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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라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느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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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7일은 제헌절입니다. 나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법률인 헌법을 만들어 널리 공포한 날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제가 잘 다루지 않았던 애국이라는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대부분 애국자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몇 사람을 언급해 봅시다. 다윗이 어린 시절에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어렸기 때문에 징집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린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쟁터에 도착했을 때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자진해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그 전투에서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으로 페르시아의 왕비였습니다. 하만의 궤계로 민족의 씨가 말라버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에스더는 죽기를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습니다. 그 당시 페르시아의 법은 왕비라 할지라도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왕 앞에 섰는데 왕이 금홀을 내밀지 않으면 사형이었습니다. 에스더는 국법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민족 구원에 나섰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민족 사랑도뒤지지 않습니다.롬 9장에 보면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원하는 바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도 신앙인들은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애국심을 드러냈던 사건은 3.1운동입니다. 3·1운동과 한국교회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포악한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폭발한 한 민족의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준비과정이나 운동 진행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인이나 되며, 비서명자 48인 가운데도 24인의 기독교인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30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당시 전 인구 1천 7백만 중 기독교의 수는 불과 2%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던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참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3·1운동에 직접 서명한 목사님들 중에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며 고민하던 신석구목사의 경우 선언서에 서명하는 문제를 놓고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고민하면서 27일 새벽에야 "5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는 응답을 받고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길선주목사가 이승훈의 제안으로 독립운동의 주모될 것을 결정한 동기 역시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권고로 "고국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신앙적 동기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공소공판에서 "피고는 항상 일한 합병에 불평을 품고 조선독립을 희망하였는가?" 라는 총독부 판사의 질문에 답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감동적입니다. 이승훈은 "그렇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가 있으니 오색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에 합병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였으랴"고 하였습니다. 3·1운동 이후 이로 인하여 받은 교회의 피해는 막심하였습니다. 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통계를 보면, 전부 파괴된 교회당 수가 17동, 일부 파괴된 것이 24동, 그 외 교회당의 손해가 41동, 교회 재산의 손해액은 3만 달러, 오산중학교의 피해액은 5천 달러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6월 30일(현재의) 투옥된 사람의 수도 기독교인이 2,190명으로 유교나 불교 및 천도교인을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았으며, 교역자도 151명으로 천도교 직원 72명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한국교회는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 왔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한피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나라를 사랑하며 조국에 소망을 주는 교회로서 사명을 다 하였던 것입니다. 3.1운동은 단순히 민중운동이나 정치운동이 아닌 신앙적 폭발이었습니다.

  신자는 분명한 국가관이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에는 조국이 없지만 기독교인 에게는 조국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김구 선생은, 옥중 일기에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고 싶다" 고 썼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애국심이 약해졌습니다. 왠지 애국심하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받친 의사, 열사 등을 생각하게 되고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좀 먼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애국은 꼭 목숨을 거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일반시민들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애국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나라사랑에 대해서 몇 가지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사람들이 당시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바치지 말아야 하느냐고 묻는 말이 나옵니다. 만일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 황제에 반역한다고 말할 것이고 내라고 하면 비애국자라고 책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 내 정부에 대해서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더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국민으로서 병역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등을 다해야 하며 그 외에도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불신자보다 더 잘 이행해야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에서 징병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판단은 아닙니다. 성경은 평화를 위한 전쟁과 하나님의 징벌을 위한 전쟁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7절에 보면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은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은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는 내 나라에 대해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2.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법을 준수하는 생활도 애국하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3:1-2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 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베드로도 벧전 2:13절에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국민으로서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해야 합니다. 단,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일, 즉 예를 들면 예수를 못 믿게 한다든지, 우상숭배를 하라든지 그럴 때는 목숨을 버릴지언정 순종할 수 없지만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한에서는 국가의 법을 준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필요하게 반정부 운동이나 하고 데모나 하는데 앞장서는 것은 신앙의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부정이나 부패를 권세나 완력으로 바로 잡으려고 했다면 비참하게 십자가에 순순히 못박혀 죽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거나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3. 자기의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국가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정적들은 다니엘을 넘어드리려 했지만 흠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단 6:4에 보면 “이에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고 말합니다.
  국가 경쟁력이 강해지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한 분야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 모두가 다니엘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한다면 국가 경쟁력은 강해질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155마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치중에 있습니다. 휴전선 155마일에 수많은 초소가 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그 많은 초소에서 초병들이 잠을 자지 못하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단 한 명의 초병도 자기가 감당하고 있는 지역이 작은 지역이라고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근무지에서 충성해야 155마일 휴전선이 안전합니다. 초병 중 한 사람도 자기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국민 모두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나라는 더 평안하고 든든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이스라엘 역사는 국가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선택했을 때는 하나님은 징계의 매를 드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릴 때는 반드시 주변 나라의 공격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면 다시 흥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입성을 앞두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 28장을 통해서 말씀대로 살면 축복을 받을 것이며 말씀을 버리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정말로 잘 사는 길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열방을 보면 기독교가 흥왕하는 나라는 잘사는 나라들입니다. 과거에는 어려웠지만 기독교의 부흥이 일어나면 국가 경제도 살아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상숭배를 하는 나라들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석유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도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축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엄청난 애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면 전파 된 만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은 낙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곧 애국입니다.
  복음 전파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국내전도와 해외선교입니다.
  국내전도는 우리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므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에 하게 되는 단기선교는 우리가 사는 지역을 떠나 무안 망운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단기선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국내전도에 해당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서 무안 망운 지역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하는 단기선교는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해외선교는 해외에 복음을 전파하는 제반 행위들의 총칭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선교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해외로 내보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보면 안 됩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민족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영수장로 간증을 통해서 선교와 국가경제와의 상관관계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외선교사를 250명 파송했던 시절의 GNP(국민총생산)는 250$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2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GNP(국민총생산)는 12500$입니다.
  선교와 GNP(국민총생산)의 상관관계는 개인과 가정에도 적용 될 수 있습니다. 주와 및 복음을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제에 대해서 제물 얻을 능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6.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우간다의 부흥 비디오 테이프를 봤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에 하나였던 우간다가 중보 기도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영적 부흥이 일어났으며 영적 부흥의 결과 경제도 살아난 것을 봤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이라고 기도를 쉬지 않을 것을 말했습니다(사 62:1).
  예레미야는 자기 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애통하며 탄식했는데, 렘 9:11에서는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예레미야 9:l).고 주야로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제목이 많습니다. 그 중에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한 기도의 대상에 반드시 지도자들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잘 섬겼던 왕이 있던 시대에 이스라엘은 흥왕했습니다. 반대로 왕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저주가 온 나라에 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있을 때는 왕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고 왕이 말씀대로 사니 국가가 번성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지도자를 잃고 나면 그 지도자가 있을 때는 말씀대로 살았던 왕이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징계가 온 나라에 임했던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다의 8대 왕 요아스입니다. 그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사는 날 동안은 믿음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요아스가 죽고 나니 믿음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숭배하여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했습니다.
  이 땅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 사무엘과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10만 명의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제도적 개혁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제도적으로 잘못된 부분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후진국일수록 이러한 현상들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때문에 이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시도되게 마련인데, 우리 성도들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하는 것은 기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낙스”의 기도가 독재자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지혜나 방법은 기도의 위력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잘못된 제도의 개혁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큰 애국입니다. (마 경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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