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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눅 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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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려고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나흘간의 평양 방문을 무사히 마치고 어제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수요일 오후 도착하자마자 평양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는 사실을 통고받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가끔 남측 대표들이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일들은 있었지만 우리 측에서 설교를 하는 일은 흔한 기회가 아니었습니다. 갑작스런 부탁에 북측 사람까지 앉혀놓고 하는 설교는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기도덕분으로 기적과 같이 말씀을 전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비록 듣고 있는 사람들이 때로는 긴장하기도 했지만 시비 거리를 제공하지 아니하고도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평양은 여전히 무채색의 도시였습니다. 비록 서울보다 훨씬 수목이 많은 친환경적인 도시였지만 건물마다 색깔이 없고 우중충한데다가 가끔 선명한 붉은 글귀들이 대조적이었습니다. 그 구호를 통해 3년 전보다 훨씬 김정일 정권이 확고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울산감리교회가 후원해서 개보수를 한 남포육아원을 먼저 돌아보았고, 그 다음날은 울산시민교회가 지원해서 개보수를 한 평양육아원을 돌아보았습니다. 평양육아원의 아이들은 영양상태가 좋았지만 남포육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확연히 차이가 날 만큼 영양상태가 좋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자가 들어가면 평양부터 먹인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나게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손님 온다고 젖먹이들까지 얼굴에 눈썹을 그리고 화장을 시켜놓았지만 좋지 못한 건강상태를 감추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얼마나 연습을 시켰는지 3, 4세쯤 되는 아이들의 얼굴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무용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보기 딱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소년궁전의 아이들도 불쌍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양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쇼윈도에 전시된 전시용 물건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인지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남측에서 왔다고 첫날 만찬부터 베풀어놨는데 참 딱하잖아요? 북한에 있는 인민들은 다 굶주린 상태에 있는데 우리는 전혀 별세계에서 환영 만찬을 해야 되니까 먹어주는 것이 도움이 되는지 안 먹어야 되는지 가닥이 잡히지 않습니다. 적은 차원에서 하는 행동과 큰 차원에서 어떤 영향이 주어질 것인지 구별이 잘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는 또 한 번의 부흥을 기도할 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상황으로 돌아갑시다. 마치 제가 평양 갔다 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제자들은 파송 받아서 사역을 하고 온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자기들의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고한대” 이 말 속에는 잘 관찰 하시면 흥분해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고한대, 사역을 하고 온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할말이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를 들어봐도 느낌이 다릅니다. 확실하게 놀라운 사역들을 하고 와서 하는 이야기들은 듣는 사람에게 까지 감동이 옵니다. 열두 제자가 그즈음 파송 받았던 일에 대한 감격스런 보고를 드립니다. 그들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께서는 함께 흥분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그들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벳세다라고 하는 지방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세다라는 고을로 떠나가셨으나”라고 본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쉬면서 재충전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무산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알고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배가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눈치 챈 무리들이 도보로 거기까지 찾아 온 것입니다.

생각이 있어서 제자들만 데리고 왔는데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맞이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영접’하셨다니 놀랍습니다.

사람을 좋아해도 계획된 일을 무산시키는 침입자 같은 무리들을 영접하셨다는 것은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토요일 오후 한참 설교준비로 바쁜 때 전화를 해서 길게 이야기를 하면 저는 그렇게 기쁜 마음만은 아니거든요. 갑자기 찾아와서 손님을 맞이하게 되면 손님은 앉아있지마는 저는 끝을 내야 될 일들만 머리에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달랐던 것 습니다. 모든 일을 하늘 아버지의 뜻에 맡기셨던 것 같습니다. 일 중심이라기보다는 사람 우선이었던 모양입니다. 따로 생각이 있어서 한적한 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오셨는데 그 계획된 일이 마치 실패 된 것처럼 보입니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마음도 좋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그런데 여기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시며”라는 표현은 상당히 긴 시간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그 증거로 질병을 고치시는 사역을 지금 행하시고 계십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시간이 들어가는 일들입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해가 질 시간이 가까워 졌다는 의미입니다. 해가 질 때 쯤 되면 누구나 밥 먹을 생각을 합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열두 사도가 주님께 제의를 합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배가 고파지니까 함께 모여 있는 무리들의 저녁 걱정이 되었는가 봅니다.

빈들에서 무얼 먹이고 어디서 자게 하나 걱정하면서 빨리 보내자고 제의를 한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무리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보내어 버립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지요.’ 말은 먹을 것 뿐 아니라 잠잘 자리까지 걱정해주는 듯 보입니다만 실은 스스로 그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자는 제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걱정되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제자들의 반응은 그래도 온건합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에 제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니요...”

마가의 기록을 보면 상당히 노골적인 불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200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가 먹이리이까?” 누가는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하다가 말꼬리를 흐리고 맙니다.

말꼬리가 흐려졌지요. 거기 작은 글자로 인쇄된 것은 본래 없는 말입니다.

200데나리온의 돈이라고 하는 것은 노동자의 200일 평균 임금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제자들이 그런 돈이 언제나 준비 되어 있었겠습니까? 돈도 돈이지만 어디 가서 무얼 사오느냐는 것입니다. 백만 인구가 사는 울산광역시에서도 한번에 오천 명, 만 명 음식을 준비하려고 하면 그건 장난이 아닙니다. 가까운 마을에 간다고 해서 무슨 빨간풍차, 파란풍차 그런 빵집이 있습니까?

말하다가 말고는 그만 슬쩍 말꼬리를 감추고 마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사고 어쩌고 하다가는 도대체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하던 말을 중단하고 맙니다.

그 이유를 밝혔는데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더라.” ‘장정만 해서 한 오천 명이나 되는 식구를 어디서 무엇을 사와서 먹이겠느냐.’ 자기도 말하다가 보니까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나 봅니다.

한 오천 명이나 된다는 것도 누가 그렇게 빨리 계산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인 군중들을 헤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매 주일 출석하는 성도들 숫자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예배 안내 담당 집사님들이 한사람씩 헤아려야 되는데 말입니다.  이천 몇 백 명 가지고도 이러는데 남자만해서 오천 명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숫자입니다.

선거 유세할 때마다 늘 시비 거리가 얼마나 동원했느냐 아닙니까? 경찰에서 추산한 것과, 정당에서 헤아린 것하고, 기자들이 계산한 것하고 늘 서로 다른 것 여러분이 아시지 않습니까?

부쉬맨들은 숫자를 세면 ‘하나, 둘, 많다’고 합니다. 세 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어도 많은 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열 마리를 가지고 있어도, 백 마리를 가지고 있어도 많은 것입니다. 많은 숫자를 헤아릴 수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더 착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제가 아는 선교사는 부쉬맨 선교를 하러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어리니까 아이들 줄 간식들을 언제나 상자에 준비해 가서는 집안에 두고 자기 아이들에게 늘 먹였는데 가뭄이 들어 배가 고파지니까 동네사람들이 소 좀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한 마리 잡으라고 부탁을 했대요. 그러니까 선뜻 한 마리 내주면서 소를 잡아서 선교사에게 한 덩어리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감추어 놓고 먹던 선교사가 감동을 먹은 거 아닙니까? 하나 둘 많다고 해도 그래도 나누어 먹을 줄 알면 얼마나 좋습니까?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그러십니다. 앉히라는 말은 ‘밥상머리에 앉힌다’ 이런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밥상머리에 앉을 때 우리 유교식으로 보면 태도가 좋지 않습니다.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밥을 먹으니까 그렇게 앉히라는 거예요.

우리는 한 오십 명씩 앉히라고 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우리는 앉으면 기적의 떡이 나올 것을 생각하고 기적의 떡을 다 먹고 나면 열두 광주리 남을 것 까지 다 알고 있으니까 시비 붙을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 해가 뉘엿뉘엿 져가니 걱정이 되서 빨리 보내자고 했는데 사람들을 밥상머리에 앉히라고 그러면 사람들로 하여금 김칫국만 마시고 가게 할 건지 도대체 어쩌자고 앉히라는지 그런 불만이 있었을 법 했는데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습니다.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진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해 여부에 상관없이 순종할 때에 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다 이해하고 나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앉히라’ 하시니 앉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순종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늘의 축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무리를 먹이기에 뭔가 있다고 생각한 제자들이 주님의 손으로부터 계속 공급되는 떡과 물고기를 무리 앞에 갖다놓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열두 광주리가 등장한 것 보니까 열두 제자가 같이 갖다 날랐던 것 같습니다. 열두 제자 중 누가 가장 신나게 날랐을까요? 그 때도 기질이 다 나타날 것 같아요 그렇지요? 베드로 같이 급한사람이 있어요.

저는 목요일 오후에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었는데 배탈이 나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내가 울산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이 되더라고요. 만약 여기서 죽으면 북쪽은 묻어주지 않습니다. 무덤이 없어요. 제가 몇 번 가봤는데 길가에 무덤 있는 걸 하나도 못 봤습니다. 다 화장해서 재를 뿌리는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좀 서운할 것 같더라고요. 기왕 전세기 내 온 거니까 아시아나 짐칸에 관하나 들어갈 자리 있겠지 생각하고 마지막 순간이 되면 그 유언까지 하려고 생각했어요. 하다 안 되면 옥동 공원묘지에 묻어달라고 하고 싶을 만큼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밤 열두시에 하는 수 없이 북한 의사를 불렀어요.

돌아오는 날 아침에는 같이 행동을 못했습니다. 호텔에서 쉬었어요. 그런데 뒤에 이야기 들으니까 제가 만약 갔으면 틀림없이 사고 난 엘리베이터에 탔을 것 같아요. 김일성 종합대학을 갔는데 평소에는 엘리베이터 하나만 움직이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안 쓰던 엘리베이터를 하나 가동을 시켰어요. 6층으로 올라가게 했는데 2층에서 사람이 탔는데 이종관목사님이 발을 디디는 순간에 안내원이 너무 많이 탔다고 타지 말라고 해서 안탔어요. 그런데 올라가는 순간에 불이 꺼지면서 쾅하고 밑으로 떨어진 겁니다. 그래서 두 명이 좀 많이 다쳤습니다. 한사람은 들것에 실려 오고, 한사람은 깁스를 해서 나오긴 했는데 저희가 타고 다녔던 4호 버스에 탔던 사람들이 주로 거기에 다 있었습니다. 저는 이종관 목사보다 행동이 조금 빠르니까 틀림없이 제가 갔으면 엘리베이터를 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배탈 난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아마 베드로는 신나게 갖다 날랐을 거예요. 그래서 떡과 고기가 많은지 떨어뜨린 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먹고 다 배 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께서 누구신가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앞뒤의 문맥을 주의해서 보면 앞부분에는 헤롯을 통한 질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군고?”(9절)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해서 사역하는 소문을 들으면서 궁금증을 헤롯이 가졌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군고? 이 기사 바로 뒤에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대답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20절).

질문과 대답사이에 나오는 사건 그것이 오천 명을 먹인 오늘 기사입니다. 이 기사를 통해서 누가는 사실 제자들 스스로가 일찍이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제자들이 놀라서 그 밤에 예수를 향해서 던졌던 질문입니다.

풍랑을 진정시킬 때 생긴 의문이 오천 명을 먹이시므로 결정적으로 해결됩니다. 물론 이 한 사건을 통해서만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거라사 인의 땅에서 제어할 수 없는 귀신을 쫓아내실 때, 열두 해나 시달린 혈루 병 여인을 고치시면서, 열두 살 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므로 주님이 점점 더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주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서 오천 명을 먹인 이 사건을 통해서였다고 누가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주님은 그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먹을 것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요즘은 그런 책들이 나오고 있지요? “뭉치면 죽는다” 남북이 통일 되면 하나가 되면 둘 다 죽는다. 그게 요즘 화두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했지만 지금은 뭉치면 둘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전력공급의 차이가 남한과 북한이 열배 차이입니다. 그러나 생활 격차는 열배보다 훨씬 더 큰 격차가 있는 것 같아요. 아마 백배 차이는 나지 않을까 할 만큼 삶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는 서독도 감당하지 못한 통일 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난감한 상황에 있었기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에 누구보다도 그들이 감격했을 것입니다. 계산상 통일 비용이 나올 수 있는 사회 같으면 아무도 감동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고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역사만이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결정적인 증거로서 오천 명 먹인 사건을 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니” 여러분 그 이야기를 들으면 뭔가 생각나는 부분이 없습니까?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니”,이 말들을 들으면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야 신앙의 공동체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던” 그 분이 바로 구주시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 속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던 주님의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을 시작하신 말씀이 여기에 비취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인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누가는 의도적으로 16절을 자세히 기록함으로서 주님의 한 동작, 한 동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니.... ’그리하여 “저가 뉘기에”라는 자신들의 질문에 답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명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벳세다 빈들에 모인 오천 명의 군중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격차를 보이고 있는 잘 사는 남쪽나라에도 끼니 걱정을 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사치하지 말도록, 그 여유 있으면 다른 사람 돕도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예 큰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도 담임목사님 한테는 알리지 말라고 한다는 소문도 요새는 납니다.

그래요. 저는 모든 사람이 똑 같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야 평등하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넓은 아파트에 살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좁은 아파트에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데서 평수가 같아야 평등이 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번도 그렇게 되었던 역사적인 사실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진 사람은 자기보다 덜 가진 사람을 위해서 조금은 생각 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올해 들어서 레위기 읽으면서 제가 제일 감동했던 구절은 이삭을 줍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이삭 남겨주는 그 정도는 부자에게는 삶에 타격이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것도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수한 논에서 이삭이라도 주우면서 희망을 주울 수 있다는 것, 그렇게 가진 자들이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작은 아파트에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큰 아파트에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인 지탄을 받기도 하잖아요? 이사를 들기 전부터 그 잘 지어진 아파트를 새로 리노베이션 한다고 그렇게들 하면 양식 있는 세상도 손가락질 하는데 저는 울산교회 교인들이 손가락질 받는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큰 아파트로 이사 가는 사람들이 저를 초대 하지 않는 경우들도 있더라고요. 그건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잘 한번 생각을 해 보시라는 겁니다. 저는 잘 사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서 가장 못하는 사람 수준으로 낮아져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위만 자꾸 쳐다보고 그렇게 하는 것 보다는 조금만 절제 해 주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고 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것입니다.

여러분이 더 좋은 차 뽑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랜져 뽑는다고 하면 그건 여러분 입장에서는 검소하게 사는 것이라는 것 맞지요. 반면에 티코 탈 형편도 안 되면서 소나타 뽑으면 그건 사치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몇 CC 이상 타서는 안된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야 할 분수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한을 맺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됩니다.

정말 북쪽 인민들은 포로수용소도 그런 포로수용소가 없을 만큼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도 딴 세계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물론 있어요. 그러나 대다수의 인민들은 상상을 불허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 살 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 울산에서 큰일들을 했더라고요. 남포 육아원은 울산 감리교회에서, 평양육아원은 울산 시민교회에서 개보수를 했습니다. 지금 사리원에 육아원을 개보수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는데 그거 우리가 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봅니다. 제가 오후에 당회 모이면 이야기를 내놓아 볼까 합니다. 우리도 50년 희년을 맞이하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민교회는 이목사님 평양 다녀와서 한번 헌금해서 7,8천만원 나와서 그거 평양 육아원 개보수 하는데 써서 지금도 가니까 거기 패가 붙어있더라고요. 남쪽에 있는 시민교회가 한거라고. 돈은 여기도 쓸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느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인지 생각해 보면서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교회가 달려들지 않아도 한 사람이 해도 할 수 있는 정도 아닙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은 우리를 통해 먹이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그럴 때는 순종하기만 합시다. 주님의 손에서부터 받아서 전달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한번 자신을 드릴 수 있는 분 없습니까? 믿음으로 자신을 드려서 순종할 때에 우리의 궁핍과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신 주님, 당신이 직접 하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주어서 제자들이 나누어 주게 하고 있습니다. 전능의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주께 드리기만 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공급하시는 그 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열두 바구니 들고 다니면서 제자들 마다 그 일에 수종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에게 충족할 양식 열두 바구니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다섯 개 떡과 두 마리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고 남았다면 지금 가진 열두 광주리 가득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드려질 때 어떤 역사가 또 한 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수 년 내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한반도를 강타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 때 우리는 새롭게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가득한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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