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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잘못된 믿음과 삼갈 것 (눅 20: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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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정말 힘이 듭니다. 날이 무더워지니까 모든 것이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래요 우리는 오히려 힘이 넘칩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불기둥이요 구름 기둥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필요한 모든 것으로 공급해 주심에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바르게 믿고자 하고 또 은혜도 받고 은사도 받고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에 보니까 영 아닌 것만 같습니다. 아니 내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런 모습일 수가 없는데... 그래요 이런 생각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아주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우리가 말씀과 넘치는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말씀 안에다 믿음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내 생각 또는 내가 아는 부분적인 말씀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까? 아니 스스로 자기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기가 제일인 줄 알고 마냥 우쭐대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기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하며 잔뜩 웅크리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면서도 자기가 할 때는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지 그럽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너그러우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매정하고 몰인정한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우리는 판단하지 말아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셨다고 하시니 그저 감사합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여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시니 나 같은 것도 사랑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엎드리면 됩니다. 이사야에게는 입술이 부정하다고 하니 그 입술을 제단 숯불을 가져다가 지져주십니다. 모세는 입술이 둔하다고 하니 아론을 붙여 주십니다. 나는 아무런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고 하시니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십니다. 양치는 데 쓰는 지팡이입니다. 하였더니 그 지팡이를 내 던지라 하여 내 던졌더니 뱀이 되고 다시 꼬리를 잡으라 하여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그 뒤 그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지팡이를 들고 큰 역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요 아무 짝에도 쓸모 없고 여전히 비린내만 나는 것 같은 나까지도 하나님은 때를 따라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말하는 대로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 나올 것이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그의 시편 노래에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후손인데 어찌 후손이 그리스도가 되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치로 볼 때는 안 맞는 것 같은 말씀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말씀도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3:23예서 예수님께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라고 탄식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들은 계명의 작은 것까지도 다 지킨다고 큰 소리쳤지만 진짜 사랑의 마음이 그 안에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지적만 했지 사실 자기 속에는 더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겉으로는 멀쩡합니다. 하얗게 칠을 했습니다. 멋지게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봐야 무덤이라면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해골과 뼈다귀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덤을 만지는 자는 부정하다고 했으니 멋있다고 손대는 자마다 부정하게 만들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간음하다 잡히면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도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요?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이 사람을 돌로 치도록 하라”고 하셨을 때 돌로 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쉽게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 싶으면 아주 난도질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나는 과연 어떻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남을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도 비판을 받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 비판입니다. 과연 자기를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기에 앞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마저도 부정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때문에 괴로워만 했지 주님의 사랑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안타까움이 우리들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에게 돌을 던지고 있지는 않느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엔 모두 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짝을 찾아 바로 세울 때 그 말씀이 바른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매라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매도 필요하지만 매를 들더라도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보다도 더 좋은 것은 잘못된 길에 있는 사람을 바로 잡기 위해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되 그의 허물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게 덮어주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8장 15절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모든 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여 쓰러지고 넘어지는 우리를 그때마다 손 내밀어 잡아주시면서 다독거려 주십니다. 자신의 죄스러움 때문에 다시 도망치다시피 갈릴리 바다로 나가 밤새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향하여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봐라”
그리고는 물로 뛰어들어 좇아왔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서 “와서 아침을 먹어라”하면서 빵과 생선을 내밀어 주시는 주님, 그리고 다 먹고 난 다음에는 또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그래요 주님은 이렇게 고개도 들지 못하는 베드로를 다시 세워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람의 잘못한 것을 물고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장점을 골라 세워주는 사랑을 주님이 지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말에 이런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말을 해야 하고 이 믿음의 말에 같은 믿음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의 말을 해야 하고 이 사랑의 말에 사랑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격려의 말과 칭찬의 말에는 고맙다고 화답할 수 있어야 하고 위로의 말에는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야말로 우리를 참다운 은혜의 능력 안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갈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로 함께 살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마치 기아를 넣을 때처럼 같은 기아를 가지고도 앞으로 갈 수도 있고 뒤로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빨리 가게 할 수도 있고 천천히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말씀의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사랑과 은혜로 모든 것을 풀려고 하면 모든 것이 은혜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 능력이 살아 역사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역사하는 능력 앞에서 우리를 시험하려고 왔던 악한 마귀는 꼼짝도 못하고 떠나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어둠의 구렁텅이를 보지 마세요. 오직 앞서가는 주님만 바라보세요. 주님이 어떻게 사랑을 세워나가셨던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시험하는 자요 비판하는 자요 넘어뜨리며 헤치는 자가 아니라 감싸주는 자요 세워주는 자요 모으는 자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백성이 듣고 있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이들은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과부들을 서럽게 만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율법학자라고 했으니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이니 말씀의 깊은 뜻을 잘 알고 헤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작은 계명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자부심도 대단합니다. 어디 자부심뿐입니까? 사람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율법학자임을 나타내는 예복을 즐겨 입습니다. 그들이 장터를 지날 때 사람들이 인사하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회당에 들어가도 당연히 높은 자리는 그들 차지요 잔치집엘 가더라도 역시 윗자리로 모시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것을 두고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그들을 조심하라니요?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교만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겸손으로 허리띠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대접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제가 받으니 송구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엎드려야 하고 사람들이 섬기면 섬길수록 더욱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먼저 머리를 숙이며 작은 자를 높은 자리로 올려줄 줄 아는 아량도 베풀어야 하고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처럼 먼저 말석에 앉는 그런 모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복 입고 다니기를 원했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윗자리에 앉지 못할 경우 상당히 기분 나빠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이런 일이 계속될 때 겸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겸손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교만은 멸망의 선봉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위가 높아지고 연륜이 높아지고 경력이 쌓여갈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는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줄 줄 알아야 합니다. 생각도 그렇게 하고 말도 그렇게 해 보십시오. 왜 그래야 합니까? 저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 앞에서 어찌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있겠으며 예수님 앞에서 어찌 말을 공손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예수님을 어찌 높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내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처럼 내가 만나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먼저 높여주고 존경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보다 못 배우고 나보다 가진 것도 없고 나보다 지위도 낮다고 해서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다고 말을 합니다. 이는 곧 과부들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그들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부들이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슨 낙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은혜와 위로가 되지 못하고 그저 대접받기만 좋아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성도들은 과부들을 위로하고 과부들을 성심 성의껏 도우며 그들의 좋은 벗이 되어줄 수 있어야 됩니다. 힘들 때 분들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 그들의 곁을 지켜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요 그들의 말을 잘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서러움이 많겠습니까? 그 서러움에 하는 말들을 깊이 있게 그리고 관심을 기울여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조심해야 할 것은 위선입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중언부언의 기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이는 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닌 사람 앞에 보여지는 기도로 그치고 맙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향이 되어 바쳐진다고 했는데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이런 기도도 하나님 앞에 올려질까요? 아마 올려는 지겠죠? 그런데 거기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요? 아마 악취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울러 보이려고 드리는 기도에는 마음이 담기지를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드리는 기도를 우리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방언의 기도가 좋을 수 있습니다. 그냥 침묵 기도도 드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자칫 침묵기도는 잠에 빠지게 하거나 엉뚱한 생각으로 빠져들 수도 있겠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왕 기도를 하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기도해 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는 세리와 길모퉁이에 서서 “나는 저기 있는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나는 또 주님 앞에 이런 저런 계명도 지키며 섬길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던 바리새인 가운데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습니까? 바로 세리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엎드리는 사람 그 진실한 기도야말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올려지는 향기요 그 기도야말로 아름답게 응답이 되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사람을 보고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먼저 겸손하십시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힘껏 돌보십시오. 그들과 함께 하기를 기뻐하십시오. 오직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십시오.
너희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했으니 겸손으로 머리를 숙이며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힘껏 도우며 하나님께 진실한 모습으로 마음을 다하여 엎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땅에서 대접받기를 좋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먼저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존귀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먼저 격려하기를 힘쓰십시오.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연약하기에 더욱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사람들 앞에 귀하게 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더욱 먼저 다른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섬기십시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더 엄한 심판 자리에 서는 자가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귀한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 인 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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