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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 밭 가꾸기 (눅 8: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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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자리에 함께 하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본격적인 장마철인가 봅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장마 비 한 번 내리고 나면 직접 비 피해가 없어도 뒤따를 병충해 때문에 걱정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 아랑곳하지 않고 잡초는 잘 자랍니다.

잡초들은 비가 내릴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 몰라보게 무성해 집니다. 여러분의 마음 밭은 어떻습니까? 무더위로 움츠리고 장마 비로 삶의 리듬이 흩뜨려지고 나면 쉽게 파괴되는 것이 영적인 건강함입니다. 말씀을 향한 마음 밭 가꾸는 일을 시작합시다.

목회하면서 가장 황당한 경우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다”고 목사인 저를 찾아오는 경우입니다. 사업일 수도 있고 교회를 옮기겠다고 통고하는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셨다는 데 제가 무엇을 어떻게 말릴 수가 있습니까?

가장 높으신 분의 결재를 받았다는 데 그 시중꾼에 지나지 않는 목사가 할 말이 무엇이 있습니까?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그런 통고를 해 오는 분은 윗선에서 결재를 내었으니까 나도 따라서 도장을 찍으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귀띔을 하질 않았으니 제가 어떻게 합니까?

하지만 세월과 함께 밝혀집니다. 제가 의심했던 대로 하나님께서 결재를 하신 일이 없다는 사실이 들어납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만 뒤이니 딱할 뿐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셨어요.”라는 말만큼이나 오해되고 남용되고 오용되는 구절도 드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짜가 판을 치는 것은 진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만 원짜리, 오천 원짜리 위조지폐는 나돕니다만 아직까지 3천 원짜리나 7천 원짜리 위조지폐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가짜는 언제나 진짜를 흉내 내고 모방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앞으로 한 달 정도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 음성을 아는가 하는 것을 차례로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은 “마음밭 가꾸기”라는 제목으로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이 우리 마음 밭에서 자라기 위해서 어떤 준비들이 필요한 것인지를 먼저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이 되도록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짐승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짐승들은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의사소통을 하질 않습니다. 동물은 사람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들을 수 있는 모든 기능과 능력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들을 사용해서 어떻게 주파수를 맞추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컴퓨터에 접속하듯이 하나님께 접속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소리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귀 있는 자는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고 외치셨습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그것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접속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자 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위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혹은 네 가지 밭의 비유라고 하는 것을 들려주셨습니다. 

거기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한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린다는 말은 농사를 안지어본 사람도 조그만 상상해 보면 알 것 같아요. 어떤 씨는 호미를 가지고 심기도 합니다. 논둑에다 콩 심을 때는 몇 알 씩 심기도 하지도. 그러나 밀이나 보리는 뿌립니다. 뿌리다보면 이게 떨어져야 될 자리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엉뚱한 자리에도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네 가지 서로 다른 반응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마는 네 가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선 그것을 찾아서 살피기 전에 먼저 왜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첫째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식구라는 것이 입증되는 행위입니다.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어떤 친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주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는 아직 한 번도 답장을 보낸 적이 없다면 좋은 친구관계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말씀해 와야 의사  소통이 이루어 져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지런히 무릎 꿇고 하나님께 아뢰는데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말씀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러면 그 관계는 정상적인 관계일 수 없어요. 하나님 말씀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심 되어야 된다는 거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요10:27)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영성이 있는 사람들 하고만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대체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곤 해요. 그래서 무슨 일 터지면 하다못해 구역장이라도, 장로님이라도, 목사님이라도 불러와야 이게 처리가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 자녀 누구라도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자식 낳아 키우면서 말 잘 듣는 놈하고만 이야기 합니까? 똑똑한 놈 하고만 대화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라고 하면 모든 자녀에게, 어쩌면 말귀 못 알아듣는 놈에게는 더 자주 이야기 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잘 나갈 때만 말씀하시질 않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에 처할 때도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을 낳아보면 처음에는 똥오줌을 가릴 줄 압니까? 엄마 아빠를 알아봅니까? 음성을 구별할 줄 압니까? 자라야 되지요.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질서가 그런것이고 영적인 질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듭난다고 했을 때에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그게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에 등록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성숙해지면 좀 더 쉽게 자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숙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는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은 우리의 필생의 과업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잘못에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돼, 서! 자식들이 어릴 때 여러분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부모 말 잘 들으면 덜 다칩니다. 실수를 적게 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가야 할 길을 지시하고 살펴서 조언자가 되면 그 삶은 형통합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면 그가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로 성경에는 약속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이러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를 해야 할까요?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1.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꺼이 들을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단 마음으로 들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첫 번째 장벽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필요 있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누가 그것을 믿어”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므로 자신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기회를 거부합니다. 자신이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닫혀 있습니다. 열린 마음이라고 주장했는데 하나님 이야기만 나오면 마음을 딱 닫아버리고 더 이상 중립적인 입장에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첫 번째 종류의 토양입니다. “길 가”라고 불리는 땅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기도 하였다.”(눅 8:5)

농사를 짓다보면 채소를 심어도 그렇고 다른 농사를 지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줄을 지어서 배추를 심고 사이로 다닐 길을 남깁니다. 토마토나 고추를 심어도 그렇습니다. 농부가 밟고 다닐 길이 필요합니다.

자주 다녀서 땅이 굳어 있습니다. 그런 곳에는 씨가 떨어져도 뿌리내리기가 쉽지를 않습니다. 표면에 떨어져 있다가 먼저 보는 새가 집어삼키기 십상입니다. 움틀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끝납니다.

그 뜻을 설명하십니다. “길가에 떨어지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 뒤에 악마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다.”(눅 8:12)

듣기는 하지만 여러분이 깨닫기 전에 꼭 집어서 삼켜버리는 새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길가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좁고 굳은 토양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닫힌 마음과 배타적인 마음뿐 아니라 삶을 보는 관점도 편협합니다. 그들의 삶에 역사하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도 닫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어!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어!”라고 소리치는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씨앗이 움틀 수 없는 굳은 심령의 소유자입니다. 마음을 닫고 하나님께 그 어떤 기회를 드리기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들으려고 하질 않는 사람입니다.

왜 마음을 닫고 살아갈까요?  마음을 닫고 사는 데는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 째가 자만심입니다. “내 문제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신의 도움이 필요치 않는 데 기도는 왜 해!”이와 같은 자만심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게 합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또 다른 이유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열어드리면 그다음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쓰실까? 갑자기 사업 정리하고 저 아프리카로 떠나라 무슨 그런 명령을 할 것처럼 불안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길거리 다니면서 ‘예수 천다, 불신 지옥하는 이런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 버리면 어떻게 할까’ 그런 두려움을 갖기도 합니다. ‘광신자처럼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아예 마음을 닫고 삽니다.

세 번째 이유는 원한 때문입니다. 아픔과 상처로 인해서 마음을 하나님께 닫습니다. 원한과 미움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닫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다보면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때로는 의도적인 상처를 입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비의도적인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상처를 받을 때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집니다. 어처구니없이 상처는 사람에게 받고 분풀이는 하나님께 합니다. 상처준 사람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미워합니다.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상처를 안고 뒹굴면 마음이 식어버립니다. 삶의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방어적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이미 큰 상처를 받은 분도 있습니다.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버림을 받기도 합니다. 말로도 정서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학대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거부하기도 합니다. 옛 애인으로부터나 전 배우자로부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믿은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처구니없이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향해서는 동료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목사로서 제가 대신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여러분이 상처를 받았을 때에 마음 아파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출근하다가 테러에 희생을 당하는 일들이 가끔씩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결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도 돌아가는 기회를 삼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상처를 입으면 하나님을 멀리하려 듭니다. 하지만 그분만이 여러분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닫고 살면 삶에 열매가 없습니다. 달 표면처럼 아무런 초목이 자라질 않습니다. 마음을 닫고 살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씨앗도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미움을 곱씹는 삶은 사막과 같은 삶입니다. 고통만 계속됩니다. 새들이 와서 씨앗을 먹고 맙니다. 가능성마저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어떤 처방을 주십니까?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 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라고 야고보서 1장 21절은 말합니다.

온갖 더러운 것과 악을 더 벗어버리고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닫힌 마음을 여는 길입니다. 겸손히 자신의 마음을 여십시오. 하나님이 하실 무한한 가능성에 자신을 내어맡기십시오. 답이 보이지 않아도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십니다. 먼저 열린 마음을 개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 맺기 원하면

2. 듣는데 시간을 할애하십시오.

열린 마음을 개발하고 듣는데 시간을 할당하십시오. 달리 말해 속도를 낮추십시오. 조용한 시간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바쁜 일정 속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첫 번째 장애물은 거부입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바쁘다는 것입니다. “바쁘다 바빠!”는 이 시대 사람들이 너나없이 애용하는 필수품입니다. 휴대폰처럼 없는 사람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 나 지금 바빠요, 5분밖에 없어요, 빨리 말씀해 주세요.”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 접근하고 싶어 합니다. 자투리 시간밖에 드릴 여유가 없나봅니다.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하면서 담임 목사로서 일을 해보니까 주일은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 돌아오데요. 여유가 좀 있더라고요. 그런데 새벽기도는 매일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매일 매일 준비를 제대로 안하면 밤 9시 10시 되었는데 ‘아차 내일 새벽기도 해야 되는데 아직 준비 안 되어 있지.’ 그렇게 급한데 절대 하나님은 내 급한 상황에 맞춰주시질 않더라고요. 하나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주변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삶의 중심이 아니면 모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삶의 중심을 드리고 들으려고 시간을 할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정 속에 시간을 할애하고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주님은 두 번째 종류의 토양에 떨어진 씨앗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또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니,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눅 8:6)

이스라엘에는 석회암 암반 위에 얇게 흙이 덮인 지역이 많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비옥한 땅이 아닙니다. 표면에는 흙이 있어 보이는데 밑바닥에는 석회암이 깔려 있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설명합니다. “돌짝밭에 떨어지는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동안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눅 8:13)

얇은 흙은 피상적인 마음을 나타냅니다. 반응을 보이나 거기서 그칩니다. 때로는 흥분하지만 그것이 전부입니다. 감정적으로 반응을 보이지만 우리의 인격 밑바닥에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단지 감정적인 반응만 보이다가 끝날 뿐입니다. 움이 트지만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가면서 은혜 받았다고 말은 하지만 한두 달 기다려 봐도 아무런 삶의 변화는 없습니다. 이전과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못합니다. 감동하지만 변화가 없습니다. 말씀이 인격의 깊은 바닥까지 뿌리내리도록 하질 않습니다.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오늘 예배 좋았다고 감탄하고 서로 이야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 잊어버리고 말기 때문에 삶에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하긴 사람들이 들은 것을 사흘 안에 95%를 잊어버린다는 연구보고가 있습니다. 72시간 안에 95%를 잊어버리고 만다는 결과는 특히 우리 설교자를 낙담시킵니다. 실컷 준비해봤자 수요일 되면 다 잊어버린다는 것이지요.

주일예배를 드리고 가면 대지라고 기억했다가 냉장고나 욕실 거울에 붙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하긴 어떤 가정에는 식탁에서 반복학습을 시킬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어떤 것을 실천할 수 있는가? 무슨 차이를 만들 수 있는가를 살핀다면 금상첨화겠습니다.

피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두고 말합니다.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동안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첫날 도착했는데 가운데 앉혀놓고 박수치고 환영 해 줄때는 괜찮았는데 웬걸 교회만 발 디디면 만사형통할 줄 알았는데 가다가 사고도 나고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 하는 걸 중간에 포기해 버린다는 거지요. 날씨가 좋을 때만 좋은 신자입니다. 시련이 닥치면 떨어져 나갑니다. 결단도 피상적이고 헌신도 피상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피상성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면 72시간이 아니라 72년도 보장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면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가도 기억합니다. 저는 오늘 밤에 춘천 주향교회에서 4주년 기념 집회를 하게 되는데 목사님이 1년 전에 부탁을 하면서 자기가 누구라고 소개를 하더라고요. 자기가 사랑의 교회 대학부 출신인데 이제 신학교 마치고 목회를 해서 개척교회를 한지 3년되었는데 제가 사랑의 교회, 남서울교회, 내수동교회 적어도 너댓번씩은 다 수련회 인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젊은 교역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합동측의 젊은 목사들 가운데서 제 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 합동측 교회에서 울산으로 이사를 오면 우리 교회로 보내주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한번 들은 말씀 15년 세월 지나가도 기억합니다. 특별한 은혜가 있기를 그래서 늘 기도하고 여러분이 그렇게 기도 해 주기를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주일 설교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도록, 그리고 말씀 전할 때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아주 잘 박힌 못과 같이 자리 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집회를 오늘 저녁부터 목요일 새벽가지 하는데 계속해서 밤 집회, 새벽집회에 은혜 주시도록 여러분이 기도해 주십시오.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특별히 오래 갑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도 대책은 세워야 되지 않습니까? 일상적인 방법은 매일 매일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십분도 이십분도 좋습니다. 30분을 넘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 좀 읽고, 간단히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매주 소그룹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가족들 사이에 있기를 의도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찾아오시지만 주일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만 때로는 소그룹으로 앉아서 하는 친구의 말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름이라고 정규적인 구역 모임이 이번 주간으로 끝이 납니다 마는 만나고 싶은, 함께 하고 싶은 소그룹이 우리 모두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공과공부 가지고 만나는 모임은 이 주간으로 끝마감이 되지만 아이들 데리고 함께 산으로 들로 보고 싶어야 그게 정상 이예요. 만나고 싶고, 좋은게 있으면 나눠먹고 싶고 그래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사오며’ 하는 신앙고백대로 사는 것입니다. 방학 되서 안 만나니까 좋다 이런 사람은 잘못된 사람이라니까요. “아이고 권사님 연락 안 오니까 편하네”그건 문제가 있다니까요. 여러분 위기의 순간이 되면 소그룹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나쁠 때, 여러분이 집에서 갑자가 사고가 생겼을 때 밤 2시라도 달려 올 수 있는 내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실하려면

3.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생각이 복잡하고 염려와 근심이 자리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질 않습니다.

여러 가지 계획들이 가득하고 수많은 해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고 어제까지 끝냈어야 할 일들이 줄줄이 서 있으면 여기 나와서 앉아 있어도 하나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고 앉아 있을 수 있다니까요. 보기는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은 딴거 하고 있다니까요. 여러분의 꿈, 여러분의 계획, 야망, 활동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더 이상 들리질 않습니다.

생각은 텔레비전에 빠져있고 마음은 인터넷에 접속되고 예배 끝나자 마자 귀에는 휴대폰이 울려대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여유가 있습니까? 젊은 사람들 중독 된 것 같아요. 어떤 청년한테는 손을 내밀다가 미안하더라고요. 휴대폰 받느라고 나하고 악수할 손이 없더라고요. 그건 병적인 현상입니다. 예배 끝나고 그 바깥으로 나가기까지 여러분의 인생을 좌우할만한 전화가 안 걸려 옵니다. 안심하고 그냥 꺼 둔 채로 바깥에 나갈 때 까지 악수나 한번 하고 헤어지면 안 좋겠습니까? 계단을 내려가기가 무섭게 켜서 전화 한다고, 그렇게 외롭습니까? 하나님께 접속 되십시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토양입니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눅 8:7) 잡초와 가시덤불 가운데 떨어진 씨앗은 결실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이런 토양에는 씨가 뿌리를 내리고 싹이 터서 자랍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잡초와 가시덤불이 성장을 막아 결실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의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은,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결실 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눅 8:14)

첫 번째 결실 저해 요소는 거부입니다. 두 번째는 피상적인 반응만 보이다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잘 되는 것 같이 보였는데 가시에 기운이 막혀서 제대로 결실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실을 저해하는 첫 번째 요소는 염려입니다. 인생의 살아가는 동안의 근심과 걱정, 염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갖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나 무얼 먹고 사나, 입나 이런 것 때문에 걱정을 해요. 그럼 교회에 나와서도 그 걱정을 하고 앉아 있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세상의 염려 때문에 결실을 못하게 된다.

결실을 저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재물입니다. 재물은 마약 같아서 쓰면 쓸수록,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시대에도 토지에 토지를 연하고 가옥에 가옥을 연하면서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 까지도 탐을 냈다고 당대의 부자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없어도 염려, 가져도 더 벌려고 더 바쁘게 움직입니다. 돈 번다고 바빠서 하나님을 잊고 지냅니다. 이른 아침 일어나고 늦도록 퇴근을 못합니다. 하루하루가 벅찹니다.

게다가 가진 사람은 또한 즐긴다고 바쁩니다. 세 번째 결실 저해요소를 세상 쾌락이라고 주님은 설명합니다. 산다고 바쁘고 즐긴다고 바빠서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제대로 열매를 맺기 원하시면 여러분을 결실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뽑아내어야 합니다. 즐기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쾌락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오관을 가지고 즐기는 것은 결코 잘못은 아닙니다. 다만 거기에 빠져서 하나님을 위한 여유를 갖지 못하면 그것이 결실저해 요소가 됩니다.

아주 좋은 일도 결실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 무엇이나 잡초요 가시덤불로 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웃 여러분, 잡초가 자라게 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두면 됩니다. 그러면 잘 자랍니다. 큐티 시간도 갖지 않고 소그룹에도 참석하지 않고 지내면 여러분의 삶에 잡초는 무성해 집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질 않습니다. 잠깐이면 여러분의 영적 생명을 질식시킬 만큼 자랍니다.

가시덤불이 가득한 토양은 무언가에 빼앗긴 마음입니다. 바쁜 마음입니다. 통화가 폭주되어 전화를 걸어도 연결이 되질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려고 해도 남은 회선이 없습니다. 불통신호만 울릴 뿐입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바람 속에서 말씀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무서운 지진 속에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보이질 않는 분입니다. 그러다가 세미한 소리 가운데 말씀해 오시는 분이십니다.

세미한 소리를 들으려면 조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한 주간동안 계속해서 조용한 가운데 말씀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너무 분주해서 그 음성을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다를 수 있습니다. 방법이 틀릴 수 있습니다. 영성에도 색깔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큰 교회당에 와서 아무도 없는 시간에 와서 앉기만 하면 하나님이 금새라도 말씀 하실 것 같은 그런 영성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넓은 대 자연 속에 조용히 자리 할 때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내 음성을 듣는 것처럼 느끼시는 분도 있고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기도해야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든다는 분도 있습니다. 각자가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하고 우리의 성장을 제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해야만 합니다.

잘 결실한 마지막 토양을 살핍시다.

4.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에 순종해야 합니다.

결실하기 위해서는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듣고 나서 내가 가진 방안과 비교검토한 후에 따르겠다가 아닙니다. 계단 올라올 때 여러분은 마음의 결심을 하고 올라오는 겁니다. 하나님 오늘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앉는 순간에 백지수표에 싸인을 하세요. 하나님 저는 싸인 끝났습니다. 뭐라고 쓰시든지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 말씀한번 해보세요. 들어보고 제가 가지고 있는 A안 하고 B안 하고 C안 하고 비교해보고 하나님 생각이 나으면 그걸 따르고 내가 가진 안이 베스트라고 생각하면 내가 가진 안대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말씀 하시면 뭐라도 따릅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순종합니다. 그렇게 결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그런 토양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지는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참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눅 8:15)

좋은 토양의 네 가지 특징은 무엇입니까? 듣습니다. 굳게 간직합니다. 참고 순종합니다. 열매를 맺기까지 버팁니다. 참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리빙바이블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집착하고 다른 사람들이 믿도록 계속해서 전달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들으면 그것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배우면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받기만 하고 끝나는 사람이 아니라 받으면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들은 것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그 축복에 나만 참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축복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동참하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마음 밭 가꾸기를 위해서 살폈습니다. 먼저는 열린 마음을 개발해야 합니다. 잡초가 무성해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씨를 뿌릴 수 있는 마음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들을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예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실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제거하십시오. 이미 다른 데 빼앗긴 마음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끝까지 순종할 때 백배의 결실이 보장됩니다. 장마 후에 마음 밭을 잘 가꾸어서 백배의 결실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정 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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