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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삼상 14:31-35, 마 16:23-24, 롬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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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 당시 로마 총독으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사람입니다. 그래놓고 그는 대야에 손을 씻으면서 “나는 이 죄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빌라도의 아내가 그 전날 밤에 꿈을 꾸고 애를 많이 썼는데 그 꿈이 바로 예수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빌라도로 하여금 이 일에 상관하지 말 것을 충고하였으나 빌라도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도 신경으로 신앙을 고백 할 적마다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빌라도는 나중에 정신이상자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는 역사의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빌라도가 남긴 몇 마디 말은 매우 중요한 말로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예수께서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하셨는데 빌라도는 대뜸 묻기를 “진리가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빌라도의 이 질문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인류 역사는 진리를 찾아 헤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빌라도는 그 예수님을 눈앞에 세워두고 오히려 자신이 심문을 하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빌라도의 이 말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진리가 무슨 진리냐? 진리가 밥 먹여 주느냐?”고 비웃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 현실입니다. 현대인은 “진리”에 대하여 흥미가 없습니다. 진리를 찾기는커녕 빌라도처럼 오히려 진리 그 자체를 비웃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빌라도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심문하다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많은 무리들에게 소개하면서 “이 사람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고 하는 이 말도 역시 역사적으로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거쳐 간 사람의 수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 사람은 단 한분뿐이십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 빌라도는 온 역사를 향하여 단 한 분 참 사람이신 이 예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역사를 향하여 예수를 소개한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경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상 유명한 신조들은 예외 없이 이 고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사명은 세상과 이웃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입니다. 빌라도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이 사람을 보라”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전도의 사명입니다.

2. 그런데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는 사울의 입을 통하여 참 훌륭한 말이 나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그 첫째가 33절 마지막 부분에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사울의 잘못된 명령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어처구니없게도 전쟁 수행중인 군인들에게 금식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군인들이 얼마나 시장하고 또 피곤했겠습니까? 그래서 31절에 “그들이 심히 피곤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단 끝냈을 때 시장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름 아니라 고기를 잡아 피째 먹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짐승을 잡아먹되 절대로 피째는 먹지 말라는 금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군인들이 워낙 배가 고픈지라 한가하게 율법의 조항을 들먹일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였습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요리문답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그것을 범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우리 상황이 어떠하다고 해서 면책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떤 경우에도 죄는 죄입니다. 배가 고파도 죄는 죄로 성립됩니다.

사울이 이것을 보고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으니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이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롬14:23에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사울의 입을 통하여 이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이란 말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믿음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작은 일이든지 큰일이든지 믿음에서 떠나서 생각을 한다든지, 말을 한다든지, 행동을 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믿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행위”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입으로는 “주여, 주여”하면서 그대로 살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사람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가 하면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의 승리자요 성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또 한가지 사울의 입을 통하여 한 유명한 말은 34절에 “여호와께 범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 범죄 하지 말라”고 한 이 말은 하나님을 등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께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께 영생의 길을 물었습니다. 주님은 십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님은 이번에는 “만일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은 자신이 부자이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가상하게도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의 길을 물었던 이 청년은 결국 예수님을 등지고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영생의 길을 버리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우리 복음 성가에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옛날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결단을 촉구합니다. 내가 태어나고 살고 있는 본토냐 아니면 주께서 지시하시는 새로운 땅이냐 양자택일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말씀대로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복음 성가의 표현대로 하면 “세상 등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을 향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지는 일입니다. 바로 이 결단에 구원과 생명과 축복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로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아가십니까? 아니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계십니까? 세상을 향하여 나간다면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돌이키라” 즉 방향을 전환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거기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3. 이번에는 사울의 말이 아니라 사울이 한 일 가운데 훌륭한 행동이 하나 있습니다. 35절에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최근에 방영되고 있는 “제 5공화국”을 보면 군대 내에 “하나회”라고 하는 조직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군인의 길에”에서 지적했듯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회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그 회를 위하여 충성을 맹세합니다. 결국 이 사람들이 역사상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 충성의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울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래서 고전10:31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기 우리의 목표가 있습니다.

(1) 롬14:에 보면 두 가지 아주 대조적인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주기철 목사님의 좌우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사각오(一死覺悟)”입니다. 주님을 위하여서라면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비장한 결심이었습니다. 그 각오대로 주기철 목사님은 주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직 주를 위하여” 이것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지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을 제단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기도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헌신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충성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옛날 갈멜산 꼭대기의 엘리야 제단에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런 제단마다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2) 롬14:에 나오는 다른 한 가지는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즉 어떤 이들은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적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도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적 신앙이 있습니다. 단지 나 한사람 잘되기 위하여, 복 받기 위하여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직분을 감당해도 자기 한 사람 위하여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맞으면 하고 싫으면 팽개칩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3년간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으나 그 “자기”라는 것을 벗어나지 못해서 결국 주님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 끊임없이 “아니오”하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처럼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고, 나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고, 그럴 때 내 삶은 승리하는 삶, 축복받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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