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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벧세메스로 가는 소처럼…… (삼상 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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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oard)는 자신의 소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와 함께 수영장에 갔습니다. 그는 두 팔을 힘차게 내저으며 “아빠 날 봐요 날 봐요”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한 벌을 수영장 바닥에 붙이고 물에 떠 있는 척 아버지에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며 키에르케고르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한 발로 땅을 짚고 물에 떠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시험되지 않는 믿음(untested faith)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믿음은 시험 되지 않은 믿음이기에 죄의 유혹이 있을 때, 경제 불황으로 살림이 어려울 때, 나에게 희생이 요구될 때, 어떻게 될지 장담 할 수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이런 여러 가지 시험의 기간을 거쳐 합격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1:2-4에,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신앙을 한 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예수 믿어 구원, 말씀 순종으로 복 받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예수 믿는 것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웰스(Herbert George Wells)의 단편 “대주교의 죽음”이 있습니다. 대주교는 날마다의 습관처럼 그날 저녁에도 성당에서 기도를 시작 했습니다. 늘 똑 같은 기도를 반복하는 겁니다. 그는 그날도 언제나 그랬듯이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를 시작 했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Yes. What is it?)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대주교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주교는 평생 동안 기도 했으면서도 그 기도를 정말 듣고 있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기도가 정말 응답 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응답이 오자 너무 놀라 쓰러진 것입니다. 매일 기도한 사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놀라서 죽었다는데. 아예 기도조차 하지도 않는 사람은 믿음은 어느 정도일까?

여러분은 어떨 것 같아요? 기도하다 그런 음성 들리면 죽거나 졸도 할까?
그런데 제가 보니 어떤 분은 안 죽을 것 같아요. 졸도 하지도 않구요. 아예 기도조차 안 하시니까…….
많은 사람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쉽게 생각합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쉽지요. 또 할 수만 있으면 쉽게 해야 합니다. 주일 아침 그냥 교회 오면 됩니다. 십일조와 헌금 그냥 드리면 됩니다. 주일 오후, 수요 저녁예배, 그냥 교회 오면 됩니다. 새벽기도회, 새벽에 일어나 오면 됩니다. 사실 어려울 것 하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면 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많으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생각이 많으니까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에서의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에 맞추어서 쉽게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주일 아침 가고 싶으면 가고 싫거나 무슨 일 생기면 안 가는 겁니다. 주일 오후, 수요예배는 아예 안가는 걸로 정해 놓아요. 십일조나 헌금 역시 형편 되면 하고 안 되면 안하는 겁니다. 새벽기도회, “내 신앙사전에는 새벽기도가 없다.” 그런 식입니다. 그렇게 내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안 하고, 그러니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아시지요? 이건 신앙이 아니지요. 키에르케고르가 말씀하신 것 같이, 수영장에서 한 발로는 땅을 딛고 서서 마치 수영을 잘 하는 것같이 보이는 거지요. 이건 남을 속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도 속이는 거라는 것도 아시지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남을 속이고, 심지어 자기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도 아시잖아요?
갈라디아서 6: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은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그래요.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둡니다. 그렇기에 제대로 심자는 것입니다. 육체에다 심어 썩을 것을 거두지 말고 성령에다 심어 영생을 거두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해도 제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졌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법궤를 빼앗아 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서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가져갔고 다곤 신전의 다곤 신상 곁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스돗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보니 다곤의 하나님의 궤 앞에 엎어져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곤을 들어서 세운 다음에 제자리에 다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보니 다곤이 또 하나님의 궤 앞에 엎어져서 땅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습니다. 다곤의 머리와 두 팔목이 부러져서 문지방 위에 나뒹굴었고 다곤은 몸통만 남아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하나님께서 아스돗 사람들을 무섭게 내리치셨는데 악성 종양을 내리셔서 아스돗과 그 지역 사람들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악성종양으로 다시 가드 사람을 치셨고,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옮겼다. 그렇게 하나님의 궤가 가는 곳마다 악성 종양이 사람들에게 생기자 온 성읍에서 비명소리가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일곱 달이 되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에 돌려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그들 나름대로 속건제물이라고 만들었고, 새로 수레를 하나 만들어 아직 멍에를 메어 본 일이 없는 어미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그 수레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곤 그 소 두 마리가 가고 싶은 대로 수레를 끌고 가도록 하였습니다. 소 두 마리가 하나님의 궤가 본래 있던 벧세메스로 올라가면 그 동안의 재앙은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것이고, 소 두 마리나 다른 곳으로 가면 그 동안의 재앙은 우연히 당한 것으로 여기기로 하고, 드디어 하나님의 궤를 실은 수레를 소 두 마리에 메우고 내 보냈습니다.

이제 이 두 마리의 소가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며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1. 먼저 정결해야 합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20에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2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그는 주인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는 성별된 귀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정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 쓰임 받은 두 암소는 멍에를 메어 본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9:2, “다음은 내 주가 명하는 법의 율례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흠 없는 온전한 붉은 암송아지 곧 아직 멍에를 메어 본 일이 없는 것을 너에게로 끌고 오게 하여라.”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으려면 정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시면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성도라고 부름 받는 것은 거룩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무리인 것입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멍에를 메 본 적이 없다는 것에서도 정결하지만,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일에 쓰임이 되었다는 것으로도 거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것은 먼저 정결이요 거룩입니다. 주님의 능력과 성령의 은사는 정결한자, 거룩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첫 번째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여 죄 용서함을 받지 아니하고는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아니면 결코 우리는 정결하거나 거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시작은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 정결함과 거룩함을 평생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가지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그걸 지킬 수 있느냐고요? 죄 구덩이에서 건져 내는 것이 구원이라면 여전히 예수 믿음에도 죄의 구덩이에 사는데 어떻게 거룩을, 정결을 지킬 수  있느냐고요?
타이타닉. 그 호화로운 배가 물이 없다면 역시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물 위로 떠 있을 때 배지 물 속에 가라앉으면 또한 배 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죄인과 세리 창기와 어울리셨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먹기 탐하며 마시기를 즐겨하는 자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거룩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죄인들과 함께 음식 먹었다고 예수님도 죄인인가요? 예수님의 거룩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었고, 온 인류를 사랑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지 않을 때 “내가 깨끗하지 못한가?”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실 때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드는 것도 내가 깨끗하지 못 하기 때문이 아닌가? 청결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에 쓰임이 되십시오. 그리고 청결케 됩니다. 거룩하게 됩니다.

2. 벧세메스로 가는 소에게는 젖을 빨리는 송아지가 있었습니다.(10절)
송아지들은 우리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12절) “그 암소들은 벧세메스 쪽으로 가는 길로 곧장 걸어갔습니다. 그 소들은 큰길에서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벗어나지 않고, 울음소리를 내면서 똑바로 길만 따라서 갔고.”
이 소들에게는 젖먹이는 송아지가 있었습니다.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무엇보다도 새끼를 먹이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늘 “하나님께서 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 그런 마음으로 삽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의 교육문제, 이들의 장래 등이 늘 힘듭니다.
그런데 여기 두 암소는 젖먹이 송아지를 두고 떠나야 합니다. 12절, 그 암소들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 분명 이 두 암소는 비록 소지만, 짐승이지만, 이 두 암소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일을 찾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의 우선순위는 뭔가요?
전에는 우리가 죄 아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달라져야 하는데 뭐가 달라졌어요?
뭐가 달라지면 좋을까? 그것은 모두 다 모두 다 달라져야 합니다. 생각이 달라져야 하고, 뜻이 달라져야 하고,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 가능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것, 곧 모든 것이 또 달라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먹고, 마시고, 입고……. 이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이것이 우선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나의 뜻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뜻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과 행동, 모든 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의 생각, 행동, 그 모든 것이 잘못되었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일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명예도, 감정도, 뜻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명예나 하나님의 영광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3. 벧세메스로 가는 소. 12절에 보면 큰길에서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벗어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암소가 자원해서 나온 것 아니잖아요. 만약 암소가 수고해서 돈을 받는다고 해도 암소가 가지는 것 아니잖아요. 얼마든지 요령 피울 수도 있습니다. 천천히 쉬엄쉬엄 그렇게 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랬잖아요. 될 수만 있으면 쉽게, 될 수만 있으면 십자가 지지 않고 뭔가 얻으려고 하잖아요.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 궂은일은 누군가 해 주길 바라고, 명예가 있는 일, 이득이 있는 일 먼저 하려고 하잖아요. 힘든 일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 주님의 몸 된 교회 일이라도 선뜻 나오기를 망설이잖아요. 아예 일 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모르는 척 지나가잖아요. 예수님은 좁은 문, 좁은 길을 말씀하셨지만, 우린 될 수만 있으면 넓은 문, 넓은 길에 한 눈 팔았잖아요. “나 아니더라도 주가 하겠지”

벧세메스로 가는 소만도 못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더구나 두 마리의 암소는 서로 생각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한 마리는 순종함으로 앞으로 가고 한 마리는 불순종으로 발걸음을 멈출 수 있잖아요. 서로 미워 할 수도 있고, 시기 할 수도 있습니다. 한 마리는 앞서고, 한 마리는 뒤 설 수도 있습니다. 한 마리는 연신 불평만 늘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의 암소는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짐승이지만 멋지지 않습니까?

사람이라면서도 우리는 때로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잖아요. 정말, 나 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고, 우리 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한다면 적어도 우린 암소만도 못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암소 보다는 나아야하지 않겠어요?

4. 드디어 두 암소는 벧세메스에 도착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얼마나 기뻤을까? 그렇지 않아도 전쟁터에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고 그동안 7개원 동안 얼마나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팠는데……. 그런데 그 법궤가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쓰고 수고한거 아닙니다. 어떤 외교적 타협에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암소 두 마리가 그 법궤를 싣고 온 겁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나누었던 이야기, 그냥 암 소 두 마리에게 수레를 메워 보냈는데 어디로 가든 암소가 끌고 가는대로 보냈다면, 그랬는데 두 암소가 이스라엘 땅인 벧세메스까지 수레를 끌고 온 것을 안다면, 두 암소가 너무너무 대견하고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 공로를 인정하고 두 암소는 평생 일도 안 시키고 그냥 먹고 살도록 해 줄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를 보고 기뻐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레를 쪼개어 장작으로 삼고, 그 암소 두 마리는 죽여서 번제로 삼았습니다.

여러분! 벧세메스에 도착한 암소는 죽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상을 받아야 하는데, 적어도 되돌려 보내서 송아지에게 젖을 먹일 수는 있도록 해야 하는데, 두 암소는 죽었어요.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철저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는 신앙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치 벧세메스로 가는 소처럼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어요.
그분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그 뜻을 이루고자 구별된 곧 거룩한 삶을 사셨어요. 돌멩이로 떡을 만들 수도 있지만, 성전 높은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땅에 내릴 수 있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세상의 권력자들과 타협하여 세상의 권력을 쥐고 세상을 통치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곧 바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곤 끝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마치 벧세메스로 가는 소처럼 우리의 삶 또한 그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의 죄를 씻어주신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그 정결함과 거룩함을 지키십시오.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 많습니다.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입어야 하고, 직장도 다녀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하고…….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믿음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마십시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십시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십시오.
그 신앙의 삶이 철저하고 온전하십시오. 신앙은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철저히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하나님!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로마서 6:4-5,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한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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