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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는 자의 행복 (행 20: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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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누군가에게 준 것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혹시 받은 것보다 준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이 받은 것보다 남에게 준 것이나 잃은 것, 빼앗긴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자인생을 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남에게 준 것이나 잃은 것, 빼앗긴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여기는 사람은 흑자인생이라고 여기며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적게 받았는데 많은 것을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며, 받은 것 없이 주기만 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준 것, 잃은 것, 빼앗긴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받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은 그렇게 하고도 아직 더 줄 것이 남아있는 것이기에 모든 인생은 적자가 아니라 흑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규 씨는 [사랑과 인생]이라는 책에서 사랑의 십계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산하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되돌려 받으려고 하지 말고, 조건을 달지 말고, 다짐하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비교하지 말고, 확인하지 말고, 상황에 맡기라"

계산하거나 후회하거나 기대하지 말고 무조건 나누어줄 때 좋은 열매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은 작은 사람이고,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 더 나아가서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은 큰 사람이며,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복 받을 사람입니다.

행복은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것

옛날 희랍에 전제국가의 한 왕이 있었는데 그는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호색에 탐닉하면서 자기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하여 큰 상금을 걸고 쾌락과 행복의 도를 더 높이는 수단과 방법을 천하에 널리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일 다 해 보았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져 보았지만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높은 행복, 더 높은 즐거움은 없을까? 해서 높은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 방법을 간구했지만 불만과 갈증은 날로 더 가중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나보아도 실망하게 되고 끝없이 향락과 기쁨을 추구했으나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소녀 하나가 자기가 왕께 나아가서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말하겠다면서 왕 앞에 나타나서 당돌하게, 꾸짖는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기쁨을 단념하십시오. 남을 행복하게 하거나 기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행복을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행복하게 하십시오. 그리고서야 왕이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 왕은 숙연해 지고 한참 생각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딸아! 그대의 말이 옳도다" 그리고 그에게 많은 상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나 혼자서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인  오연호 씨는 대학생 때부터 철저하게 반미주의자 였고 데모 주동자였습니다. 그는 미국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잘못한 것만 주로 끄집어 내 가지고 발표하는 일이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미국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잘못한 것들만 전부 취재해서 책을 4권이나 썼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 그는 좀 더 미국을 알아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미국 유학을 하게 되면서 그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소련도 망하고 사회주의도 망하고, 구라파도 엉망이고 일본도 저렇게 시들어 가는데 도대체 미국은 왜 8년 동안 계속 호황을 이루고 있는가?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면서 그 결과로 쓴 책이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 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미국은 벌런티어 정신이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벌런티어는 자원봉사자를 말합니다. 적어도 미국사람이라면 일주일에 몇 시간, 한 달의 며칠은 자원봉사 해야 되는 줄 알고 있고 이것을 못하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봉사하기 위해서 훈련을 받기도 하고, 자기 생애 중에 어렵거나 가난하거나 상관없이 적어도 몇 시간은. 그리고 며칠 동안은 꼭 자원봉사 해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 년에 4천만 명이 자원봉사에 나선다고 합니다. 이래서 미국은 망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고 나서 그분이 미국에서 신앙을 얻은 다음 이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그는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어느 쪽이 복됩니까? 어느 쪽을 기뻐합니까? 여러분 어디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저 받는 것만 복이 있고, 더 가지는 것만 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친 제자가 아니었기에 살아생전 예수님 하신 말씀을 들은 바가 없어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한 절, '주는 것이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 이 한마디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복과 불행이 어디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주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행복

주는 행복, 주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행복이 있습니다. 수재의연금을 접수하는 창구에 할머니 하나가 왔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3분 동안 손을 모으고 기도g나 다음 5천만 원을 내 놓습니다. 이름과 주소를 대라고 하니까 "아니오. 좋은 일에 쓰면 되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저와 제 아들이 여러 해 동안 모은 겁니다. 좋은 일에 바로 쓰면 됩니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했습니다. 저마다 자기 이름을 내 놓고 자랑하는데 이렇게 내 놓고 조용히 사라진 이 할머니! 이렇게 돌아서는 바로 이분의 마음속에 있는 행복은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데 그 행복을 모르고 살까요? 불행이 있다면 주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는 것이 불행입니다. 주는 것이 행복한 것인데 왜 이걸 모르고 살까요?

빼앗기는 마음에서 사는 것이 불행한 것

줄 때마다 좋은 마음으로 주지 못하고 꼭 빼앗기는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무엇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식에게 주는 것까지도 강도 만나는 마음으로 주고, 한 평생 빼앗기는 마음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번도 남을 기쁘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자기가 불행한 것이고, 자기가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마음으로 한 평생 사는 사람이라면, 이 얼마나 신세가 가련할까요? 그런가 하면 받지 못하고 빼앗지 못하는 불행, 더 가지고 싶고 빼앗고 싶은데 못 빼앗아서 몸부림치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불행한 것입니다.

행복의 기본이란 어디에 있습니까?

행복은 더불어 가지는 것이기에 이기주의자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나만 행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내가 행복할 수 없고, 굶주리는 사람을 보면서 내 입맛이 동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 내가 편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더불어 행복하게 되어 있고 주고받는 관계 속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주는 자가 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주고받고 사는데 '받는 자와 주는 자' 어느 쪽이 되고 싶습니까? 어느 쪽이 되어야겠습니까? '주는 자' 된 것을 기뻐하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또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대체로 보면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뒤에 후회하게 되는데 오늘도 다소라도 남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요?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요? 병원에 가보면 방문 받는 자와 방문하는 자가 있는데 방문하는 자 편에 있고 오늘도 이런 기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편안하고 건강하고 잘 뛰는 사람이 되어서 줄 수 있다는 것, 줄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 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내가 남에게 무엇을 줄 때 그 받는 자의 기쁨에 내가 동참하고 함께 하는 거기에 교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사는 기본 철학입니다.

어머니들은 자기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먹고 싶은 것도 아이들에게 주고, 아이들이 먹으면서 좋아할 때에 자기 입에 들어 간 것은 없지만 자신이 더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 사랑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 당한 사람을 내가 돌보면서 주면서 그가 기뻐하는 마음에 자신이 같은 교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내 기쁨이 있는 것이고, 이 기쁨이 기쁨의 극치인 것입니다.

준다는 것은 자유함을 말한다.

때로는 받으면 한 편으로는 좋지만 마음이 무겁고 괴로운 것은 주는 자만이 언제나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상대방을 기쁘게 하려고 하면 주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요, 이것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의를 주고 생명을 주고 음식을 주고,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주는 것이 복이 되는 이유?

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주는 것을 좋아하고 대접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언제나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주심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8절과 8:32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이고, 대접하는 것이고,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고 시간을 주고 물질을 주고 나아가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까지라도 바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모든 복을 다 받는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뿐만 아니라 모든 복을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주는 자에게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공부를 많이 하고 출세를 하면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기가 많을수록 유명해질수록 더욱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기는지 모릅니다. 그 물질 때문에 그 명예 때문에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이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왜 기쁨이 없습니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살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 행복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 대접을 받지 못합니까?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일에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대접을 받으면 살려고 한다면 남을 대접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는 것이 복이기 때문이다.

병문안을 받는 것과 병문안을 가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플 때 병문안을 받는 것은 물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병문안을 받는 것은 작은 복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병문안을 가는 것이 더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은 건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이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남을 도울 수 있는 건강과 남에게 줄 수 있는 물질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실 구제 받는 사람보다 구제하는 사람이 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 늘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받을 사람이 없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눅 6:38).

잠언 11:24.25절을 보면“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했습니다. 요즘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때에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 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 28:27).

특별히“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한 영혼에게라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집을 드리고 땅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백배의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막 10:28-30).


거룩한 계산

모든 것을 물질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소유한 것만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

나눈 것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사람들

드린 것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신앙의 사람들

당신은 어느 반열에 서 있습니까?

당신은 어느 계산대 앞에서 더 많은 계산을 합니까?

당신은 당신 인생의 종착점을 어디에 가서 맞으려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이 뿌린 씨앗을 누구와 함께 추수하려 합니까?

오늘의 모습이 당신의 전부는 아닙니다. 계산하려거든 더 거룩한 계산을 하십시오.  -고훈 목사-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전도법은 없습니다. 사랑은 가장 큰 은사입니다. 작은 선(善)들이 모여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소망과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만일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절망 속에서 영원한 파멸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로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의 이 피의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만 소망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사랑은 우리들 가슴 속에 각인된 채로 오래오래 남아있게 됩니다. 그처럼 오래도록 남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꽃이 자기를 가꾸어주는 손길에게 향기를 남기듯이 받은 사랑을 되돌릴 줄 아는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실 주는 것만 복이고 받는 것은 복이 아니란 말씀은 아닙니다. 받는 것도 복입니다. 다만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얻는 자 보다는 베푸는 자가 더 복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는 복된 아이입니다. 사랑은 진정 받을 줄도 알아야 그 사랑을 남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사랑을 줄줄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가 어려서 제대로 정상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불행한 배경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극도의 개인주의는 사랑을 받기도 싫고 주기도 싫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무정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친절이나 호의도 잘 받아 드릴 줄 아는 것도 축복입니다. 대접을 잘 받아본 사람들이 남을 대접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의 놀랍고 엄청남 사랑을 받은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것도 축복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아내들은 남편사랑을 받아야 하고, 직장에서도 사장의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도 목회자의 신뢰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목회자는 교인들의 사랑과 존경과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받는 것만을 축복으로 생각하는 자리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받는데서 다시 주는 자, 베푸는 자로, 꾸어주는 자로 바뀌어 가는 인생이 될 때 더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받는 것도 복이지만 주는 자가 되는 것은 더 복이 된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보다 저것이 더 복된 일이라면 더 복된 일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도 축복이지만 그 사랑을 받은 후에 그 사랑에 고마움을 느끼고 주님께 내 몸과 맘과 물질을 드리는 자가 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주는 자가 더 행복한 것이고 축복된 것입니까?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뜻과 진리가 있습니다.

줄 수 있는 것은 내 인격이나 신앙이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어린아이는 자기중심적이지만 어른은 남을 생각하면서 행동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입만 알지만 어른은 부모의 입도 이웃의 입도 생각하며 삽니다. 철부지 때는 달라는 소리로 일관하지만 자꾸 커가면서 달라는 소리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 40살이 되도 부모에게 어린아이처럼 계속 달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육체적으론 어른이지만 인격적으로는 어린아이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들은 처음 초창기신앙은 달라는 기도로 일관합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면서 달라는 기도에서 이제“주님의 사랑 받았으니 나의 무엇으로 은혜를 보답하리이까?”하는 기도로 바뀌어 질 때 그 신앙은 성숙해 가는 징조입니다.

어떤 철인(哲人)은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받으려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베푸는 때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것을 준다는 일이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푼다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줄 수 있는 마음과 베푸는 태도가 바로 그의 인격과 신앙이 성숙해졌다는 뜻이니, 어찌 이것이 복된 일이 아닐 수 있습니까? 아직도 나이는 들었으면서도 성숙치 못하고, 철부지의 인격과 신앙에서 이제는 받는 자보다 주는 자로 인생을 바꾸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는 것은 참된 기쁨을 선물하기 때문에 더 행복한 것

자녀들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는 부모들의 기쁨은 선물 받는 자녀보다 더 큰 것입니다. 젖을 주는 어머니의 보람과 기쁨은 젖을 빠는 어린아이보다 더 흐뭇한 것입니다. 받는 것이 외형적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내면적인 기쁨입니다. '죠지 피바디'란 사람은 그의 막대한 재산을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위해 내어놓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평생에 걸쳐 피와 땀을 흘려 모은 재산을 내놓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지만 결단하고 내 놓을 때는 재산을 모을 때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원해서 이 재산을 내놓을 수 있다" 이런 죠지 피바디같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겠습니까?

'폴 투르니에'란 사람은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곧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 무엇을 얻으려 할 때의 미안함과 떳떳치 못함과 나중에 비루함을 느껴본 일이 있습니까? 이제 남에게 주는 자로써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의 만족감과 떳떳함이 받는 자 보다 확실히 더 복됨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주님의 삶을 닮아가는 모습이기에 더 행복한 것

성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해서 성자 예수님을 인간들을 위하여 자기의 살과 피 한 방울 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다 주셨습니다. 야고보서 1:17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연약한 인생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삶은 받으시는 삶이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주시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에게 받으신 것은 없고 모두 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베푸는 생활, 주는 생활, 바치고 드리는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을 통하여 주님과 천사를 대접하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

마가복음 25장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양과 염소의 삶은 주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입니다. 옥에 갇힌 자, 헐벗은 자, 배고픈 자를 도와주는 일이 곧 주님을 대접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소에 손님은 극진히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1-2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기를 좋아하는 자를 크게 쓰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제일 싫어했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상좌에 앉아서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만 좋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직분은 대접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더 섬기고 더 사랑하고 더 베풀기 위해서 내게 주신 귀한 직분인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됩시다. 필요 없는 그릇, 진열장에만 진열해놓은 그릇이 되지 말고, 매일 쓰임 받는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받는 것보다 베풀고 바치고 드리는 것을 더 우선할 수 있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서 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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