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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석은 드러나야 빛이 납니다.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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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 집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놀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답니다. "119로 전화해야 하지요." 전화기 앞에 간 아버지가 아내에게 "여보 119가 몇 번이여"라고 물어 보았답니다. 그러자 아내가 대답하기를 "모르면 114에 물어 보아야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런 식으로 믿을 때가 있습니다. 갑자가 위기가 찾아옵니다. 어려움이 닥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는데도 하나님을 모르고 다른 방법으로 자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왕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백성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석입니다. "나는 세상에 가장 값진 보석입니다. 내 아들은 내 아내는 내 남편은 세상에 가장 값진 보석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우리 장로님은 우리 집사님은 우리 권사님은 내 옆에 앉아 계시는 우리 성도님은 세상에 가장 값진 보석입니다." 믿습니까? 우리 인사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집사님은 세상에 가장 값진 보석입니다."
보석이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 빛이 납니다. 오물은 드러나면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보석은 드러나면 빛이 납니다. 명품은 드러나면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짝퉁은 드러나면 수치를 당합니다. 향수는 드러나면 향기가 나는 것처럼 보석은 드러나면 빛이 나는 것입니다.

보석은 스스로 빛나는 것보다 빛을 받아 빛이 납니다. 보석도 어둠 속에 있으면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밝은 빛을 받으면 더욱 빛이 납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강력하게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빛이 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보석처럼 밝게 빛을 내는 세 인물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이들에게는 여러 차례 빛을 잃어버릴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첫 번째 위기는 나라가 망해 버린 것입니다. 바벨론에게 나라가 망하여 이들은 포로가 되어 생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우상의 음식을 먹어야 만 하는 위기였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바벨론 나라는 포용정책을 썼습니다. 자신들이 지배해 버린 나라 젊은이들을 포로로 잡아와 왕궁에서 인재로 양육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먹는 음식을 주는데 우상에게 제사드린 음식을 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우상 제물을 먹지 말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 위기는 왕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알아내고 해몽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박사들에게 명하였지만 아무도 꿈을 해몽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왕이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죽이려고 찾았습니다. 다니엘은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왕이 꾼 꿈과 해몽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왕은 큰 신앙을 보았습니다. 머리는 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 발을 일부는 철, 일부는 진흙으로 된 신앙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뜨인 돌이 나타나 철과 진흙을 쳐서 부숴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전개될 역사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금 머리는 바로 바벨론 나라고 다음에 은은 메데 파사, 놋은 헬라, 철은 로마, 철과 흙 로마 제국 이후 나라 그리고 뜨인 돌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환상이었습니다.

이일로 말미암아 다니엘은 왕궁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포로가 되었으나 출세하여 좋은 직장을 얻은 것입니다. 명예도 부도 권력도 얻은 것입니다. 한 16년 동안 이들은 비록 이방 나라지만 잘 살았습니다. 아마 결혼도 하였을 것이고 아이들도 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다시 네 번째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이제까지 쌓아 놓은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는 위기였습니다.
왕이 높이 30 m 넓이 3m나 되는 거대한 신앙을 만들어 놓고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교훈을 받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왕이 신상 낙성식을 하면서 온 대신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관현단이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큰 용광로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용광로에 집어 넣는다는 것입니다. 관현악이 울려 퍼지면 모두 절을 하여야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지금 이들 무리 중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고위 공무원입니다. 마땅이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신앙의 절개를 꺽고 지금까지 누려왔던 권력과 명예와 부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처자들을 다 놓아두고 그대로 타오르는 용광속에 들어가 화형을 당해야 할 것인가? 보석인 우리가 오물에 묻히지 않고 보석처럼 빛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세상과 타협할 위기가 다가 올 때 결과를 예측하며 죄와 타협하지 말고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12)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의 약속을 이루어 주십니다./예측된 결과보다 명령, 이성보다 신앙, 상황보다 원칙
제가 군대 가기 전에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훈련소에서 훈련이 끝나 자 마자 자대 배치를 받았습니다. 자대 배치를 받아 얼마 안되었는데 중대 환영 회식이 있었습니다. 중대장이 신병들에게 축하주라고 해서 술을 한 잔씩 권했습니다. 이등병에게 대위가 술을 주는데 모두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신앙 생활하는 동료들도 다 받아먹었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을 받아먹지 않으면 중대장이 부하에게 거절당한 수치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고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군대 생활이 참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예수 믿으면서 술을 먹지 않았고 하나님이 술 먹는 것을 싫어하니 먹지 않아야겠다." 예측되는 어려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 원칙을 붙들었습니다. 회사에서 진급하고 세상에서 살만하면 이런 위기가 찾아옵니다. 경리 부장이 되면 회장이 부정한 방법으로 이중 장부를 쓰며 비자금을 만들라고 합니다. 외국 바이어들이 오면 원만한 계약을 위해 룸살롱에 가서 여성과 부정한 술판을 벌이라고 합니다. 이사가 되면 정계에 뇌물을 가져다 주라고 합니다. 이사 승진을 위해서는 주일날 회장과 함께 골프를 치라고 말합니다. 승진하고 권력을 얻고 부를 누리고 평안하게 살려면 상관은 하나님 명령이 아니라 내 명령에 따르라고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결과를 예측하며 타협하지 말고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상황 중심의 삶을 살 것인가 원칙 중심의 삶을 살 것인가 늘 요구받고 있습니다. 상항에는 순응해야 할 상황이 있고 극복해야 할 상황이 있습니다. 원칙에는 상대적인 원칙이 있고 절대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절대적 원칙에 의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당시 도를 맡은 고위 공무원입니다. 지금 말하면 도지사쯤 되었을 것같습니다. 모든 나라 공무원들이 모여 왕의 신상 앞에 절을하는데 자신들도 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만약 절을 하지 아니하면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두냐 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조직 문화에서 조직문화의 법칙을 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직장을 잃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명예와 권력 재산을 잃느냐 얻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인생 전체가 달린 문제입니다. 이런 위기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계산하여 결과를 예측해 봅니다. 만약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용광로에 들어갈 것이고 그리고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엄청난 고통을 하다 죽게 될 것이고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이들을 역적의 가족이 되어 비참하게 생활할 것이다라고 예측을 합니다. 그저 한 번 모른 체 하고 절을 하면 권력도 명예도 부도 잃지 않고 대대로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머리만 한 번 숙이면 되는 일입니다. 얼마든지 타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해 죄를 져야 하느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붙들어야 하는냐는 문제에 다가서면 과감하게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 결과를 예측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든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내 시간이 아닙니다. 미래의 시간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개연성에 따라 일반적으로 움직이지만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있으면 개연성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연 법칙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들 셋은 한 사람도 배반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원칙을 붙들었습니다. 출20:3-6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원칙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관현악단이 신상에게 절을 하라고 연주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머리를 숙였지만 이 세 사람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위기 앞에서 말씀의 원칙을 붙들면 내가 예측한 결과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성적인 예측대로 되어 졌습니까? 아닙니다. 원칙을 붙드니까 원칙에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받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습니다. 모든 명예와 권력, 부를 잃어야 할 사람이 잃지 않습니다. 그들은 공무원입니다. 그런데 그 지위를 잃지 않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분노한 왕은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하여 그들을 결박하여 풀무 가운데 던졌습니다. 죽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합니다. 결박된 것을 풀어졌는데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이성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앙적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에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오늘날고 세상과 타협할 위기가 다가 올 때 결과를 예측하며 죄와 타협하지 말고 원칙을 붙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의 축복을 신비한 방법으로 신앙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상황보다 원칙이 힘이 있습니다. 이성보다 신앙이 미래를 보장해 줍니다. 리더가 될려고 해도, 행복하게 살려고 해도, 부자가 될려고 해도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 위기가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원칙을 붙들어야 합니다. 원칙 없는 인생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삶의 원칙을 무엇으로 세우느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삶의 원칙을 성경적 원리에 의해 세워 보고 싶지 않습니까? 미래가 보장될 것입니다. 삶이 편안해 질 것입니다. 가정에 행복의 웃음이 넘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 분의 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만들지 않겠습니까?

2. 사람의 회유 앞에서 권력자보다는 능히 건져 내 주실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13-17) 그러면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인본주의 보다 신본주의, 사람보다 하나님
사람은 물질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사람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 중심보다는 사람 중심이 더 좋은 삶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삶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보석처럼 빛난 삶을 사는데 사람의 유혹을 넘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휴머니즘의 유혹을 넘어가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삼순이가 끝났다는데 시청률 50%를 넘나들며 아주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합방을 시키느냐 안시키느냐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데 뭐 결혼하지 않아도 합방하는 것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데 세상 사람들처럼 따라가지 않으면 나만 야만인이 된 것같고 인간답지 못한 것같습니다. 사장 체면, 거래처 체면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정말로 구주로 영접하고 집안에서 제사 지내는 것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명절이 되어 온 식구가 모여 제사하고 성묘 가는 것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이 추석날 저를 아버지 방으로 불렀습니다. 일가 친척들과 성묘를 갔다오신 후 술취하신 상태에서 저를 부르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부자의 인연을 이제 끝내자고 했습니다. 유교의 풍습에 젖어 있던 아버지는 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울면 너를 호적에서 제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몹시 괴로웠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사랑하였습니다. 존경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면서 요구를 합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사람들에게 몰인정한 인간, 인간답지 않은 인간처럼 보일 지라도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여야 합니다.
이들은 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인데 바벨론 나라에 와서 도지사가 되었다면 대단한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왕이 유다인 포로인데도 특채하여 도를 다스리게 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바벨론 신하들이 가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들은 절호의 기회를 찾았습니다. 지혜로는 당할 수 없었지만 이번 사건만큼을 일격에 끝장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 절을 하는데 그들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왕은 그 보고를 받자 심히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지혜 있는 아까운 인재였기 때문에 당장 풀무불 속에 집어 넣지 않았습니다. 왕은 그들을 회유합니다. 다시 기회를 줄 터이니까 관현악이 울리면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것입니다. 이들도 왕이 자신들을 얼마나 아끼는 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왕은 그들을 설득합니다. 너희들이 믿는 신이 너희 나라도 구원하지 못하여 이렇게 멸망되었는데 어떻게 너희들을 그 불꽃 가운데 너희를 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유다 나라는 다 망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너희 나라가 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은 느브갓네살의 힘보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보다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의지하지 말고 인간 느브갓네살을 의지하여 생명도 건지고 명예와 부와 권력을 함께 누리라는 것입니다. 보장된 미래를 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인간 느브갓네살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때 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만일 왕이 풀무불 속에 집어넣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느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느냐? 신본주의를 택할 것인가 인본주의를 택할 것인가? 사람을 의지하느냐 하나님을 의지하느냐는 절박한 위기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비록 사람을 거슬린다해도 하나님을 거슬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보장됩니다.

2)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을 받게 해 주십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였다고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높임을 받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을 조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직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결국 우리가 신본주의를 택하면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를 택할 것인가? 신본주의를 택할 것인가? 사람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사람을 의지할 것인가? 하나님을 더 의지할 것인가? 갈림길에서는 우리는 과감하게 신본주의를 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지금도 기적은 있습니다. 지우국제특허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계시는 조현석 장로의 간증을 목마르거든이라는 월간지를 통해 읽어 보았습니다. 이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처음 교회를 다녔답니다. 새벽기도를 1년 넘게 다니며 아버지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셨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멀쩡하던 여동생은 시신경이 모두 끊어지는 희귀병에 걸려 시각장애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조 장로님 역시 심한 축농증에다 오른쪽 무릎이 부풀어 오르고 뼈가 튀어나오더니 급기야 다리 장애가 왔답니다. 골수염이 허리로 전이되기 전에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죽음과 같은 청소년기를 지냈답니다. 그런데 군의관 눈을 속이고 입대하여 군인 교회부흥회에 참여했다가 마지막 날 그는 2m나 되는 불덩이가 그의 다리를 치는 환상을 보았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불을 본다는 말을 들었던 그는 '이제 죽을 때가 되었나 보다' 싶어 억울함에 목놓아 울었답니다. 그런데 신비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골수염을 치료 시켜 주었답니다. 축농증을 치료 시켜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축농증이 기적처럼 고쳐졌다고 합니다. 내친김에 누이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3일 금식을 하였는데 누이가 눈을 뜬게 되었답니다. 그분은 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고 기술고등고시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답니다. 고등학교까지 꼴찌를 면치 못했던 학생었고 3수 끝에도 대학입시에 실패했을 정도로 공부라면 담을 쌓던 그가 제대 후 집중적으로 32개월 동안 공부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는 특허청 사무관, 서기관의 자리를 거치며 초고속으로 승진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 하나님 중심으로 한다고 합니다. 고객과 상담이 잘 되면 10억 정도를 해마다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있었답니다. 손님과 식사를 하다보니 수요 예배시간이 되었답니다. 갈등이 생겼지만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단호하게 일어섰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 특허 사무실을 장로님에게 허락하셨다고 간증하고 있었습니다.

3. 내세 중심이냐 현세 중심이냐의 선택의 위기 앞에서 현세보다 내세를 바라보며 죽음을 초월하여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합니다.(18) 그러면 내세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현세보다 내세, 현세 중심의 가치관보다 내세 중심의 가치관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6·25를 주제로 표어를 만들어 오라는 숙제를 내줬답니다. 아이들은 갖가지 아이디어로 표어를 써서 제출했답니다.'무찌르자 공산당' '간첩신고 113' 등 여러가지가 나왔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한 아이가 써온 표어를 보고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답니다. '6·25는 무효다. 다시 한번 붙어보자' 
사람들을 시간을 기준으로 볼 때 이런 식으로 과거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좀더 나은 삶은 현세 중심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삶은 미래 지향적인 삶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삶은 내세 중심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늘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주 공간, 진공 상태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기분 나쁘면 분노해야 하고 손해보면 참을 수 없고 돈을 벌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믿는 순간 신선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똑같은 공간에서 직장생활하고 가정생활하며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현세 중심의 삶을 살 것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내세 중심의 가치관으로 살 것인가 현세 중심이 가치관으로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사드락과 메사, 마벳느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왔지만 출세하여 가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민 온 땅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사람이고 앞으로도 보장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현세의 행복을 위해 신상에게 절하고 살 것인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내세를 보며 절개를 지킬 것인가입니다. 이 때 어떻게 합니까?

1)현세보다 내세를 바라보며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들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같이 일어 보겠습니다. 이 신앙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하나님이 풀무불에서 구원해 주지 않고 그 풀무불 가운데 타서 죽을 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현세에서는 죽고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한 신앙 고백입니다. 내세를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현세 중심의 가치관이 아니라 내세 중심의 가치관입니다. 죽음을 초월한 자에게는 장벽이 없습니다. 보석처럼 빛날 수 밖에 없습니다.

2)내세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복을 받게 해 주십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29)"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아갈 때 그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자신과 자신의 백성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8)"

내세 중심이냐 현세 중심이냐의 선택의 위기 앞에서 현세보다 내세를 바라보며 죽음을 초월하여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내세뿐만 아니라 현세에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 우리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바라보고 사는 자는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따르는 자가 아니라 환경을 바꾸는 자로 살아갑니다. 생명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사탄(SATAN)도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믿음은 결국 풍랑을 정복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풀무 불 가운데에도 천사를 보내어 보호해 주십니다. 왕이 그들을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해 줍니다.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 대충 목숨만 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완벽하게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풀무불이 오히려 영광을 가져다 줍니다. 지위가 더욱 높아집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금신상은 황금 만능주의, 경제 제일주의, 인본주의,권력 만능주의, 세속주의 등 다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상과 타협하지 말고 거부해야 합니다. 세상 군주와 세상의 힘과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우리 주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사 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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