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호와께서 다시 사랑하신 사람 (삼하 12:20-25)

  • 잡초 잡초
  • 254
  • 0

첨부 1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진노하시는 대단히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내가 언제 하나님을 섭섭하게 했습니까? 내가 언제 하나님을 업신여겼습니까?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업신여겼다.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못 가진 것도 힘든 일이고, 못 배운 일도 어려운 일인데, 그런 것들이 업신여김에 이유가 된다고 하면 참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 것들이 업신여김에 이유가 된다고 하면 참기 어려운 것이지요.

제일 우리의 삶을 힘드게 하는 것이 바로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며느리들이 시집살이를 하면서 업신여김을 당하면 가난한 집에서 시집왔다고, 시집지참금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업신여김을 당합니다. 들어올 때 문화적인 시설 다 해가지고 들어오지 않았다고, 다른 집은 시집 올 때 다 해 가지고 들어온다는데 우리는 신랑이 뼈빠지게 일해서 이런 것을 장만해야 된다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생각이 다르지요. 운전을 하는 것도 친정어머니입장에서는 시집 가서 배우라는 것인데, 그러면 한 돈 100만원 드는 운전교습하는 비용이 신랑이 해 주거나 아니면 시집가서 벌어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혼 전에 하면 친정에서 해 주어야 하니까 손해잖아요. 그러니까 운전면허 시집가서 배워라. 이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운전면허도 안 따고 왔냐고 또 짜증내는 것이지요. 그런 것은 결혼하기 전에 따 가지고 와야 하는 것인데, 이런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들이 열심히 아내를 도와서 설거지를 하면 어머니가 쳐다보면서 ‘어휴 못난 녀석’ 그러면서 참 안타까워 하지요. 사위가 열심히 설거지를 하면 사위 잘 얻었다고 그렇게 좋아합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시각이 다른 것처럼 어머니의 시각도 다른 것입니다. 사위를 보는 어머니의 시각,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시각말입니다. 이런 시각의 환경적 차이를 우리가 극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더위에 심방을 하거나 일을 보고 오면 온 몸에 땀이 나지요. 땀이 비 오듯 합니다. 지금 장모님께서 청주에 친척집을 방문하고 계신데, 제가 들어오자마자 설거지를 합니다. 그러면 장모님께서 아휴, 우리 사위목사는 들어오자마자, 옷 벗자마자 설거지부터 한다고 좋아하시는데, 제가 그러지요. ‘너무 좋아하실 것 없어요. 제가 너무 더워가지고 물 만지느라고 그래요.’ 물 만지면 시원하거든요.

손이나 발에 물이 닿으면 시원하니까 우리 아내보고도 내가 설거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더워서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만은 자식이 아들이든, 사위든 똑같이 보아야 하는데 그 시각이 다르니까 때때로 우리의 삶에 갈등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깁니다.

언젠가 우리 운동회 시간에 시험 들어서 안 나온 성도가 있습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분이고, 아이만 나오는 집이었는데, 교회를 나오기로 마음을 먹고 준비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전교인 운동회가 계수초등학교에서 있었고, 제가 늘 운동회 때마다 성도들한테 부탁하는 것은 음식을 조금 여유있게 준비해서 청년들, 또 부모가 안 나오는 아이들같이 이렇게 나눌 수 있도록 잘합니다만은, 또 우리 교회학교 교사들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씁니까?

운동회 시작하고 제일 기다리는 시간이 점심시간이잖아요. 속회별로 모여서 이제 음식을 나누는데, 이 어머니가 이제 아이가 교회를 다니는데 전교인 운동회 한다고 소풍처럼 갔으니까 도시락은 못 싸주었지만 이제 궁금했지요. 그래서 점심시간에 담 너머로 이렇게 자기 아들을 찾아보니까 아들이 저 철봉대에서 빙빙 도는거예요. 남들은 점심시간이라고 다 둘러 앉아서 맛있게 점심을 먹는데, 자기 아이는 빙빙 도니까 화가 머리 끝까지 났어요. 이놈의 교회는 우리 아이 밥 한끼도 안 먹이고, 도대체 뭐 하는 교회냐?

그래서 아이도 교회를 못 나오게 하고, 자기도 나오려고 생각했는데 안 나오면서 전화를 했어요. 우리 아이 점심 때 밥도 안 먹이고, 그러는 교회가 어디 있느냐? 어쨌든 제가 ‘아휴, 미안합니다. 잘 못 했습니다.’ 우리 교사들이 잘 챙겼지만 다 챙길 수는 없는 부분이지요. 그 분은 또 자기 아이를 보냈지만 점심 때 밥이라도 잘 챙겨먹나 궁금해서 또 나와서 지켜 보는 거예요. 그게 부모의 심정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부모들은 항상 자신보다 자기 자식들을 통해서 어떤 기쁨을 얻고 혹은 상처를 받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자녀를 여러분이 없는데서 이렇게 쓰다듬어 주고,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때로는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고 그러면 저 멀리서 쳐다보다가 ‘목사님이 우리 아이를 안아주네. 아이스크림 사주고 계시네. 머리 쓰다듬어 주고 계시네. 아휴, 나는 제대로 봉사도 못 하고, 헌금도 못내고 그러는데 우리 아이 사랑해 주시니 너무나도 고맙다.’ 그런 마음이 생긴 것이지요.

반면에 그 아이를 제가 꿀밤을 주고 그러면 멀리서 보고, ‘어머, 목사님이 왜 우리 아이 때리지? 내가 헌금을 많이 안 해서 그런가? 내가 급식 때 봉사 안 해서 그런가?’ 그런 것이 오해의 오해의 끈이 꼬리를 무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신보다 우리와 관계 되어진 일들에 의해서 더 상처를 받지요. 그것이 업신 여김의 부분이면 견디기가 어려운 일이지요.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해도, 자기 자신이나 주위에 관련된 사람들이 업신여김을 당해도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큰 상처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합니다. ‘어쩌면 네가 나를 업신여기느냐.’ ‘제가 뭘 업신여겼는데요?’ ‘네가 왜 말씀을 업신여겨.’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요약하고 또 요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 십계명 중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살인하고, 간음하지 말라라고 한 것을 간음했어요. 내 말을 내 말씀을 업신여기지 않았느냐?

그제서야 다윗은 얼마나 자신이 잘못된 일을 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다윗은 덮으려고만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들려진 말씀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주 분명하게, 아주 간결하게 몇 배나 아주 깊이 있는 회개를 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우리가 회개할 때는 단순하고 간결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우고, 서로 화해를 하지 못해서 양쪽에 가서 화해를 시킨 다음에 두 사람 만나게 해서 악수를 시키고, 꼭 화해하는 것입니다. 꼭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다짐을 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악수를 합니다. ‘내가 용서를 하긴 하는데...’ 끝이 꼭 붙어요. 그리고 또 이야기가 시작이 돼요. 용서한게 아니지요. 항상 우리의 용서는 동사로 끝나야 돼요. 제가 용서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가 잘 못했습니다. 그걸로 그만이예요. 거기 무슨 접속사가 필요해요.
우리는 다윗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지적을 받았을 때 제가 죄를 범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이상은 아무 말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에게 나단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 우리 하나님께서도 복잡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용기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가 용기라고 할 때에 어떤 다른 무용담보다도 회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그를 그답게 만들어 주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죄는 용서해 주셨지만 그의 죄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처벌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네가 낳은 아이는 죽이리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다윗이 몸을 던져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 다윗이 간구한 목적을 성경은 아이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금식은 가장 하나님 앞에 강력한 의사표현이라고 합니다. 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이제 왕으로써 어떤 행정적인 자기의 치리의 일반적인 생활을 다 뒤로 하고 집중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왕으로써 좋은 자리가 준비되어져 있지만 그러나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는 사치스럽게 생각을 했어요. 왕으로써 이제는 하나님 앞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수혜자로써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밤새도록 금식하면서 땅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늙은 신하들이 먹을 것을 권하고, 편리한 자리를 권했지만 그는 그들의 권면을 거절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 그것은 사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새벽에 기도할 때마다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자기 자리에서 기도해도 귀한 일인데, 이 앞에 나와서 맨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분이 있어요. 제 마음은 방석을 가져다가 옆에 놔 주는 마음이 있는데, 또 그러면 목사님이 그 분만 챙긴다고 그럴까봐 마음은 그래도 못 하고 있어요.

이 자리에서 조립식으로 교회가 건축되어져 있을 때 그 때 바닥이 콘크리트 였어요. 우리 오승균 권사님이나 저나 조립식 건축하는 것만 기술자들이 와서 하고, 바닥 콘크리트는 저희가 쳤어요. 저녁에 퇴근하고 오면 청년, 청장년, 남선교회 회원들 몇 명 안되는 교인들이 그것을 했습니다. 12시- 1시까지 써레질을 하고 나니까 허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팠어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그것을 아마추어가 하다보니까 열심히 했다고 했는데 고르게 되지를 않았어요. 타일을 붙이려고 보니까 울퉁불퉁해서 붙일 수가 없었어요. 새벽에 우리가 열정적으로 기도합니다. 방음이 되지 않으니까 기도를 하나, 찬송을 하면 버스정류장에 있는 사람들이 기도내용을 그대로 들을 정도로 그렇게 방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지나가던 성도들이, 사람들이 평안의교회 찬송소리 듣고 등록한 교인들이 있어요. 어떻게 등록하셨냐니까 저기 서 있는데 너무 찬송소리가 힘이 있고, 은혜로워서 등록하게 되었다고 그래요. 그 때 맨 세면바닥에 우리 추교철장로님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무릎꿇고 기도한 적이 있었어요.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지 무릎이 걱정될 정도로 그 때 우리 추장로님 방언이 터지고, 성령의 역사가 충만히 일어났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추장로님이 나와서 기도 안 하나 기다리고 있어요.

리가 보통 기도할 때 사실 편안한 자리에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죄송할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서 자신의 아이가 죽음을 선언 받았을 때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금식하면서 자기의 모든 생활을 전폐하면서 땅에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치셨기 때문에 죽었다고 그랬습니다. 14절에 보면 정녕 내가 낳은 아이를 죽이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네가 낳은 아이는 정녕 죽으리라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다윗은 금식하며 눈물로 땅바닥에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먹으라고 말합니다. 정상적으로 몸을 챙기라고 말합니다. 신하들이 권면하지만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아이가 죽게 생겼는데, 어찌 먹을 수 있고, 내가 어찌 편안하게 의자에 앉을 수 있느냐?

놀랍게도 20절 말씀은 아이가 죽고 나니까 왕이 몸을 씻고 요즘으로 말하면 샤워를 하고, 그리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고, 모든 신하들과 음식을 만들어서 함께 음식을 나눕니다.

신하들이 이상해서 묻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음식을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다윗의 가치관이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아이가 살았을 때 하는 말은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가 병이 들었을 때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하나님께서 치셔서 병이 걸렸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에 걸린 거예요. 아이가 병에 들어서 죽어가고 있을 때에는 금식하고 땅에 엎드려서 기도하고, 아이가 죽고 나니까 기름을 바르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음식을 잡수시니 어떤 일이십니까?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요?

23절에 다윗의 대답에서 우리는 다윗의 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는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생각하랴. 이 말은 하나님이 결론을 내신 일에 쓰여진 일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불필요하게 간구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내가 떼를 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삶에 어떤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간구하고 간절히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결정을 내린 후에는 더 이상 원망도 하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내가 떼를 쓰지 않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징징 짜지 않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에게 어려움이 올 수 있습니다. 제일 피곤한 성도가 어떤 성도예요? 그것을 가지고 질질 끄는 성도지요.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은 그 날로 딱 끝내는 거예요. 아무리 내가 사랑했지만, 아무리 내가 정성을 다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시는 것으로 결론을 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예요.

왜 하나님이 불러갑니까? 하나님 살아있다면 불러갈 수 있습니까? 내가 열심히 했는데 불러갑니까? 내가 충성했는데 불러갑니까? 그렇게 시비하지 않았어요.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시비하지 마세요. 아주 유치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결정을 하시기까지는 우리가 전심전력을 다하되 하나님이 결정한 후에는 하나님의 결정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축구경기를 하다보면 심판들이 결정을 내립니다. 막 결정에 시위하고, 불만을 품고 여러 가지 폭행이 일어나고 관중들이 소요가 일어나고, 지난 번 북한 경기도 그런 경기입니다. 아주 유치한 모습이예요. 결정이 되고 나면 결정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운동경기를 하면서 그런 당부를 했습니다. 이기는 훈련도 필요하지만 지는 훈련도 필요하다. 우리는 지는데 익숙해 있지 않아요. 우리에게 불리했을 때 우리가 불리할 것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기는 훈련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지는 훈련도 하자. 멋있게 지자. 우리가 오히려 이긴 사람들과 그 같은 기쁨을 누려보자.

가끔씩 우리 담임목사기 축구대회를 하다보면 일부 몇몇 사람들이 아름답지 못한 행동들을 할 때가 있어요. 목사님한테도 막 대들고, 심판한테도 막 대들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굉장히 안타까워요.

그 축구대회 이름이 뭐냐? 선교축구대회예요. 축구대회를 하면서 선교한다는 거예요. 운동장에 새로온 사람들을 배려해서 그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일원을 하게 한다는 거예요.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그 사람들을 기회를 주고 나는 조금 좀 하더라도 빠지면 좋은데, 그 사람이 오든지 말든지 두 번, 세 번, 네 번 자기가 하겠다는 거예요. 난 그 사람이 집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신적으로 선교라는 마인드가 전혀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을 해요. 선교라고 하는 그 조그만 인식만 있어도 저 새로온 사람들이 얼마나 하고 싶을까?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면 저 사람은 얼마나 하고 싶을까? 그러면 기꺼이 자기 자리를 양보할 수 있어요.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선교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고 한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자는 목적을 가져요.

여러분 성적이 좋아서 우승을 해서 100만원의 성금을 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나중에 그렇게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6개월 가까이 리그전을 벌이면서 각 선교회에 전도의 열매가 있었습니까? 저는 그것을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이 대회를 하면서 여러분의 같은 또래의 형제를 전도한 열매가 있습니까? 그것을 제가 묻고 싶은 거예요. 그 동기를 부여하려고 담임목사가 100만원씩이나 내 놓은 거예요. 지금 전국적으로 1000개가 넘는 교회의 어린이들이 지방, 연회, 감독회장기 하는 축구해서 50만원도 안 되요. 얼마나 엄청난 대회라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 엄청난 대회를 만들었어요? 선교회 우승해서 그냥 회식 한 번 멋있게 하라구요? 아니지요. 그거 상금 타가지고 회식하는 날 끝장 나는 줄 알아요. 회식하라고 그렇게 많은 돈 준 거 아니예요. 그런 동기를 주면서 6개월동안 자기 또래의 형제들을 전도하는 열정을 가지라고 그런 동기를 준거예요. 우리는 이번 대회를 하면서 우리 선교회는 2명의 형제를 얻었습니다. 우리 이번에 대회 하면서 3명의 형제를 새가족으로 얻었습니다. 이런 보고가 있어야 되는 거지요.

이번에 릭 워렌 목사님이 쓴 계속 히트를 하고 있는 책을 보니까 'The purpose driven church'을 읽어보니까, driven life, driven youth ministry, 목적이 이끄는 교회, 목적이 이끄는 인생, 목적이 이끄는 젊은이 사역, 중요한 것은 목적이 뭐냐 그 말이예요. 여러분 그거 사는 목적이 뭐냐 그 말이예요. 목적이 분명하면 얼마나 우리의 방법이 은혜가 있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론에 대해서 겸손하게 어떤 어필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내게는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지만 인정하겠습니다. 수용하겠습니다. 그리고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신하들과 함께 음식을 나눴어요.

다시 말하면 정상적인 삶의 자리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렵다고 당장 질질 짜지 마세요. 24절에서 25절은 오늘의 다윗의 삶을 잘 볼 수 있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그의 삶을 지배하는지는 잘 보여주는 기분입니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이 24절에서 밧세바를 호칭하기를 다윗의 아내라고 다윗의 처라고 하는 표현이 성경에 비로소 등장하고 있습니다. 11장 3절, 26절, 12장 9절, 10장 15절, 끊임없이 밧세바를 뭐라고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우리아의 아내, 우리아의 처, 이런 표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관계하고 있으면서도 성경기자는 그 여자가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 우리아의 처라고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결론이 끝난 이후에 드디어 24절에서 밧세바가 다윗의 아내라고 공식으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내 욕심으로 아무리 무엇을 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예요. 그것이 물질이든, 그것이 사람이든, 그것이 어떤 명예든 간에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일은 결코 우리가 성취했다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정하셨습니다. 회개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그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솔로몬이라고 아들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나단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여디디아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여디디아 솔로몬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디디아 자기 아들을 볼 때마다 이제는 저주받은 아들, 이제는 심판받아야 할 아들, 하나님이 치셔야 할 그런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종종 이름을 부탁하는 분들이 있어요. 한 10여년은 엄청나게 많은 이름을 지었어요. 이름을 부탁하면 저는 그 때부터 부담이 되고, 그리고 기도가 시작이 됩니다. 옥편을 찾아놓고 이름을 지은 적이 없습니다.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 그 가정에 어울리는 좋은 이름을 주십시오. 가능하면 성경에 있는 인물이름은 안 할려고 애를 씁니다. 제가 성경에 있는 이름을 가지고 참 고단하게 인생을 살았어요. 어렸을 적에 맨날 울면서 집에 와 가지고 ‘아버지, 나 이름 바꿔줘.’ 초등학교 때 그럴 때가 참 많았습니다. 요즘은 우리 크리스찬이 많아져서 참 좋은 시대이지만, 60년대만 해도 기독교 인구가 100만이 넘지 않을 때예요. 그러니 학교 가서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새벽기도 하면서 어떨 때는 며칠 만에 좋은 지혜를 주시는데, 어떤 때는 ‘이름 지셨어요?’ ‘아직이요. 한달이 지났는데요.’ 그렇다고 옥편 찾아서 지을 수도 없고, ‘주여, 왜 이렇게 응답이 더딥니까?’ 저도 참 답답할 때가 있어요. 한 15년 이름을 짓고 나서 언젠가 성도들에게 부탁을 드렸어요. ‘이제 나한테 이름 지어달라고 부탁하지마. 내가 힘들어.’

이제 부목사님들이 계시니까 부목사님한테 지어달라고 그러세요. 이름은 참 잘 지어야 합니다. 저는 이름이 요한인데, 낳기 전에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고 요한이라고 지셨어요. 그 때는 무슨 초음파 검사할 때도 아닌데, 어떤 요한입니까? 그러니까 사도요한이래요. 사도요한이 우뢰의 아들 아닙니까?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고, 그 남에게 지는 것 싫어하고, 그 우뢰의 아들이 변해서 사랑의 사도가 됐잖아요.

저를 세례요한이 아니라 사도요한의 본을 받으라고 요한이라고 졌다고 그래요. 저는 항상 제 이름을 생각하면 그 이름을 지으신 부모의 의도를 생각합니다. 사도요한, 사랑의 사도가 되라고, 우뢰의 아들이 사랑의 사도가 되라는 것이지요.

여러분들도 이름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만은, 가끔씩 보면 부모가 무책임하게 이름을 지은 사람들이 있어요. 어느 집안에는 아이를 낳기 시작하는데 옛날에는 많이 낳잖아요. 한다스씩 낳잖아요. 일용이, 이용이, 삼용이, 사용이....

제가 마산에 있을 때 그 때 성도님 가정에 자녀를 많이 났는데 그 때 처음에 낳은 자녀를 일봉이라고 졌어요. 그 다음부터는 이름 지을 걱정이 없어요. 이봉이, 삼봉이, 사봉이... 해서 팔봉이까지 낳았어요. 그 집은 칠봉이하고 팔봉이가 아주 출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그 분도 이름 때문에 무척 힘들었어요. 이름을 볼 때 너무 부모가 성의가 없다는 거지요. 여러분, 부모들이 자녀들의 이름을 기도하면서 지으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스스로 지으셔도 잘 지으셔요. 문제는 기도하면서 이 아이의 어떤 삶을 특징할 만한 그런 이름으로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이름을 지으신다면 정말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름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아내 이름이 남자 이름 같아서 처음에 불만이 있었어요. 완규, 거기는 규자 돌림이라고 할아버지가 옥편 찾아놓고서 좋은 이름 찾았다는데 얼마나 한자가 어려운지, 중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한자로 이름을 쓸 때, 제대로 그 이름을 읽는 교사가 얼마 없었대요. 중 고등학교 교사면 그래도 꽤 공부하신 분들인데, 아내의 이름을 부를 때는 항상 틀리게 불렀답니다. 예쁠 완자랍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제가 둘이 사귈 때는 이름을 완규하고 하면은 남자끼리 사귀는 것 같아가지고 이름을 하나 지워졌거든요 그건 비밀이에요.

우리교회 좋은 교회 생방송 우리 교회에서 한번 했잖아요. 그때 제가 한번 고백 한적이 있는데 그때 참석한 하신 분들은 아마 기억이 나실 겁니다. 좋은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 이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담겨진 이름이면 더욱 좋습니다.

솔로몬에게 이름을 주셨는데 여디디야 “이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름,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아 이제는 하나님이 저주하시고 하나님이 치시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다. 그 이름을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들 솔로몬이라고 하는 그 아들의 이름에 붙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경은 그렇게 토를 달았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라’ 저는 다윗이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가 된 가장 중요한 그 어떤 모습, 그것은 그가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회개하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 Turnning pont 가 바로 되었다는 것이지요. 잘못된 것 정말 잘못된 것 하나님은 분노하고 업신여긴다고 하나님은 진노하셨지만 바로 그 잘못된 그것이 오히려 다윗의 삶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 회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제 회개한 우리들에게는 결단코 하나님께서 그 회개한 그 삶의 잘못된 부분들을 다시금 우리를 끄집어내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가끔씩 남편들이 실수하면은 용서하고 나서 어렵게 어렵게 몇 달씩 가면서 그 문제를 풀고 나서 다시 가정이 화합하지만, 불리할때만 되면 당신은 그때 그랬지 하고 또 꺼내는 아내들은 지혜롭지 못한 아내의 모습이지요. 한번 용서로 끝냈으면 무덤까지 가야 합니다. 절대로 그거 꺼내서는 안됩니다. 치사한거지요 용서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용서해야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서 다시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으신 것은 다윗이 그전 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회개의 결단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끝까지 붙잡아 준 것은 결국 헤세드(דס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죄악을 범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 헤세드를 붙잡고 있었고 그 하나님의 은혜 역시 다윗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혹 잘못된 삶을 살지라도 여러분들이 혹 곁길로 갈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에서는 떠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타락한 신자에게 죄인된 우리에게도 소망이 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고 어떤 경우에도 은혜에서 우리는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해도 이 교회범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실족을 해도 이 교회 범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다시 올수 있는 기회를 다시 올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늘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때때로 실수 할 수 있지만 우리가 때때로 부족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입으로 범죄하지 마라. 나는 이제 교회 안나온다. 나는 이제 교회 안나온다. 나는 이제 교회 옮긴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아. 내가 정말 잘못하고 내가 정말 지금 교회 성도을 볼 면목이 없을 만큼 그렇게 신앙적으로 떨어져 있다할지라도 은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다시금 은혜를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 그 다시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평안의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받았던 엄청난 심판과 그 심판에 대한 다윗의 고통과 상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몸을 돌렸지만, 하나님께서 칠일만에 하나님의 결론을 내셨을 때 그는 하나님의 결론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겸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이 다가올 때 주님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되, 주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 안에서 멀어지지 아니하도록 주님 붙잡아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많은 고통 속에 있는 가정들 있습니다. 붙잡아 주시옵소서. 죄의 문제로 인해서 고통받는 가정도 있고, 실수로 인해서 고통 받는 가정도 있고, 아버지 하나님 환경적인 어려움으로 아버지 고통 받는 가정도 있습니다. 여러 모양으로 아버지 하나님 형편에 따라 고통 받는 가정들, 우리주님 기억해주시고 찾아가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다시금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서 담대히 주님 앞에 나아가 예배했던 다윗처럼 우리의 예배가 언제나 살아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 요 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