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은 온유합니다 (고전 13:4)

  • 잡초 잡초
  • 306
  • 0

첨부 1


톰 소여의 모험」을 써 유명한 작가가 된 마크 트웨인의 일화가 있습니다. 왼쪽 눈에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의안을 한 어떤 은행장이 트웨인에게 말했습니다. 『출판업을 하시느라고 대출이 필요하실 텐데, 만일 제 두 눈 가운데 어떤 눈이 의안인지 알아맞춘다면 오천 달러를 대출해 드리겠습니다』그러자 트웨인은 즉각 대답했습니다. 『왼쪽입니다』『어떻게 알았죠』『왼쪽엔 온정이 없어요. 눈빛이야말로 신체 중에서 온정의 광채를 내는 유일한 부분이거든요』

온유한 사람은 그 모습이 외부로 빛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의 모습은 전체가 온화합니다. 눈빛은 사랑으로 넘실거립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게 됩니다.

사랑은 온유 합니다. 온유는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선을 행함입니다. 온유는 참는 것에서 조금 발전한 형태입니다.

온유함은 겸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며'비천함'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사랑은 온유하며 라는 말은 자기의 주권이 있지만 사랑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떳떳하고 당당하게 그 주권을 행사하기보다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덕을 위해 그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더욱 분명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빌2:6-7)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합니다.

인내가 귀한 것이되 인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참는 데에는 제법 소질이 있는 생활을 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려운 시집살이를 견디느라 "귀머거리 3년이요, 병어리 3년이라"는 속담까지 만들어 놓고 참고 또 참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참다가 한번 터지게 되면 걷잡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결코 참아온 것이 아니라 버티어 온 것이요 벼르며 지내온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참을 뿐만 아니라 온유해야합니다. 그러기에 친절하며, 자기에게 지워진 바의 어려움을 다 소화하면서 오히려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향해 온유를 베푸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두고 보아도 살아있는 동안은 부드럽고, 또한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린 아이일수록 더욱 부드럽습니다. 그런가하면 이제 나이 들어 늙어 갈수록 거칠고 딱딱해졌다가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고 나면 아주 차갑게 굳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세계에 있어서도 살아있는 정신을 소유한 사람의 인간성은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사람, 심장이 멎고 한편으로 썩어가고 있는 그러한 인간성이란 완전히 굳어진 것이어서 전혀 여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딱딱 한 것 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좋아 한다 합니다. 교육학에서는'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으로 설명을 합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 교수가 이런 실험을 해 보았답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을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두 개의 인형 중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철사로 만든 인형 원숭이의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빨아먹을 수 있도록 젖꼭지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에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엄마 원숭이를 만들어 우유를 빨아먹을 수 있도록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기 원숭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첫날에는 아기 원숭이들이 와서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 가지 않고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를 아기 원숭이들이 빨아먹어 우유는 마침내 동이 났습니다.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디럭스바이블) 그렇다면 온유함을 실천하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친절하기로 유명했던 월리암 펜 에게 누군가가 그 친절의 비결을 물었더니 펜은 "나는 지금이 내 인생에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일을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까요" 라 했다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실천 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부부가 다 대학 교수인 어떤 가정이 오랫동안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분상으로나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분들이며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듯한 부러운 가정이요 흔히 말하는  잉꼬부부로 불리워지는 가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들 사이에는 편치 않은 문제가 언제나 깔려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팽팽하게 맞서 있기  때문인 것으로 그저 농담으로 주고받는 말에도 "누가 더 크냐" 는 것 때문에 결코 부드러움이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내오는 중 마침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가 되어 어느 날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남편이 아내에게 말하기를 결혼 후 처음으로 "여보 내가 잘못했오 미안하오."라는 이 한마디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평범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이 아내는 결혼생활 20년에 처음으로 그 한 마디를 듣게 되자  너무도 고마와서 사흘 동안을 울었다고 합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온유는 친절로 나타내게 됩니다.

"온유"(크레스토스)는 단순히 심리적 상태의 온유함과 상대방을 향하여 온유를 베푸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절로도 온유로도 표현합니다. 온유는 단순한 생각에서의 온유가 아닌 "행동적 온유"를 의미합니다. 이는 악한 세대에 대하여 끝까지 참는 인애가 있어야 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온유의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 본래의 색깔입니다. 사랑의 생리가 그러하고 사랑의 형태가 그러합니다. 그 때문에 동물도 사랑을 하면 유순해지고 사랑 앞에 고요해지며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봅니다. 진정 사랑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 앞에서 자기가 낮아지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말로 사랑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 곧 성경이 말하는 바의 사랑은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스스로 낮아져 어느 사이에 자기가 소멸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직도 자기 사랑에 몰두되어 있으면서 계속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친절을 생산하지 못하는 사랑은 비록 순간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욕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두고 사랑이라고 착각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고 친절하며 겸손한 행위로, 그 음성까지도 부드럽게 나타납니다. 이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랑할 때의 울음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은근하다합니다. 개나 고양이를 키울 때에도 보면 어쩌다가 사람이 그 새끼를 다치게라도 하게 되면 새끼들을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에 그 옮기는 방법이 업고 가는 것도 아니고 안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어미가 새끼의 목덜미를 물고는 끌고 가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몹시 가엾어 보입니다마는 그렇게 물려 끌려가는 새끼들은 좋아서 따라갈 뿐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이빨로 무는 것 같지만 실은 이빨이 아닌 잇몸으로 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도 온유함이 있고 부드러움이 있기에 목덜미를 물리고 끌려가면서도 반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 속에서도 주고받는 사랑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온유하며 상대를 향한 보호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던 습관과 생각이 바뀌어져 이제는 상대의 몸과 인격과 명예를  보호하는 의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강했던 자기 욕망은 무너지고 다른 사람을 위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에 정성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온유는 진정한 승리를 가져옵니다.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산상보훈에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강포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선 보기에는 힘이 있고 강한  자가 이길 것 같지만 성경은 분명히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 그가 복을 받고, 그가 승리하며, 그가 왕권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온유한 자인가 하는 거기에 최종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잠15:1)"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합니다. 아무리 포악한 말을 하더라도 대답하는 자가 부드럽게 대하면 그 노가 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 음성이 더 크냐며 서로 싸우고 있으면 그 다툼 그 문제가 언제 끝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온유한 자가 이긴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와 혀의 관계로 설명 합니다. 이가 단단해서 강하고 혀는 부드러우나 나이가 들면 단단한 이는 깨지고 부셔지고 빠지나 혀는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누구나 다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동차는 그 구조를 알고 보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다 단단한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물체입니다. 이처럼 강한 쇠와 쇠가 맞물려 있으면서도 무사히 잘 돌아가게 되는 것은 쇠와 쇠 사이에 윤활유라고 하는 부드러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동차에 이 윤활유라는 것이 빠지게 되면 단 1분도 못가서 자동차는 불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 거친 세대에 없어서는 안 될 윤활유 구실을 할 온유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서로 마찰하고 부딪쳐서 깨어지기 일보 직전에 이르렀는데 이를 방지할 사랑의 온유함이 어디에 있느냔 말입니다. 이 온유함과 윤활유가 없이는 불원간에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생물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생물계에는 강한 것만이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약육강식이니 적자생존이니 자연도태니 생물계에는 강한 것이라야 산다는 말들을 많이 하나 깊이 연구해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지 질 역사를 연구해 보면 큰 짐승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파충류에 속하는 맘모스와 공룡 같은 큰 짐승들이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많던 무섭고 강한 그런 짐승들이 지금은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멸종된 것입니다. 이곳저곳에서 혹 뼈만 남은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뉴욕 박물관에 가 보면 옛날의 큰 공룡의 뼈를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룡은 볼 수 없습니다. 강한 짐승들은 다 없어졌고 오히려 약하게 보이던 짐승들은 이 땅 위에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이리와 개는 같은 종류에 속합니다. 사실 이리와 개를 보면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본래 똑 같은 종류였는데 이리 가운데서 어떠한 종류가 성질이 변하여 온순해져 개가 되었다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포악한 이리는 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혹 동물원에 가야 더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질이 변해서 온유하게 된 개는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다 찾아 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고 하는 말이 얼른 듣기에는 마음 가운데 들어오지 않지만 깊이 생각하면 그 원리를 우리는 어느 방면에서든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리와 같은 히틀러, 뭇솔리니, 스탈린이 온 세계를 끝까지 점령하는 것이 아니다. 온유한 자가 결국은 세계를 얻는 것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낼 때 사람들의 원망, 불평이 빗발칠 때에도 모세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과 고통을 토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위로와 해결함을 받았습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심을 실천 했습니다.

일본의 성자라고 불리 우는 기독교 지도자 하천풍언 선생에게 큰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어느 날 낯모르는 여인이 하천풍언이 시무하는 교회에 찾아와 교인들 앞에서 불룩 올라온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천풍언을 믿지 마십시오. 성자 같으나 그의 행동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배를 보십시오. 이 배속에 있는 어린애는 하처풍언의 애기입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과 온 교인들은 대경실색 했습니다.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그 여인의 남편의 고소로 목사님은 결국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목사님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이 문제로 교회와 하나님의 이름이 더 이상 더럽혀지지 않도록 해결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3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그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그 앞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면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하천풍언 목사님은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고 그 여인은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예수님 말씀 합니다.

온유는 나약함이 아니며, 대가 약한 사람의 소심함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부드러워진 힘입니다. 커다란 나무 상자들을 선창으로 던져 올린 부두 노동자가 집에서 5개월 된 아기를 부드럽게 다룬다고 해서 약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을 부드럽게 조절했을 뿐입니다. 자상하신 예수님은 삶의 질고에 시달려 상한 심령들을 더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않으시고, 그 연약한 삶을 강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심으로 치유하시고, 강하게 하십니다.

  국내 저명인사들의 평균수명은 71세로, 일반인들(74세)보다 3세 정도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합니다. 또 저명인사 중 평균수명이 가장 긴 사람들은 종교인(79세)이었고 정치인과 교수가 73세로 공동 2위를 차지했다. 반면 언론인은 65세로 가장 단명했다합니다. 원광대 복지보건학부 김종인 교수는 지난 63년 1월부터 36년 2개월 동안 주요일간지 부음기사에 실린 사회저명인사 2142명을 조사하여 이 같은 결과를 2일 발표했다합니다. 이에 따르면, 저명인사의 평균수명은 63-82년 67세, 83-92년 71세, 93-2000년 74세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36년간 직업별 평균수명은 종교인(79세) 정치, 연예인(73세) 교수(72세) 행정관료, 기업인(71세) 법조인(70세) 예술인(69세) 체육인(67세) 문학인(66세) 언론인(65세) 순이었습니다. 이 같은 조사결과는 일본의 직업별 평균수명 순위(1위 종교인, 2위 정치인, 3위 기업인, 4위 교수)와 비슷한 것이라 합니다.

국내 저명인사의 사망원인을 직업별로 보면 종교인은 42%가 노환이었으나, 체육인, 문학인, 언론인은 노환이 평균 15%에 불과했습니다. 문학인과 언론인은 각종 암과 심장마비, 뇌혈관질환 사망자가 많았으며 연예인, 예술인은 불규칙한 식사에 의한 소화기계 질환 비율이 높았습니다. 김교수는 "규칙적인 생활과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자세,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는 즐거운 마음 등의 이유로 종교인의 평균수명이 월등히 높다"며 "모든 사람들이 이들의 정신적 여유와 생활태도를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합니다.

어떠한 종교든 신앙은 기본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얻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온유한 삶이어야 마땅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마음의 안정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는 육체적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하나님께 모든 근심을 맡겨버린 사람은 마음의 안정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은 건강한 육신을 선물로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합니다. 부인할 수 없이 온유한 마음은 정신적 건강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건강도 가능케 해 주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단순합니다. 사랑에는 오직 온유함과 겸손이 있을 뿐 복잡한 논리 같은 것은 없으므로 사랑은 참된 온유와 겸손에 있고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온유한 땅을 차지하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시는 주님의 음성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이고 온유한 사랑의 실천자들이 됩시다. (강 성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