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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33) “하늘에서 편지를 써서 보내신 예수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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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사랑을 고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꽃 다발을 선물로 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편지를 써서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기려 박사는 북에 두고 온 아내 김봉숙 사모를 그리워하면서 1990년 6월 다음과 같은 사랑과 사모의 글을 써서 띄운 일이 있습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그날 아침 당신과 애들을 먼저 대동강 변에 보내지 않았더라면… 또 종로 거리에서 차를 세우기만 했었다면, 여보! 살아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의 편지가 그대로 북에 전달되지는 못했지만 애절한 사랑의 마음은 북에 있는 그의 아내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장기려 박사가 1995년 12월 25일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이 평양을 방문하여 어머니를 만났을 때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애끓는 사랑을 전달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찾아와서 우리들에 대한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내보이셨습니다. 병자들과 죄인들을 어루만져 주시기도 했습니다. 슬픔과 아픔과 사랑의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살과 피를 가장 값진 사랑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죄 사함과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가신 후에도 세상에 남아 있는 일곱 교회와 성도들에게 사랑의 편지를 써서 보내셨습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옛날 소아시아에 있었던 교회만을 가리키지는 않았습니다. 지난 2천 여년 동안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교회를 가리킨다고 성경 학자들은 말합니다.

  오늘 아침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들에게 써서 보내신 사랑의 편지를 함께 읽으면서 주님의 사랑을 더듬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랑의 편지의 내용을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아신다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아노라.” 둘째는 주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나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이다.” 셋째는 우리들에게 칭찬과 책망과 함께 권면의 말씀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노라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가지도록 하여라.” 이것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들에게 써서 보내신 편지의 내용입니다. 귀가 있는 자들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써서 보내신 편지의 말씀들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찬송가 485장 2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청년 성가대원들이 앞으로 나와서 함께 부르겠습니다.

  1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편지의 첫째 내용은 우리를 아신다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2:2).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2:9).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2:13).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2:19).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3: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3:5). “내가 너를 안다”고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준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내 수고와 인내도 알아주고, 내 환난과 궁핍도 알아주고, 내 믿음과 사랑도 알아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고마운 일입니다. 옛날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안고 일어섬을 아시고 자기의 생각과 길과 눕는 것을 모두 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시139:17,18).

  편지의 첫째 내용은 우리를 알아주신다는 말씀과 함께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알아주신다’는 말씀과 함께 ‘알려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의사가 알려주어야 우리 자신을 알듯이 주님이 알려주셔야 우리 자신을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몸에 병이 있는 것을 모르고 살 때도 있고,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과 착함이 없는 것도 모르고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참 모습을 알려주셨습니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알려주셨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행위와 수고와 인내는 있었는데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환난과 궁핍과 가난 가운데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한 자들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은 사단의 위가 있는데 살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지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은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지니고 있었지만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을 용납한 잘못을 범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사데 교회 성도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고 알려주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아니했고 그리고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우리의 참 모습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는 말씀은 참으로 고맙고 귀한 말씀입니다.

  2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예수님께서 써서 보낸 편지의 둘째 내용은 주님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편지를 보내면서 자기의 사진을 넣어서 보냅니다. 저도 옛날 미국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저의 사진 두 장을 넣어서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자기의 사진을 각각 한 장씩 넣어서 보내셨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주님의 모습을 바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저의 방에 걸려 있는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모습을 자주 바라보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의 모습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모습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분의 모습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데 교회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자신 이”의 모습이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의 모습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은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사랑의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각각 조금씩 다른 자기의 사진을 한 장씩 넣어서 보내주셨습니다. 주님을 자주 바라보라고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3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라”

  예수님께서 써서 보낸 편지의 셋째 내용은 칭찬과 책망과 함께 훈계와 권면의 말씀을 써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에는 칭찬과 책망과 함께 훈계와 권면이 따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1: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히12:6). 이 세상에 사는 지상 교회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책망과 함께 훈계와 권면의 말씀을 항상 들어야 합니다. 때로는 징계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표시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각각 다른 칭찬과 책망과 함께 각각 다른 훈계와 권면의 말씀을 써서 보내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칭찬의 말씀만을 써서 보냈고,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책망의 말씀만을 주로 써서 보냈고,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게는 칭찬의 말씀과 책망의 말씀을 섞어서 써서 보내셨습니다. 지상 교회와 지상 성도들이 처한 처지와 형편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지다. 아마 주기철 목사님이 목회했던 평양의 산정현 교회와 손양원 목사님이 목회했던 여수의 애양원 교회에게는 칭찬의 말씀만을 써서 보내실 것 같고, 영락교회와 충현교회와 강변교회에게는 칭찬의 말씀과 책망의 말씀을 섞어서 써서 보내실 것 같습니다.

  4 이제 말씀을 정돈합니다.

  일곱 교회에 써서 보내신 주님의 말씀을 종합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우리들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처한 형편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형편과 처지를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아노라. 김 목사야, 안 장로야, 박 장로야, 채 장로야, 아무 권사, 아무 집사야, 내가 너를 아노라.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내가 아노라. 네 환난과 궁핍도 아노라. 네가 어디 사는 것도 내가 아노라. 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도 아노라. 네 행위를 내가 아노라.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도 내가 아노라. 네가 살았다고 하지만 실상을 거의 죽게 된 것도 내가 아노라”

  둘째로 주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나는 오른 손에 일곱 교회를 붙잡고 일곱 교회들 사이와 성도들 사이를 걸어 다니고 있노라.” “나는 인생과 역사의 처음과 나중이니라.” “나는 죽었다가 산자이니라.” “나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천국문과 지옥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노라.” “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니라.”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주님은 우리들에게 훈계와 권면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지만 다시 찾기를 원하노라.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니라.” “네가 거의 죽게 되었지만 다시 살게 되기를 바라노라. 기도가 거의 죽었고 예배가 거의 죽었고 봉사가 거의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기를 원하노라.” “네가 내 종들의 소리를 듣는 대신 발람과 이세벨 같은 거짓 스승들의 말을 듣고 있는데 속히 돌아서서 내 종들의 말을 듣기를 원하노라.” “네 신앙이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데 덥든지 차든지 하기를 바라노라. 너의 눈이 어두워졌고 너의 몸이 벌거벗게 되었는데 믿음의 약과 보혈의 약과 성령의 약을 사서 눈을 밝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으므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그리고 처음 사랑을 되 찾을 수 있는 비결과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비결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수치를 면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십니다. 두 가지 기본적인 비결을 가르쳐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첫째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말씀과 둘째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들을찌어다’ 라는 말씀을 일곱 번 하셨고 ‘회개하라’는 말씀을 다섯 번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길이고, 우리가 사는 길은 주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를 하는 길입니다. 저는 최근 새벽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새로운 감동과 새로운 은혜와 새로운 깨달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날마다 새롭게 합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던 에베소 교회를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었던 대표적인 교회였고 가장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믿음과 행위와 사랑이 충만한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눈물과 사랑을 쏟으면서 목회하던 곳이었고 디모데가 진실과 성실로 목회하던 곳이었고 사도 요한이 눈물과 사랑을 쏟으면서 목회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에베소 교회는 사랑을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지적하신 대로 에베소 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처음 사랑과 사랑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헨드릭슨 이라는 유명한 주석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을 때는 에베소 교회가 생긴지 40여년이 지났다. 그래서 설립 당시와는 다른 세대가 온 것이다. 그 당시 성도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처음 복음과 접했을 때 보여주었던 그러한 감격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의 선대들이 가졌던 그리스도를 위한 사명감도 없었다. 에베소 교회는 그들의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에베소 교회가 처한 형편에 처해있는지 모르겠습니다. 40여년 동안 신앙의 열정과 사랑의 열정을 지속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20여년 동안 지속하기도 힘든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는 기도의 사람 길선주 목사님이 복음을 전한 곳이었고, 믿음의 사람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의 피를 뿌린 곳이었고, 사랑의 사람 손양원 목사님이 사랑과 눈물을 쏟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 사랑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주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는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분노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진다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사도 바울도 말세에는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와 돈과 쾌락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경고한 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3:4).

  주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늘에서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까지 우리들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훈계하십니다. 이 훈계는 박윤선 목사님이 지적하신 대로 혈기에서 오는 훈계가 아니라 사랑의 동기에서 오는 훈계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훈계와 권면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계기가 어딘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안일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직업일 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고, 게으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거기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떠나신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회개는 십자가의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속에 다시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잘못을 많이 한 사람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찬송가 336장 1절을 함께 부르면서 십자가의 주님 앞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다시 가슴 속에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청년 성가대원들이 앞으로 나와서 함께 부르겠습니다. (김 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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