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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편견을 버립시다.(약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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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없이 많은 오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많은 오해가 생길까요?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 때문입니다.
편견이 무엇입니까?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다보면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도 편견을 가지고 설교를 들으면 이 설교는 나에게 영이요 생명 아니라 몽둥이고 나를 향한 책망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에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도 목사님은 똑같은 말씀을 하실 거야?
오늘도 목사님은 나를 감동시키지 못할 거야?
목사님의 설교는 결론이 똑같을 거야?
목사님의 설교는 별로야?
편견을 가지면 설교를 시작하면 먼저 귀를 닫습니다. 은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객관적으로 보면 좀 신학적으로 설교학적으로 또 본문에서 벗어난 부분도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의 설교는 좋을 거야 하고 들으면 그 설교가 은혜가 되고 내게 도전이 되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설교를 들을 때 편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변견을 가지고 들으면 절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편견을 가지고 들으면 오늘 여러분 예배에 성공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견이 왜 생길까요?
선입견 때문에 생깁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많이 판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완전히 그 사람에 대해서 경험하지 않고도 그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를 보고 ‘아 저 사람은 저럴 것이다.’라고 판단합니다. 물론 맞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첫 인상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본 선입견이 다 맞는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많이 경험하지도 못하고 사람을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사무엘은 사람을 외모를 가지고 왕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세의 집의 아들 가운데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아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내 앞에 있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려합니다. 용모를 보고 판단하고 자기 눈에 비추어진 이미지를 보고 판단하려 합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외모를 보고 사람들을 대우합니다.
야고보 선생님도 외모를 보고 대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못을 입은 사람이 들오면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권하고 만일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 올 때에는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이것은 너희들 끼리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외모를 가지고 여러분을 판단한다면 좋겠습니까? 저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저는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만약 외모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 판단했다면 저는 이미 삵꾼 목자입니다. 제가 아마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는 목사였다면 여러분이 저를 좋은 목사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저에게도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자꾸 이 선입견을 버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내 선입견이 언제나 맞는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맞을 수가 없습니다. 내 선입견이 1%의 잘못이 있다면 버려야 될 것입니다. 그 1%가 다른 사람을 묶고 사람을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가진 선입견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버리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편견을 갖는 이유는 한번 경험하고 두 번 경험하고, 한번 듣고 또 들으면 우리 안에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고정적으로 생기게 되는데 이 때부터 그 사람에 대해서 편견을 을 가지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더 이상 볼 것 없어 그 사람은 뻔해! 내가 그 사람을 두고 보았는데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라고 단정합니다.

여러분 코끼리와 시각장애인의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압니다.
인도의 여섯 명의 시각장애인들이 코끼리에 대해서 너무나 알고 싶어서 코끼리를 보러 갔습니다.

첫 번째 시각장애인이 코끼리에게 다가가다가 코끼리의 넓고 튼튼한 몸집에 부딪혀 넘어질 뻔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축복하소서. 코끼리가 벽과 너무나 흡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코끼리의 상아를 만지고는 울부짖기를 “오호 내가 만지는 이것이 무언가? 아무 둥글고 매끄러우며 뾰족하다. 그래 코끼리는 창과 너무나 흡사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우연히 꿈틀거리는 코를 잡았습니다. 그는 코끼리는 뱀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이 손을 열정적으로 뻗어 무릎 부분을 만지고는 코끼리는 분명히 나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이 귀를 만져보고는 코끼리는 부채와 닮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섯 번째 사람이 코끼리를 더듬다가 움직이는 꼬리를 잡고는 코끼리는 밧줄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코끼리에 대해서 서로 논쟁하였습니다. 각각 자기의 의견에 있어서 너무나 강하고 완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경험한 것은 코끼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여러분 한 부분을 경험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편견입니다. 몇 번 경험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합니다.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은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은 한정적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볼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인 것입니다.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편견을 갖습니다. 그리고 판단합니다.

어린왕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왕자라는 책의 내용 중에 편견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왕자야,
저 애랑 놀지마. 예전에 친구의 물건을 훔쳤던 애야.
그쯤 되면 안 봐도 뻔하지 않니?

루이게,
그렇게 일면만 보고 사람을 파악한다는 건
작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아.
하늘에 분명히 구름도 있고 밝은 햇살도 있는데
너는 작은 구멍에 보이는 그 구름만을 본거야.

그러면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가끔
자신이 만든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보며
누군가에게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 만든 구멍으로 보이는
구름 낀 하늘만 보며
비가 올 거야,
곧 흐려질 거야 생각하며
자신의 작은 구멍 옆으로
밝게 떠오른 태양이 있음은 모른 채
지레짐작하게 됩니다.

편견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좁히는 일입니다.
분명히 좋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점만 보게 되고
또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만든 좁은 구멍만을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는
60억 개의 구멍이 있으니까요.

여러분 편견을 가지고 보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편견을 가지고 보면 아무리 좋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식적으로 보입니다.
사랑으로 헌신하고 봉사해도 좋게 보이지 않고 곱게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잘 난체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여도 쓸데없는 일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아내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내 아내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해도 못한 것처럼 보였고, 못하면 그러면 그렇지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제 아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면 아내한테는 안 그런척하면서 내 마음 속에는 그 사람들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 아내의 행동을 제가 묶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교회 가운데 흘러갔게 했습니다. 

이제 제 아내에 대한 편견을 예수의 이름으로 풉니다. 제 아내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편견을 예수의 이름으로 버립니다.
여러분도 사모에 대한 편견을 끊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살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성도와 성도 사이에 있는 편견을 푸시기 바랍니다. 좁은 구멍으로만 보았던 우리의 편견을 예수의 이름으로 푸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혹시 여러분의 가족간에 편견이 있습니까? 남편에 대한 편견, 아내에 대한 편견, 자녀들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 시간에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버립니다. 이 시간에 오셔서 성령의 불로 태워주시옵소서.”선포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전도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때에 나다나엘이 대답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예수님의 출신이 나사렛입니다. 촌 동네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 나올 수 있느냐?는 편견입니다.

여러분 출신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방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편견도 예수의 이름으로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편견을 가졌던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이 고정되었다면 우리에게는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까?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배반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편견을 가지고 보시지 않습니다. 늘 용서해 주시며 용납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저는 심야기도회 때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름다운 교회가 정말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아름다운 교회에 모였습니까?
비방하기 위해서 모였습니까? 서로 갈등하기 위해서 모였습니까? 서로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기 위해서 모였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고 서로 인정하고 협력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와이서츠의 단추를 풀고 다시 첫 단추를 매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비방하지 맙시다. 이제 편견을 가지지 맙시다. 이제 용서하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십자가에서 무조건 용서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하면 풀립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덕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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