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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이 아닌 형제로 둘 자 (레 25:39~41, 몬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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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카키스는 남편과 아내를 찾을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도 찾을 수 있으며, 아이들과 애완동물을 돌보고 요리를 하고 말다툼을 하고 화해를 하는 그 곳이 또한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수도원에 계시는 분이라기보다는 집 안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화해를 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면 화해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화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화해자로 오셨습니다. 오셔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시고 나누어진 둘을 다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화해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왜 화해자가 되지 못합니까? 화해자는 양자를 다 알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둘을 다 알지 못합니다. 치우치기 쉽습니다. 우리는 둘을 다 인정하지 못합니다. 한쪽은 인정하고 다른 쪽은 모함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화해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하나 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양쪽을 다 잘 아십니다. 양쪽을 다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참 하나님(vere deus)이며 참 사람(vere homo)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셔서 하나님을 알고, 참 사람이셔서 사람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자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과 죄의 종인 사람 사이의 화해자로 자처하신 것입니다. 이런 분이 화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화해자로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의 화해자로 나섰습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 화해자로 나섰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와 빌레몬 두 사람을 다 이해하고, 인정하고, 사랑합니다. 두 사람 모두 바울에게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사람 사이의 화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화해하다는 말의 헬라어는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화해함이란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는 것이요, 반항하는 마음을 되돌리는 것이요, 싸늘히 식은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이런 화해자가 종을 형제로 만듭니다. 화해는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종을 자유자로, 형제로 만듭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변호합니다. 오네시모에 대하여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도망쳤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네시모가 추방당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화해자의 역할입니다. 요셉이 훗날 형들을 만나 변호하며 화해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형님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서 왔습니다”(창 45:5)라고 합니다. 이것이 화해자의 말입니다.
  해결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화해는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가 화해에 초점을 맞출 때에 문제는 그 중요성을 잃고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바울이 가르쳐준 화해의 영성을 보면서 우리가 화해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이전에는 종이었던 사람입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에는 이전에는 종이었던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화해자는 그 사람의 이전의 상태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이해하고 인정하는데서 시작합니다. 노예제도에 대한 바울의 태도에 대하여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시의 악풍을 철폐할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비난합니다. 그의 윤리가 제국주의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바울은 노예제도에 대하여 제도적인 개혁보다 중심적인 개혁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종이었던 사람이 형제로 변화합니다. 놀라운 은총입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게 된 은총입니다. 레위기 25:39에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라고 합니다. 종이었던 사람이 형제가 된 오네시모를 바울은 말합니다. 레위기는 형제가 종이 된 경우를 말하면서 종으로 부리지 말라고 합니다. 형제가 종이 되어도 부리지 말라고 하는데 하물며 종이었던 사람이 형제가 되었는데 부릴 수는 없습니다.

  종의 삶은 비참합니다. 동물보다 못한 삶을 삽니다. 동물들은 의지와 인격이 없으니 차라리 낫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종이 되어 사는 것은 죽음보자 못한 삶입니다. 노예는 자기의 의지대로 하지 못합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에 불과합니다. 노예는 자신도 모르게 노예의지, 노예근성에 따라 살게 됩니다.
  노예근성은 노예 의지에 따라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근성입니다. 이것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종의 신세를 지게 됩니다. 종의 근성은 편한 것을 선택하고 편한 것에 안주하려는 생각입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것 외에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루터 당시에 인문학자이며 최고의 지성을 대표하던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이란 책을 1524년에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 에라스무스는 사람은 자유의지에 의하여 선택하며, 누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1525년에 ‘노예의지론’을 출간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와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으므로 구원을 위한 아무런 작용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지배되는 노예의지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이 몸속에서는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경험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죄에 노예가 된 노예의지만 경험할 뿐입니다. 죄의 해방이 없는 자유의지는 의미가 없고 오히려 방종하게 하고 타락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대신 기독자의 자유(Christian Liberty)라는 새로운 의미를 취급하여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신학적, 영적 자유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애급에서 가지고 있던 노예근성을 완전히 뿌리 뽑고 새로운 의지로 일하고 차지하고 살게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40년 동안 새벽에 만나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싸우게 하셨습니다. 땅을 갈아 일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훈련을 다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종입니다. 지식의 종이며, 물질의 종이며, 명예의 종입니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의 종이 되어 살아온 우리들입니다. 종의 근성을 뿌리 뽑고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가 지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후에는 사랑받는 형제입니다.

  바울은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합니다. 아직 종이지만 종에게 형제라고 합니다. 오네시모의 엄청난 신분 상승입니다. 바울을 만나 신분의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디에서 이런 신분의 상승, 신분의 변화가 왔습니까? 예수 믿고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죄와 마귀의 지배를 받는 노예의지가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 자유의지를 가진 자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선생인 바울에게 형제가 되었습니다. 하물며 빌레몬에게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영적 관계뿐입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는 육적, 영적 이중적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형제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혈육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는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아들인 동인, 동인을 죽인 안재선이란 공산주의자를 용서해주고 아들로 삼았습니다. 안재선도 이름을 손재선으로 바꾸었습니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은 선을 악으로 갚은 도둑입니다. 자신을 먹여주고 보살펴준 집에서 금촛대를 훔쳐 나왔습니다. 밀리에르 주교는 장발장을 형제로 생각하여 금촛대는 자신이 준 것이라고 경찰에게 말합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5:15에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왜 종이 아니라고 합니까? 주인의 하는 일을 알게 하시려고 합니다. 이제 종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친구입니다. 형제보다 친구가 훨씬 낫습니다.
  마태복음 12:50에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주님의 형제입니다. 자매입니다.
  오래 전 어느 전직 대통령께서 예수님을 자기 형님이라고 하여 구설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실 전혀 틀린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형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친구라고 하기에 우리도 감히 친구라고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사실은 바울에게는 이 말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 사회의 흔한 욕 가운데 “개새끼”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개는 기분 좋지만, 사람에게는 나쁜 말입니다. 개는 사람만큼 신분 상승을 가져온 말입니다. 종에게 형제라고 하면 종은 좋지만, 바울이 종이 되는 신분 하락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히브리서 2:11에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다 한 근원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은혜지요. 그래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말할 수 없는 감사이지요.
  탕자의 비유에는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 “품꾼의 하나로 써주소서”라고 합니다. 솔직히 품꾼은 아무나 합니까? 지게도 져 본 사람이 진다고 품꾼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아들보다 더 어려운 일이 품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품꾼이라 하지 않고 아들로 인정합니다. 종이라 하지 않고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모세도 당시의 법에 따르면 노예의 후손입니다. 노예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예이지만 공주의 손에 들어가니 왕자로 삽니다. 누구의 손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의 손에 있는가에 따라 신분이 완전히 바뀝니다. 애굽의 공주의 손에 있으니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왕자가 됩니다. 하나님 손에 있으면 왕자가 되기도 하고, 공주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때문에 수지맞은 자들입니다. 그 손에서 종이 아니라 형제자매입니다. 왕자요 공주입니다.

  2세기 작가 루키아노스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필요를 도와주는 열정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종교의 창시자 예수는 그들이 서로 형제라는 사실을 그들의 머리에 각인시켜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세요. 안디옥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을 보세요. 카타콤베에서 서로 사랑한 모습을 보세요. ‘쿼바디스’에 나오는 장면처럼 황제의 박해에 서로 위해주는 놀라운 형제애를 보세요.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한 아기가 심장에 큰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의사들은 이 아기가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약한 아기가 죽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한 간호사가 두 아기를 하나의 인큐베이터에 넣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원래 두 아기를 한 인큐베이터에 넣지를 않습니다. 의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란히 눕히기로 결정했습니다. 얼마 후 건강한 아이가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현재도 두 아이는 정상으로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신문사가 이 소식을 듣고 기자가 와서 서로 포옹하는 사진을 찍고 “생명을 구하는 포옹”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형제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아시는지요? 형제애는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결론

  최근에 사이토 다카시의 ‘코멘트력’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시절, 가츠 가이슈라는 정치인이 시미즈 지로초라는 협객에게 물었습니다. “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부하가 몇이나 되는가?” 이에 시미즈 지로초는 대답했습니다.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놈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시미즈 지로초의 명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가치 있습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낮아질 수 있다면 세상이 변할 것입니다. 세상에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종인데 형제라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극진한 사랑과 낮아지는 자세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형제우애가 생긴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종이었습니다. 죄의 종이고, 욕망의 종이고, 세상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이제는 종이 아니라 형제라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형제가 되었으니 종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종의 의지를 버려야 합니다. 종의 근성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형제의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형제의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형제우애를 쌓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5에는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인정하고, 목숨 버리신 그분을 위해 더 이상 세상의 종이 아닌 주님의 형제로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형제우애를 사랑을 공급하며 사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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