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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통과 변화의 교회 (마 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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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태복음 9장 16-17절)


세상에는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변하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변하면 안 될 것이 변하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즉 세상은 변하지만, <진리>는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살아움직이는 생명체는 모두 성장과 결실이라는변화의 과정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성장하는 과정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들, 딸이란 본질적인 것은 그대로 있지만, 그들의 겉 모습은 항상 성장이란 과정에서 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만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창 뜨거운 햇살에 논 밭의 벼들은 이삭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얼마있으면 푸르던 논밭은 황금들판을 이루게 될 것이고, 추수의 계절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자연의 섭리요 변화입니다.

이것은 우주천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태양을 중심한 모든 항성들은 자신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돌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변해야 할 것과 변치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교회는 변치 않아야 할 것과 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상도교회는 58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입니다. 58년 동안 변한 것도 많고, 달라진 것도 많습니다.
우선 외적인 모습들이 많이 변했습니다.
본당의 모습과, 교육관과, 새로 건축한 사회봉사관, 그리고 화천기도원 등 우선 외형적인 모습들이 많이 변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교인들도 초창기 있던 교인들은 이제 몇 명 뿐이고, 모두 새로운 사람이거나, 이세, 삼세들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중에서 변치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아야 합니다.
앞으로도 이것은 영원토록 주님 오실 때 까지 변치 않아야 합니다.
우리 상도교회의 전통은 어디까지나 복음주의적 말씀중심의 교회입니다.
앞으로도 상도교회의 강단은 이단과 자유주의, 세속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쪽으로 변질될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변치 않아야 할 전통입니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교회>의 전통은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수용하고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항상 변해야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말씀>이 육신화 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이 그토록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였습니까?
저들은 장로의 <유전>을 <말씀>보다 더 상위에 놓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금식의 전통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금식하였습니다. 
안식일에는 오리 이상 걷지도 않고, 철저하게 금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더욱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고 비난했습니다.
또 안식일에 환자를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었더니, 왜 안식일에 병을 고쳤느냐고 모세의 율법을 범했다고 흠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저들의 눈에 비쳐진 예수님의 행실은 모두 자신들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점을 잘 유념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보다, 그 말씀을 지키려는 방법을 더 강조하다보니, 도리어 무거운 멍에를 지우게 되었고 형식으로 흘러가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가 목숨 걸고 고수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과감하게 떨쳐 버려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된 것은 양보하면 안되지만, 비본질적인 것은 얼마든지 수용하고 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존된다’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말씀>은 변치 않아야 하지만,
그 말씀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서 방법은 변화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2. 그러면 교회에서 변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 교회의 의식과 형식 보다 영혼 사랑을 더 중요시 해야합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마치 잠수함이 바다 속에 있어야 하는 것 처럼,
교회는 세상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잠수함에 물이 들어와서는 안되듯이 교회는 세속적인 것이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물 밖으로 나와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회적 변화와 세속의 물결 속에서 그것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세상적 문화에 대한 교회의 수용입니다.

수용(accept)이란 말은 동화(conform)란 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변화의 세계 속에서 교회는 수용해야 할 것은 수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과 함께 동화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즉 다양성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산 위에 세운 성이요, 등경 위에 놓은 등불입니다.

교회는 비본질적인 것은 항상 수용할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컨데, 예배시간 문제입니다. 꼭 11시에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녁예배는 저녁 7시에만 드려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마루에서 무릎 꿇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풍기나 에어컨을 놓고 예배드리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오르간 이외에 다른 악기로 예배를 드리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을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교파보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파주의적 전통의 사람들은 어느 교파인가를 먼저 묻고, 다른 교파는 안된다는 것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전통>수호가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도 않았습니다. 저들 생각에는 모세의 율법을 범한 자들은 돌탕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말씀>보다 장로의 유전이 더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장벽을 넘어섰습니다.
손 씻고 먹는 문제, 안식일에 금식문제, 심지어 현장에서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에게 전통 보다는 영혼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 변해야 할 일입니다.

2) 교회의 권위는 존중하되 권위의식은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권위는 영원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권위에도 견줄 바가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성스럽고, 만유를 통일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임으로 그에 대한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일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토록 보존되고 지켜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단과 사이비를 치리하는 교회의 권위는 영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직분이 그리스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교회의 권위를 마치 자신의 직분의 권위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지상의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범하는 일입니다.
예컨데, 서리집사로 있던 분이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면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욱이 목사나 장로의 직분을 받으면 사람들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장로교회에서는 이것이 더 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집사로 있던 사람들이 장로가 되면, 그 후 부터는 사람이 달라집니다. 우선 목사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집니다.
집사로 있을 때와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봉사의 직인 것을 망각한 권위의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교회는 목사가 단독으로도 해도 안되고, 또 목사없이 장로들만으로는 당회가 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서로 협력하고 돕는 파트너로 교회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교회의 담임목사는 한 사람이고, 장로는 여러 사람이니까, 당회에서는 다수결이라고 하여 그것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는 결코 다수결이 아닙니다. 이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권위주의에 빠진 현상들이란 말입니다.

또 이것은 목사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새파란 목사가 위임받았다고 하여 장로님들을 제쳐놓고 독단적으로 따라오라는 식으로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지, 직분을 맡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전통으로 굳어진 권의의식들은 변해야 합니다.
사회는 많이 변했는데 아직도 한국 교회가 변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권위주의 계급의식이란 말입니다.

1917년 소설가 이광수씨가 쓴 ‘한국 교회에 대한 공과를 비판한 글’에서 보면, 기독교가 한국사회에서 공헌한 바는 여성과 아동의 지위를 높여준 일이었다고 하였고, 그러나 기독교는 너무 계급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즉 목사, 장로, 평신도간에 관계가 마치 관민(官民), 장유(長幼), 사제(師弟)지간 과 같이 되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88년 전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변했습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시골교회에 나가보면 목사는 제일 높은 분이라고 모시고 있습니다.
목사들 스스로가 권위주의자들이 다 되어서 목에 힘을 주고 다닙니다.

그런가 하면 도시 교회들 중에서 보면, 장로만 되면 180도로 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 입니다.
장로가 되어 첫 번 당회에 참석하더니, 회장! 하고 발언을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발언권을 주었더니, 쪽지에 적어가지고 나온 것을 하나 하나 읽어 내려가더랍니다. 내용인즉, 평소에 집사로 있을 때 교회의 개혁문제를 적어놓은 것인데, 나는 장로가 되면 이것부터 고쳐야 하겠다고 기도하고 당회에 들어왔다고 하더랍니다.

요즘 이렇게 변한 세상입니다.
개혁도 좋지만, ‘모든 것이 옳으나, 다 유익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은 스스로의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상대방과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적 의식과 투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주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이 시작되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교인들 앞에 우리 직분자들이 깊이 생각해야할 일입니다.
교회 안에는 진공관 시대와, 아이씨 시대와, 아나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가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제 권위주의적 의식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머리로 모시고 참된 봉사자로서 설 때 그런 사람이 참된 존경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로 모든 권위 위에 뛰어난 권위를 세웠습니다.

앞으로 우리 상도교회는 이런 교회가 되도록 모두 함께 노력하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이 모든 성도님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
(김 이 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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