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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를 받고 행하는 자 (약 1: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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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처음 배울 때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이 자동차 운전 교습소에 가서 배우게 되지만, 미국에서는 자기 부모에게 배우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럴 때 아무리 귀여운 제 자식이라 해도 그 자동차 운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운전대를 열여섯 살 되는 아들이나 딸의 손에 쥐어 놓고 자기는 그 옆 좌석에 앉아서 그 서툰 운전에 가슴을 졸이다 보면 문자 그대로 혈압 올라가지 않을 부모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처음으로 운전을 배우는 교습생이 곁에서 가르치는 사람을 진땀나게 만드는 최악의 경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 초보 운전자가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구분하지 못하고 뒤바꾸어 밟는 경우일 것입니다.
  아무리 초보자라도 오른쪽으로 가야할 때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갈 때 운전대도 왼쪽으로 돌리는 것을 뒤바꾸어 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급히 차를 세워할 경우에 운전자가 당황해서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꽉 밟게 되면 정말 곁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함께 사고를 당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마 뭐, 그런 것도 구별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제가 알고 지내던 어느 장로님의 따님도 운전시험 도중에 곁의 시험관이 “브레이크!”하고 외치니까 그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바람에 소화전과 정면충돌한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교포 중에 어떤 남편들은 자기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칠 때 아예 차를 세워 놓은 상태에서 “브레이크”하면 왼쪽을 밟고 “악셀레타”하면 오른쪽을 밟는 훈련만 지루할 정도로 반복시킨 후에 교습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하여튼 분명한 사실은, 운전을 함에 있어서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바로 구별해서 밟는 것, 즉 차를 제동해야 할 때 제동하고 차를 구동해야 할 때 구동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핸들 조작보다도 훨씬 더 기본적으로 중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처럼 제동력과 구동력을 각각 제대로 구별해서 발휘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이 굴러가는 모습을 스스로 잘 관찰하면서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자리에 브레이크를 밟고, 한번 액셀러레이터를 쑥 눌러주어야 할 자리에서는 액셀러레이터를 바로 밟을 줄 아는 영적 반사 신경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와 같은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 기독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경우와 반대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야 할 경우란 각각 어떤 때입니까?

  1. 신자는 자신의 말과 감정에 대하여 제동력(制動力)을 가함으로써 성경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능력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본문 19절로 21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신자라 하면서도 말씀을 들을 때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에서 브레이크를 걸고, 반면에 자신의 입으로 나가는 말과 표출되는 감정은 전혀 주체할 줄 모르는 자들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특히 애정이 담뿍 담긴 표현으로 이 말씀을 시작하는 것은, 18절 이전까지와는 조금 다른 주제로 새로운 문단이 시작됨을 나타내는 동시에, 또한 지금부터 하려는 말이 정말 그 ‘주 안에서 형제 된 자’들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는 엄한 훈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너희는 알아야 한다.”라고 이하에 나오는 말씀에 대한 명령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우선 “듣기는 속히 하고”라고 명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이 세상에서 일반적인 대화를 하는 모든 경우를 다 지칭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상대방의 의도를 빨리 파악하라, 혹은 여기저기 많은 정보를 그때그때 빨리 파악하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어지는 21절 말씀의 문맥에 비추어서 볼 때, 이 “듣기를 속히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빨리 잘 받아 들여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듣기를 속히 하라’고 한다고 해서 신자가 세상의 유언비어나 떠도는 말들에 귀가 솔깃해지는 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말이야말로 사람이 스스로 제동력을 발휘하기 가장 어려운 분야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스스로 브레이크를 잡지 못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말로 인하여 짓게 되는 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빨리 나오는 말은 우선 깊은 생각이 결여된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말버릇이 계속되면 될수록 결국 자신의 속이 점점 더 얕아지게 되고 결국 더 가벼운 말들이 나오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 십상인 것입니다.
  빨리 나오는 말은 그처럼 깊은 사려가 결여된 대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싣고 나오는 말이 되기 마련입니다.
  본문에 “성내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이 “말하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 바로 다음에 이어져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으로만 말하게 되고 그런 과정은 결국 하찮은 일에도 쉽게 성을 내는 버릇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성내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심각한 죄에 해당됩니다.
  20절에서 밝히는 대로 “사람의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에 부합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의로운 분노’도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신자가 마땅히 발휘해야 할 분노이지만, 이처럼 자기의 빠른 입 때문에 나오는 분노는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운 행실의 규범을 정면으로 어기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입을 조심하는 문제와 관련에서 본문 21절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야말로 가장 악한 것들인데, 그 “넘치는 악”들이 대부분의 경우 바로 우리의 입을 통하여 넘쳐흐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말을 조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에 넘쳐흐르고 있는 온갖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을 내버리는 것과 그대로 직결되는 것입니다.
  여기 “내버리다”라는 말은 원래 ‘옷을 벗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우리 속의 악은 말로 뱉어서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에 제동을 가함으로써 그 악이 내 마음 속에 어디 자리 잡고 자라날 자리조차 없게 만들어 놓으면, 마치 죽은 껍질이 한 꺼풀 두 꺼풀 절로 벗겨지듯이 자연히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입을 조심함으로써 마음을 정케 해 나갈 때, 그 대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빨리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 “마음에 심긴 도”란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쪽의 활동에 의하여 우리 심령에 씨처럼 뿌려졌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뿌려진 말씀을 우리는 “온유함으로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 주신 분의 권위를 존중하고 오직 겸손한 자세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 깨닫고 믿고 신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귀에 들려주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자기 자신 속의 생각과 자기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먼저 얌전히 눌러 놓을 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든지 걸핏하면 다른 교인들에게 시험을 끼치고 교회 안에서 문젯거리를 제일 많이 만들어 내는 교인은 바로 소위 ‘말 잘하는 교인’입니다.
  헌금과 봉사의 모범으로 교회를 섬기려 하지 않고 당회에서 유창한 발언으로 충성(?)하려는 장로, 기도회나 봉사활동에는 잘 참석하지 않으면서 남녀전도회의 회의 시간에만 제일 열심을 내는 회원이 항상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말에 브레이크를 걸 줄 모르는 교인은 반드시 무엇인가에 부딪히고 사고를 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튀어나온 말이 다른 성도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그 무심코 내뱉는 말이 같은 구역원들 사이에서 오해를 만들어내고, 그 제멋대로 책임 없이 한 말 한 마디가 교회 안에 사단의 시험을 불러들이는 등, 각종 충돌사고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말 빨리하는 사람, 자신의 말에 스스로 제동을 걸 줄 모르는 사람은, 또한 하나님 말씀 받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느리기 마련입니다.
  아니 느린 정도가 아니라 절대로 설교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인은 목사의 설교를 듣는 순간에도 이미 자기 머릿속에 먼저 박혀 있는 생각들이, 그 설교 내용 중에서 공감되는 말과 반발되는 말을 순간적으로 구분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자기가 말 잘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설교를 귀담아 듣지 못하게 되며, 듣기도 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먼저 넘치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개발시킬 길이 전무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은 차분한 생각이라는 깊은 정화 단계를 걸러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감정이라는 얕은 그릇에서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27)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급한 말과 거기 휩쓸려 나오는 분노로 인하여 스스로 마귀의 유인 작전에 자주 말려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스스로 말하는 속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속도를 비교해 볼 때는 또 어떠합니까?
  적어도 하나님 말씀 듣는 속도보다 스스로 말하는 속도가 더 빨라서는 그 나오는 말이란 것의 수준이 어떠할지는 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줄 모르면 내 마음 속에는 더러운 것, 악한 것만 구정물 고이듯이 자꾸 고이게 됩니다.
  그 시커멓게 고인 것들이 나의 가볍고 빠른 입으로 계속 분출되고 그 재미 때문에 또 내 속에는 계속 더럽고 악한 것들이 생산되어 입으로 공급되는 이런 영적 공해 현상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들은 것보다 내 놓은 것이 더 많다면 그 내놓은 말 중에 하나님 것 아닌 사람의 말이 많을 것은 자명한 일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심령과 인격을 점점 더 저수준, 저질로 떨어지게 만들고 늘 영적 사고를 저지르게 만드는 소위 ‘말 잘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늘 자기 입으로 나오는 말을 스스로 통제하고 제어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대로 잘 심기는 ‘좋은 밭’의 마음을 일굴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들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일에 대하여 구동력(驅動力)을 발휘함으로써 그 행하는 일마다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22절부터 25절의 말씀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말하는 것을 조심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을 더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교훈이었지만, 여기에서 또 모든 것이 다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브레이크를 잡을 때가 있었으면 또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나가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도를 듣고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까지는, 내 마음에 악한 것이 일어나서 그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입조심, 성질조심, 마음조심하면서 계속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지만, 그런 제동의 단계를 거쳐 일단 하나님의 말씀, 즉 도가 내 마음 속에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때부터는 이제는 더 이상 꾸물거리지 말고 꾹 밟고 쑥 앞으로 나아가야 할 순간인 것입니다.

  여기서 “도를 행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바로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순종하여 행하는’ 이 두 가지는 말씀의 패키지(package), 즉 한 묶음과도 같이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들음과 행함’이라는 이 일련의 과정을 중간에 뚝 잘라놓는 최대의 위험이 하나 있는데 본문 말씀에 그것을 가리켜 “도를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언가 깨달음도 얻고 감격도 있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이 다 이루어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 그저 듣고 알기만 하는 상태에서 자기 딴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정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종교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최대의 오산, 바로 자기망상이요 자기기만이 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의 어머니이다.”라고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순종해 보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은, 그처럼 듣기만 하는 신자를 가리켜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는 사람”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참으로 실감나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에 세수할 때 거울 앞에서 잠깐 자기 얼굴 한번 들여다보고 그 후로는 하루 종일 자기 얼굴 모양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기는 늘 콤팩트를 핸드백 속에 넣고 다니다가 수시로 화장 고치는 요즘의 여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겠지만, 이 유다서가 씌어졌을 당시에는 청동거울도 그리 일상화되지는 못했던 때였던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실상 오늘날 신자들 중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그 순간만 잠시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주일 설교를 듣는 그 순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구나, 옳은 말씀이지. 아멘.”하다가, 예배가 끝나고 나서부터는 조금 전에 그 ‘말씀의 거울’을 통해 반성해 보았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는 전혀 되새겨 보지 않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모양이 어떠했던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 실로 예배당을 문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 곧 잊어버리고 영원히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가리켜서는 무엇이라 했습니까?
  본문 25절에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들여다보고 있는 자”라고 번역된 부분에는 사실 두 개의 동사가 들어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열심히 들여다보다’(look intently)라는 말과 ‘머물다’(remain)라는 두 개의 동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말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율법을 잘 살피고 또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은”이라고 그 원문의 의미를 더 상세하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즉 앞에 나온 ‘잊어버리는 자’와 뚜렷이 대조되는 사람은 그냥 ‘들여다보는 자’가 아니라 바로 ‘그 들여다보는 율법 안에 머무는 자’인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씀 듣고도 행하기를 잊어버리는 자는 마치 주일 아침에 거울 한번 들여다보고 세수 한번 하고서는 하루 종일 그 얼굴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지만, 실행하는 자란 한번 들은 말씀을 집에 가서도 계속 상고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거기에 비추어 계속 ‘들여다보고,’ 또한 그 말씀 ‘안에서 바로 사는’ 모습을 지키고자 계속해서 빗질하고 화장도 고치고 하면서 일주일 내내 사는 사람과도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런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듣기만 한다고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그 말씀에 있는 복이 따라오는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은 말씀이 은혜는 되는 것 같은데 복이 되는 것 같지는 않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얼마나 자주 비춰보고 계십니까?
  주일에 들었던 말씀 거울의 뚜껑을 열어 놓고 내 생활을 비추어 보기도 하고 내 행실을 판단하기도 하고 내 결심을 다짐해 보기도 하는 일이 주중에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까?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그처럼 일주일에 일회용 거울로만 쓰고 바로 내버리는, 정말 아깝고도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음식은 맛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먹기만 하고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으면 그 영양가가 좋은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비만증이 나타나든지 콜레스트롤 수치가 높아져 고혈압 증세가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기만 하고 꼼짝하지 않고 그냥 잠만 자는 교인은 오히려 그 먹은 것 때문에 부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말씀 듣고 은혜 받았네.’하고 제 딴에는 충만한 신앙생활하고 있는 줄 착각하는 순간 이미 자신에게 스스로 속고 마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은 다음에는 반드시 활동을 해야 그것이 에너지로 잘 쓰이게 되고 사지가 잘 돌아가고 튼튼한 근육으로 발달되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듣고 행해야 만이 그 말씀이 진짜 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말씀을 들었으면,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뀐 순간처럼 우리는 순종의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붕하고 그 구동력을 가지고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속적으로 앞으로 내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경향인의 생활강령 제4조, “설교 말씀을 생활에서 체험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영적 구동력을 발휘하라는 뜻입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을 받았으면 그 말씀이 정말 ‘모든 사람에 복 주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늘 말씀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되씹고 다시 비추어보면서 그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영적 추진력과 가속도를 발휘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본문 26절과 27절의 말씀은 이상의 내용을 종합 재정리해 주는 말씀이라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두 절 말씀에서 “경건”이라고 세 번 나타나는 단어는 사실 ‘종교적’(religious) 혹은 ‘종교’(religion)라고 번역해야 할 단어입니다.
  즉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는” 즉 자기 말에 제동력을 가할 줄 모르고, “자기 마음을 속이는” 즉 도를 듣고도 행할 줄은 모르면서도 도 닦은 체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의 종교의식이나 예배생활이라는 것들은 다 “헛것” 즉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 정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종교’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즉 들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이며,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즉 자신의 마음이 세상의 악에 물들어 가지지 않도록 그 입으로부터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을 원천 봉쇄할 줄 아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말을 통제하는 사람만이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말씀 안에서 정결하게 지킬 수 있고, 들은 말씀대로 자기 행실을 가속시킬 줄 아는 사람만이 외적으로 그 행하는 일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종교, 진짜 신앙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과연 세상 사람들 앞에, 그리고 다른 교인들 앞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겠습니까?
  하도 아는 것이 많아 어떤 경우에도 말 막히는 일만은 절대로 없는, 말 잘하는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입의 말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순간에 밟을 줄 모르면 그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는 예리한 경고의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자신의 입에 스스로 재갈을 물리고 자신의 생각을 통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니면 혹 받은 말씀의 은혜가 하도 깊고도 풍성해서 무슨 도를 통달한 사람처럼 그저 고고하게 폼만 잡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있지는 않겠습니까?
  듣고 깨달았다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준행하는 삶에 액셀러레이터를 꾹 밟아 주지 않으면 그 신앙생활은 영원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침륜에 빠지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처럼 운동 부족인 교인은 말씀을 잘 먹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영양분이 아무 근력 성장에는 쓰이지 않고 그냥 비곗살만 덧붙이고 있을 뿐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도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종교인, 진짜 경건한 기독신앙인의 모습은 아닌 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참된 신자는 결코 ‘말 잘하는 변사(辯士)’가 되는 것도 아니며 ‘많이 깨달았다는 도사(道士)’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말과 생각에 제동을 가하며, 듣고 깨달은 말씀에는 순종의 구동력을 발휘함으로써, 진짜 경건하고도 복스러운 신앙생활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 기 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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