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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복 있을 사람들 (눅 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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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을 대하며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첫머리에 나오는 [팔복]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보다 조금 앞에 있는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뒤에 나오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지설교]라고 불리기도 하는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가 여덟 가지 복을 열거하고 있는 데에 반해 네 가지 복과 이에 상응하는 네 가지 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20절부터 23절 사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주린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과 주님 때문에 미움과 멀리함과 욕과 악하다 말함과 버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무조건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미움과 멀리함과 욕과 악하다 말함과 버림을 당하기만 하면 다 복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0절을 다시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대상이 제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냥 가난한 자가 아니라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셨습니다.  "너희"라는 말은 그 때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의 주위에 둘러앉아 그의 말씀을 경청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가난한 자"는 예수님을 좇는 이들 가운데서 가난한 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모두를 일반적으로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보다 가치 있는 어떤 것, 보다 궁극적인 어떤 것, 삶에 있어서 보다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을 찾아 예수님께 나아온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런 힘도 희망도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 약속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알고자 나아온 신앙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비록 가난하지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세속적 관심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예수 믿고 교회 나아가고 하나님 말씀 배우고 하나님나라 찾고 있게 됐습니까?"라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가난한 것보다 영적으로 빈궁한 것이 더 크고 심각한 문제임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의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 하신 말씀은 그런 뜻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봅니다.  무조건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최우선의 관심사로 삼고 크든 적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삶의 관심과 에너지와 자산을 하나님나라의 실현에 쏟을 줄 아는 이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주어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 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지금"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1절에서의 예수님의 말씀도 지금 주리거나 우는 사람들은 무조건 나중에는 배부르고 웃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지금 주리고 울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영원히 배부르고 영원히 웃을 수 있기 위하여 지금 주리고 울 수밖에 없음을 감내하는 이들이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 위해, 주님만을 따르며 주의 말씀대로 살며 주의 의를 이루려고 힘쓰느라고, 이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지금의 궁핍과 고통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과 기쁨이 주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게을러서 굶주리는 사람이나 나약해서 항상 징징 짜며 사는 사람이 무조건 행복하고 배부르게 되며 웃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 지금 주리고 울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보다 "영원한 삶"을 더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주리고 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보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더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지금 주리고 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의 부요함과 기쁨을 위해서 오늘의 궁핍함과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밖에서 주님과 상관없이 배부르고 웃는 일에 관심 두지 않으며 오직 주님 때문에 배부르며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이라면 굶주릴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진정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주님 때문에 고난 받는 이들의 복됨을 말씀하십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여기서 "인자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에 유의해야 우리는 22절 말씀 전체의 뜻을 바로 붙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따돌림 당하고 욕먹고 나쁜 사람이라고 말 듣고 버림받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이고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런 사람 되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우리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까?  "인자로 말미암아"라는 단서가 붙을 때입니다.  주님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주의 뜻대로 살려 하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헌신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고 따돌림 당하고 욕과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버림을 받아야 할 때에는 그것을 복으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럴 때에 슬퍼하거나 위축되어 쳐지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뛰놀라"(23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럴 때에 기뻐하고 뛰놀 이유 두 가지를 제시하셨습니다.

  첫째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3절).  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고 상 타고 명예를 누리고 친구를 많이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그의 나라에서 상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상이 클 사람이기에 세상에서는 오히려 미움 받고 따돌림 당하고 욕과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버림을 받는 일이라면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 복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고 상 타고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 가운데는 사실은 그럴 자격도 없을 뿐 아니라 인간조차 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칭송을 받고 상 타고 명예를 누린다고 흥분하고 분노하고 속 끓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저 그런 세상인 줄 알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에 사람들이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며 버릴 때에 우리가 기뻐하며 뛰놀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은 옛날부터 참된 선지자들에게는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3절).  다시 말하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주님 때문에" 세상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따돌림 당하고 욕먹고 악평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선지자의 반열에 서는 것이고 참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여기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4-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앞서 하신 말씀을 뒤집어 다시 한 번 먼저 주신 가르침을 반복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 있을 사람들과 정반대되는 사람들을 가리키시며 "화 있을진저" 선언하심으로써 복 있을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축하하시고 복 있을 사람의 자세를 끝까지 지키기를 권면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위로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또한 강력한 경고의 말씀으로 듣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 또한 지금 부요하고 배부르며 웃고 칭찬 받는 사람은 무조건 모두 나중에 화를 당하고 굶주리게 되며 위로 받지 못한 채 애통하며 울게 되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배부른 자여 ... 지금 웃는 자여" 하신 것은 영원한 나라, 영원한 삶, 영원한 기쁨과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의 칭찬, 하나님의 상에는 관심 없이 그저 지금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을 가리키신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하셨다고 해서 부자들을 무조건 적대시하고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정의로운 세상 만드는 일에 관심 없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는 이들을 꾸짖으시며 경고하신 말씀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배부른 자여" 하셨다고 해서 식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미워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풍요에는 관심이 없이 먹기를 탐하는 사람, 특히 이웃의 굶주림과 배고픔에는 하등의 관심도 나눌 마음도 없이  혼자 즐기며 사는 사람을 탓하시며 경고하신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웃는 자여" 하셨다고 해서 늘 미소 짓고 명랑하게 지내며 낙천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무조건 증오하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에 무신경하고 더더군다나 남의 피해와 억울함을 통해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을 증대시키며 만족해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며 엄히 경고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위로와 배부름과 웃음과 칭찬에 취하여 사느라 영원히 위로도 없고 굶주림과 애통과 부끄러움과 후회만 있을 삶을 만들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26절의 말씀을 가슴에 잘 새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세상은 원래 참 선지자는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고 버리면서,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너도 나도 칭찬을 해온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해서든 인정을 받아 보려고 애쓰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고, 세상에서 칭찬을 듣지 못했다고 서러워하고 분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년에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말년에 가서 궁핍해지는 삶은 비참합니다.  마지막에 웃는 이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칭찬 받는 사람이 진정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웃을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을 받을 수 있는 이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소유하고 있고 향유하고 있는 부와 명예, 건강과 재능과 시간까지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일에 온전히 투여하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복을 누릴 삶을 준비하는 길입니다.

  영원을 생각하지 않는 삶,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지 않는 삶,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삶, 영원한 기쁨을 소망하지 않는 삶,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삶, 주님 때문에 울 줄도 모르고 주님 때문에 웃을 일도 없는 삶, 그것은 오늘의 가난과 굶주림과 눈물과 고통을 영원히 연장시키는 불쌍한 일입니다.  그것은 오늘의 부요와 배부름과 웃음과 명예까지도 영원한 가난과 굶주림과 눈물과 고통으로 뒤엎어놓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 때문에 지금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주리고 울며 버림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만족과 칭찬과 기쁨을 누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면 복 있는 삶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히 복된 삶이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기를 포기하면 다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기만 하면 다 잃은 것 같은 상태에서도 다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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