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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인생을 바꾼 소중한 만남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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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만남입니다.  너와 내가 만나 이루어 가는 것, 그것이 삶입니다.  삶은 만남에서 시작이 됩니다.  너와 나와의 만남이 인생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약한 사람을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크게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비겁한 사람을 용기 있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만나 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생에게 환상을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위대한 꿈을 꾸게 합니다.  역사도 만남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만나고, 문명이 문명을 만나고, 사상이 사상을 만나고, 국가가 국가를 만납니다.  자연도 만남입니다.  산과 산이 만나고 산과 하늘이 만나고, 꽃과 나비가 만나고 강과 바다가 만나고, 초목과 비가 만납니다.  생명과 생명이 만나는 것, 만남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이 땅에 만남을 주셨습니다.  태초에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만남의 관계가 탄생을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만남에서 역사는 시작됩니다.  역사란 만남과 헤어짐의 자취입니다.  만남이 삶의 흥망성쇠를 좌우합니다.  아내는 좋은 남편을 만나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남편도 어진 아내를 만나야 인생의 꿈을 펼 수가 있습니다.  자식은 좋은 부모를 만나야 내가 갖고 있던 숨겨진 재능을 펼쳐 볼 수가 있습니다.  부모도 좋은 자식을 만나야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습니다.  국민은 좋은 지도자를 만나야 되고, 학생은 좋은 스승을 만나야 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만남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만남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축복된 만남이 그래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책 속에서 온갖 사상을 만납니다.  우리는 책 속에서 스승도 만납니다.  명상 속에서 숨겨진 깊은 자아도 만납니다.  깊은 기도 속에서 축복된 영감도 만납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내 생에 전혀 경험하지 못한, 내 힘으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에 정복되고 붙잡힘 바 되는 그런 영적인 사건을 만나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권능에 붙잡힘 바 되는 영적인 만남의 사건이 오늘 이 시간에 일어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태어났을까?  우리는 어디서 성숙할까?  만남에서 성숙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기뻐합니까?  만남에서 기뻐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사랑을 발견합니까?  만남에서 발견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위로를 받습니까?  만남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왜 멸망합니까?  진실된 만남이 없기 때문에 망합니다.  우리는 왜 슬프게 삽니까?  만남의 상처 때문에 슬퍼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좋은 만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은 세상, 좋은 사람, 좋은 작품, 좋은 시대, 좋은 지도자, 좋은 나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을 만들고 있습니까?  새로운 만남을 만들고 있습니다.

인생의 만남에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같이 귀한 만남이 살인으로 끝난 때도 있습니다.  유다와 예수님과 같이 소중한 만남 속에서 배신으로 끝난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만남입니다.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만남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있었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좋은 만남도 있습니다.  청년 인생의 나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늘의 열쇠를 받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만남도 있습니다.  수직적인 만남도 있고 수평적인 만남도 있습니다.  축복된 만남도 있고, 불행한 만남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깊은 만남이 있는가 하면 피상적인 만남도 있습니다.  한번의 만남으로 영원한 인연을 맺는 그런 복된 결과를 맞는 소중한 만남도 있지만 수십 번 수백 번을 만나면서도 지나가는 만남으로 만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에게 복을 준다고 할 때에 제일 처음에 주는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만남의 기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남이라는 기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내 인생을 바꾼 그 한번의 만남,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그 소중한 만남의 사건.  부모를 만나고 자식을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부부를 만나고, 이웃을 만나고 나라를 만나고, 국가를 만나고 우리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주의 전을 만나고, 믿음의 집을 만나고 목회자를 만나고….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 모든 만남은 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이 만남이 어떻게 우연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것도 우연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의 그 무엇이 아름답다고 한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아름다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남의 관계가 원만할 때에 인간은 행복합니다.  만남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에 인간은 불행해 지기 시작합니다.  만남이 단절될 때 우리는 고독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만남이 없는 고독처럼 삶의 시련과 십자가가 또 있겠습니까?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고, 고독은 절망으로 이끄는 병입니다.

삶의 방식이 바뀌고 있습니다.  생활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20세기까지의 생활의 방식은 소유와 존재에 대한 주제였습니다.  “어떤 소유를 가졌느냐?”  “그 소유에 대한 내 존재의 의미가 무엇이냐?”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유와 존재의 개념에서 21세기는 접속과 소비의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20세기를 살던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기성세대들은 21세기 삶의 방식이 바뀐 사실에 대해서 미쳐 적응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사람도 있고 절망하는 사람도 있고 낙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축적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로 바뀐 겁니다.  소유가치가 아닌 여가가치로, 여유가치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21세기 사람들은 축적해 놓은 산에 대한 것, 땅에 대한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연결가치, 여가가치, 접속가치에 관심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원합니다.  좀더 세련된 휴대폰을 원합니다.  컴퓨터가 있으면 되는 겁니다.  연결과 접촉이 안 되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쌓아놓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소유해 놓은 어떤 축적된 재산에서 여유와 기쁨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연결과 접촉이 없으면 삶의 기쁨도 없습니다.  보람도 없습니다.  감격도 없습니다.  나는 접속한다.  그런고로 존재한다.  나는 연결한다.  그런고로 존재한다.  끝없는 만남입니다.

만남이 끝나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신학에서 육과 혼과 영이 하나님 안에 같이 있었는데, 그만 분리되고 나면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 만남을 다시 연결하는 행위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온 천하에 그 어떤 이름으로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이 만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이 아니고서는 만남의 길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인류 최초의 복된 소식, 죽은 자를 살리는 사건, 메시아의 이야기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 이것이 예수님의 사건이고 부활의 사건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만나는 사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만남의 사건, 이것이 예수님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하는 시간에 나도 모르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내 곤고한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셔서 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만남을 체험하고 성령의 뜨거운 만남을 체험했던 사람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유레카”  이 말은 “만났다, 찾았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 다같이 힘차게 외쳐보겠습니다.
“유레카”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 그 만남이 끝나야 하는 괴로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거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본적이 있습니까?  괴로움 중에 제일 아픈 괴로움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늘 함께 있고 싶어하는 감정입니다.  사랑의 방정식을 아주 복잡하게 쓰지 마십시오.  사랑의 방정식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야하는 괴로움, 이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여러분,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그랬습니다.  이 만남을 끝내야 하는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육백만명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유태인들이 포로로 잡혀있게 됩니다.  그런데 독일군들이 사람의 이름은 없애고 번호만 남겼습니다.  그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서 가스 방으로 들어가면 물로 샤워를 시킨 다음에 가스가 들어오면 죽는 겁니다.  그 사실이 포로 수용소에 다 알려졌습니다.  불려 가면 끝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 부부가 아들과 딸들이 있는데, 얼른 옷을 벗어서 딸의 옷과 바꿔 입습니다.  어머니가 딸의 번호를 달고 걸어 나갑니다.  아버지가 얼른 바꿔 입습니다.  “나는 이렇게 가지만 너만은 좋은 세월을 만나다오.  너는 행여 좋은 때가 있을지 어떻게 아냐?  좋은 때를 좋은 시대를 만나라. 새로운 시대를 만나라.”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나는 이렇게 가지만 너는 좋은 시대를 만나라.  너는 좋은 때를 만나라.  너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라.  너는 아무쪼록 내가 산 세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나서 아름답게 살아라.”

한 동네에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동네의 이름이 나인이라는 동네인데, 나인이라는 말은 유대인의 언어로 ‘즐겁다’는 뜻입니다.  동네가 즐거워야 합니다.  모름지기 사람이 사는 동네는 기뻐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집안은 기뻐야 합니다.  그 마을에 마음씨 착하고 아름다운 한 여인이 아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아주 기쁘고 행복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소문이 났습니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와서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늘 그 집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내막을 알고 보면 그 집은 그렇게 기쁨이 있을 만한 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아버지를 불러 본적도 없이 슬프게 자랐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가 유복자인지도 모릅니다.  뱃속에 들어 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태어나고 보니까 아버지란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이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얻었을 때 그 아들에게 생명을 걸었습니다.  아들이 내 생명이고, 아들이 내 희망이고, 아들이 내 의미이고, 아들이 내 가치이고, 아들이 내 미래입니다.  정성을 다했습니다.  사랑을 다 쏟았습니다.  팔래스틴의 모래로 뒤덮인 농토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온 몸이 작열하는 태양 빛에 다 그슬렸습니다.  때구정물이 흘러내리고 파리들이 몰려 와도 어머니는 기쁩니다.  넉넉히 이깁니다.  왭니까?  저녁때 아들을 만난다는 그 기쁨에.  저녁때 내 아들을 안을 수 있다는 그 기쁨.  일을 마치고 돌아갔을 때, “어머니 조금만 더 참아요.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될 때까지 조금만 더 참아요.  어머니 힘드시죠.  조금만 더 참아요.  내가 크면 어머니를 내가 모실께요.”  그 말 한마디에 모든 하루의 고통도 힘드는 것도 다 잊어버립니다.  그 만남을 붙들고 어려움을 이겨나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런 아들이 아픕니다.  한마디 말도 못 남기고 덧없이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 믿겨지지 않는 사실, 이 분노, 이 반항….  처음에는 “아니다.  이것은 거짓이다”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습니다.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사람들에게는 다섯 가지의 단계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분노합니다.  “왜 내 집에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왜 하필이면 내 아들이냐?  왜 하필이면 내 기업이냐?  왜 하필이면 내 몸이야?”  암에 걸렸거나 그럴 때 그렇습니다.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분노합니다.  항거합니다.  맞섭니다.  처음에는 막 날뜁니다.  옷도 싫고, 밥도 싫고, 금은보화도 다 싫고, 재산도 다 싫습니다.  내 아들과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내 아들과 이야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무슨 정성인들 안 쏟겠습니까?  아마 자기 숨을 불어넣으면 살 수 있을까?  숨도 불어넣어 볼 겁니다.
이 기가막히고 답답한 현실 앞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운다고 죽은 자식이 살아납니까?  한두 사람이 따라 울기 시작하더니 이 즐거운 나인 성이라고 하는 즐거운 동네가 즐거움은 다 없어지고 슬픔의 동네로 바뀝니다.  통곡의 동네로 바뀌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울기 시작합니다.  운다고 일이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운다고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도성의 사람들은 장례를 준비하고 죽은 자를 메고 산에 오릅니다.  도성의 모든 사람들이 죽은 아들의 행열 뒤를 따라 갑니다.  절망의 행렬입니다.  이건 죽음의 행렬입니다.  이별의 행렬입니다.  오열의 행렬입니다.  마지막 행렬입니다.  패배의 행렬입니다.  이것이 지금 인간이 가고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길들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잘난 척하고, 모든 인간들이 유명한 척하고, 돈있는 척하고 승승장구하지만 그 결국은 죽음의 대열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열의 대열, 슬픔의 대열, 마지막 대열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산언덕의 반대쪽에서 다른 행렬이 오고 있습니다.  이 산에서 두 행렬이 마주 쳤습니다.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 오열과 슬픔의 행렬과 감사와 기쁨의 행렬….  이것이 역사입니다.  우리가 왜 전도를 해야 됩니까?  우리가 왜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바로 죽음의 행렬에서 생명의 행렬로 저들을 옮겨 놓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행렬에서 예수의 행렬로 옮겨 놓는 겁니다.  이 두 대열이 부딪쳤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은 같은 음성으로 말씀합니다.  “울지 말아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무슨 일을 당했던 울지 마십시오.  슬퍼하지 마십시오.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습니다.  슬퍼서 해결되는 일도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관을 여기 내려놓아라.”  이 죽음의 행렬, 절망의 행렬이 할 수 있는 것은 내려놓은 길 밖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저 내려놓는 겁니다.  “내려놓아라.  네가 가져온 문제가 무엇이든, 그것이 질병의 문제든, 사업의 문제든, 인간관계의 문제든, 그것이 직장의 문제든, 내 앞에 내려놓아라.  울지 말고 내려놓아라.”  주님께서 걸어가시더니 그 절망의 관 위에, 낙심의 관 위에 거룩한 손을 얹으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주님의 이 엄숙한 명령 앞에 사람들은 귀를 기웃거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울음을 멈추고 바라봅니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절망과 패배와 낙심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때에 살아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제일 위대한 만남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도, 내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내 죽음의 처지에 있는 나를 살릴 수 있는 것도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어떤 분들은 이미 관속에 누워있는 것처럼, 내가 숨을 쉰다고 할지라도 내 삶이 관속에 남아 있는 것처럼 이미 몸도 마음도 굳어 버린 사람도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가족과의 관계에서 벌써 관속에 들어간 것처럼 모든 희망도 다 잊어버리고 절망 가운데 허덕이는 사람도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간 그 음성이 똑똑히 들렸습니다.  “내려놓아라.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  죽었던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의 만남도, 동네 사람들의 만남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우리 주님과의 소중한 만남이 단번에 모든 문제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축복된 생명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주님을 만남으로 그 모든 문제가 다 해결받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으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좋으신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열망을 가지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세상이 바뀌고 인생이 바뀝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세상과 인생을 통째로 뒤바꾼 수많은 사람들을 주위에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하나님 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면 제일 먼저 사람이 달라집니다.  돈만 알고 온갖 불의를 다 행하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전혀 다른 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흉악한 십자가의 강도가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을 수 있는 사람으로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나면 무엇보다도 사람이 바뀝니다.  내 인생을 바꾼 그 소중한 한번의 만남,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하나님 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강하고 힘있는 능력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 중에 소시민이었던 제자들이 모두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들로 바뀌었던 것은 그들이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어두운 삶은 밝은 삶으로 절망적인 인생은 소망적인 인생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언제나 밝은 세상을 노래합니다.

♬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밝은 세상에서 빛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이 밝기 때문에 인생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상관없이 빛되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어떠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늘 희망을 가지고 소망 중에 살아갑니다.  절망이 없어지고 불안이 없어집니다.  불안함이 없어지고 평안함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특징은 넘치는 평안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넘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지옥과 같은 세상이 천국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받는 최고의 축복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누구나 다 죽어서 천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죽어서 천당에 갈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하나님을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만나고 그것을 소유하며 산다고 하여도 진정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천국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신다면 힘들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도 늘 하늘의 영광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은 평안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은 혹시 풍랑 이는 바다가 아니십니까?  불안과 초조와 절망으로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은 혹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은 다 잃어버리고 세상이 주는 수고와 무거움으로 지쳐 있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그와 같은 삶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십니까?  세상 사람들과 같이 돈으로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십니까?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그와 같은 삶의 자리에서 구원 얻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 오늘 기쁨을 잃어버렸던 나인성 과부가 경험했던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웃음을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잊어버렸던 꿈과 희망을 다시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살면서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진정한 만남’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친구와의 만남, 남편과 아내와의 만남, 부모와 자식간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좋은 목사와 좋은 성도와의 만남, 그리고 직업과의 만남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은 만남이 없이 우리는 절대로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이 모든 복된 만남을 단번에 가능케 하는 비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하여 이 모든 만남을 단번에 다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우리는 정말 단번에 이 소중한 만남들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이라고 다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그저 성전 뜰만 밟으면서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루지 못한 채 평생을 하나님 밖에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들은 평생을 믿어도 하나님이 정말 누구이신지 모릅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좋아하지 못합니다.  그냥 가까이하면 덕을 보고, 멀리하면 웬지 벌을 받을 것 같아, 아니면 습관이 되어 주일날 교회를 나오지 않으면 마치 이를 닦지 않고 세수를 하지 않은 것처럼 왠지 꺼림칙해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들은 평생을 믿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들을 잃어버렸던 어머니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잃어버렸던 아들도 찾았고, 꿈과 웃음과 기쁨도 찾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떻게 그 절망이 변하여 희망으로 바꾸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고 하여도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모셔드리지 않는다면 그 예수님의 능력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낭패와 실망 당한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330장)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을 만나면 슬프던 마음이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거친 풍파가 잔잔해 질 것입니다.  절망과 한숨을 내 던지고 영광의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남에 대한 선한 욕심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만남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노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은 우리가 욕심을 내고 노력을 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만큼은 진정으로 욕심을 내고 기도하면 누구나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만 다니지 말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접하여 여러분의 삶의 중심에 그를 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은 그 날로 그치고 여러분의 삶은 기쁨과 평안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오열하던 한 여인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셨던 주님, 죽었던 나사로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셨던 주님, 이웃을 잃어버리고 세관에 홀로 앉아 외로워하던 마태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주셨던 주님, 그 주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사랑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소중한 만남으로 여러분의 인생이 바뀌어지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여러분에게도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다 함께 주보에 있는 복음송 ‘사랑의 손길’을 부르시겠습니다.
나를 위해 오신 주님, 나에게 오셔서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 그 주님의 손길을 이 시간 찬양하면서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조용히 눈을 감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내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어 버렸던 주님과의 소중한 만남이 있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이 힘이 드십니까?  나인성 과부처럼 웃음을 잃어버렸습니까?  꿈을 잃어버렸습니까?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을 만나는 순간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기도하십시다.
“절망하던 나인성 과부를 만나 주셨던 주님, 나도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오시옵소서.  내 짐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나를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우리 다같이 뜨겁게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오 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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