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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야 아노라 (창 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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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장면으로서 우리는 지금까지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순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 왔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순종이 돋보이는 사실입니다. 아들은 번제로 드릴만큼 아브라함의 순종은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본문을 단순히 아브라함의 순종이라는 관점으로만 살펴본다면, 본문에서 하나님의 시험의 본래 의도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하기를 어렵습니다.  오히려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하셨는데, 그 시험의 내용이 단순히 아브라함이 얼마나 순종하는가 안하는가 보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는지,  또한 그러한 믿음으로 과연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하여 단순히 아브라함의 순종만을 강조한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시험하심으로 나타내시고자 하신 본래의 의도를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1. 본문은 “어떤 일 후에 ... 있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어떤 일은 바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의 조약을 맺은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있었을 때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그와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때 조약은 아브라함이 우위를 점위한 조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비멜렉이 조약을 맺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아비멜렉과의 유리한 조약을 맺음으로서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여호와”로 알고 불렀다는 것입니다(21:33). 다시 말해서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살아계신 여호와로 알고 예배했던 장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시고, 인도하신 결과로 얻은 것으로 아브라함이 이제야 제대로 하나님을 생명으로 알고 믿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십니다. 시험의 내용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시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며, 다른 말로 하면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보통 마음으로는 결코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아브라함의 아들 독자이삭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후손에 대하여 약속 하신 이후에 25년 만에 주신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은 25년 만에 늙어서 독자 이삭을 얻었으며, 이삭은 젖을 떼고 자라서 이제는 혼자서 번제할 나무를 지고 갈 정도로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언약을 이어나갈 언약의 계승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최고의 관심의 대상이며 사랑의 대상이고 늙은 아브라함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단 하나 밖에 없는 독자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물론 혹자들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에 대하여  하나님의 방법이 너무 과격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험에 응하여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미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어떤 믿음이 있거나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둘 중에 하나로서 아브라함은 미친 것일까요? 만약 어떤 사람들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을 미쳤다고 말한다면, 그의 말은 결국 그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한 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행동은 아브라함이 미쳤기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말씀에 따라 나온 것이므로 결국 아브라함을 향하여 그를 미쳤다고 지적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신 것인가?  우선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빈말이나 식언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민 23:19).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고 하셨을 때에는 분명히 어떤 의도가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먼저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곧 자신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일은 단순히 그의 순종을 보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곧 그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있는지, 또한 그 믿음이 아브라함의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또한 그 믿음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를 확인하시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도저히 인간적으로는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이삭을 얻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인 아브라함을 알아보고 그의 조약을 맺기를 원하였으며, 아브라함은 유리한 조건에서 조약을 맺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후에 하나님을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신 결과이며, 또한 그렇게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여호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여기서 영생하시는 여호와란 곧 하나님을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며 또한 생명이신 분으로 알고 그분께 경배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생명이신 분으로 알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브엘세바에서 있었던 일인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영원히 살아계신 여호와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옳은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곧 생명이신 여호와로 믿었던 그 믿음이 과연 옳은 믿음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옳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통하여 증거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은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생명이신 분으로 믿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독자이삭을 드리라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하나님 곧 생명이신 여호와로 믿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유일한 아들의 생명까지도 드릴 수 있는지를 통하여 확인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면 그는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신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영생하시는 여호와를 믿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셨고, 또한 번제로 드리게 되면 이삭이 죽을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이신 분이심으로 죽은 이삭을 살리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아니면 결코 이런 순종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삭을 번제로 드리지 못한다면 그가 비록 브엘세바에서 영생하시는 여호와라 불렀을지라도 그 믿음은 거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거짓이 드러난다면 그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생명이심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이신 하나님을 믿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아들을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3.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은 뒷날 아침 일찍이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하여 두 사환과 아들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는데, 그 길은 먼 길이어서 3일 길을 가야 했으며 드디어 도착하였고, 또한 아브라함은 사환 둘은 아래에 두고 이삭과 단 둘만 산위로 올라갔으며, 그곳에서 하나님께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이삭을 결박하여 칼로 이삭의 배를 가르려고 했다고 증거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행동에는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믿었는지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산 위로 올라가면서 두 사환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5) 합니다.  즉 번제의 특징상 번제에 쓰일 제물은 죽어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다면 분명히 이삭은 죽게 될 것입니다.n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두 사환에게 “우리가 경배할 것이며 우리가 돌아올 것이라 너희에게로”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번제를 드리게 되면 이삭은 죽게 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두 사환에게 “우리가 가서 함께 경배할 것이며, 또한 우리가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하나님 곧 영원히 살아계신 여호와, 곧 생명이신 주님으로 믿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번제물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생명이심으로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실 것이며, 이는 곧 이삭이 번제물로 죽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살리심으로 살아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 하셨을지라도 이삭의 생명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이삭 대신 다른 번제물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사환들과 헤어진 뒤에 번제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위로 올라가면서 아들이삭과  대화를 하게 되는데, 이 때 번제할 어린양이 자기 자신인줄을 알지 못하는 이삭은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삭이 번제물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라고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세밀하신 분이시므로 아브라함이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이삭을 살리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릴 수 있었음은 창세기 21:33절에서 그가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여호와로 알고 믿었기 때문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신에게는 유일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살리실 것이므로 이삭을 아낌없이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4.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옳은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옳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을 번제단에서 죽이려 하는 그 순간  주의 사자가 가로막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은 사실상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는 행위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이후에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를 중지시킨 것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아브라함이 통과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통과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씀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 하셨습니다. 물론 혹자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는 것은 아들과 하나님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하셨지, ‘내가 이제야 너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보다 나를 더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이삭을 두고 마치 투정하시듯이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보자 하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독자이삭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이심을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신 것은, “네가 이제 하나님만이 생명이신 줄을 알고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시험에 통과한 아브라함을 특별히 배려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이삭을 대신할 번제할 어린양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는 산을 올라올 때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말했던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밀하게 배려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이삭이 번제로 죽지는 안했지만, 어린양을 대신하여 드린 것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드린 번제물 곧 아들을 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처음부터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이루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었으며,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처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하나님으로 알았듯이, 생명이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5.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무식한 순종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믿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순종이라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자들이 만약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믿음의 전제가 없이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의 아들을 달라 하시면 줄 수 있어요?”라고 질문한다면,  그것은 무식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질문을 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신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바로 생명이시다.  생명이신 여호와는 죽은 자도 살리신다. 이것을 믿느냐!"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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