했습니다. 그렇게만 해 주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적당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신실하게 말해 주기를 원합니까?

저도 조금 있으면 환갑이 안 됩니까? 이번에 선교대회 준비위원장으로서 내가 개회사 하러 앞에 나갔다 들어오니까 은퇴하신 70, 80되신 목사님들이 “이제는 더 이상 젊다고 못 하겠더라” 그러시더라고요. 아무리 제가 나이가 들더라도 윤재권 장로님보다 더 나이가 들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요? 윤장로님 보시기에는 내가 아직도 계속 어리겠지마는 이제 나도 어느 정도 인생을 살만큼 살았는데 앞으로 남은 삶 살 때 남아있는 삶 살 때 남아있는 이 기간이 얼마 될지 모르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 올곧게 키우고 선명한 그리스도일 하는데 있어 내가 노력을 다 하다가 주님 부름 받아야지. 나는 누가 들어도 괜찮은 이야기만 하고 사람들의 눈치만 보고 왔지? 이런 책망 받고 싶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도 저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답게 선명하게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처벌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상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든 말든 이 일은 성취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전쟁의 승리자는 여러분입니다. 결과는 분명합니다. 최후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용기를 내십시오. 주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약5:8) 그 소망을 가지면 용기를 얻습니다. 최후승리의 희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담대함이 있습니다.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욥11:18)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의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눅9:26)

주님이 오실 때 여러분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세상을 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비겁한 변절자가 아니라 담대한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가운데서 여러분의 입장을 분명히 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주님을 알 때까지 진리를 외치십시오. 주님이 일손을 놓으실 때까지 여러분도 일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실 때 여러분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색깔은 너무 또렷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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