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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로운 성도의 자기관리 (잠 12: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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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더위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각각의 분야에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수고하고 애쓰시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되는 대로 살아도 그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할 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내 마음대로 살므로 유익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춤으로 유익을 얻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모습임을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죄악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 흘러가는 대로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죄악의 지경으로 흘러가기가 일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마음에 새겨 그 말씀으로 우리 삶에 길잡이를 삼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들을 어거시켜 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도들에게는 적어도 성도로서 자기 관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를 관리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힘이 들고 또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그것이 우리들의 생활이 되고 기본이 되어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부담과 짐이요 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성도의 삶이 얼마나 힘들까라고 생각하는 외부사람의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가는 것은 성도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것보다 오히려 훨씬 편안하고 기쁘고 유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 앞에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는 귀찮은 것도 아니고 힘든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사하며 마음이 기쁘고 또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는 더욱더 자유로움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기를 관리한다는 것은 이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며 오히려 우리를 힘 있는 은혜의 생활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무더운 여름철을 맞이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 구원의 백성이 되어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도 영원한 천국에 가며 뿐만 아니라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지상 속에 천국을 누리고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이 지상에서도 천국을 살고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자기를 관리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오늘 잠언 지혜서는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여러분들이 읽으신 문구 그대로입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고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지만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고 미련한 자는 칼로 찌름 같인 함부로 말하지만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아서 늘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쉽게 말해서 우리가 믿음의 성도로서 바른 관리를 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생각을 관리하고, 지혜로운 느낌 즉 정서를 관리하고, 지혜로운 언어(말)을 관리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말이 관리되고 우리의 느낌이 관리되고 우리의 생각이 관리된다면 이것은 지혜로운 성도로서의 자기를 영적으로 관리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며 우리는 오늘 첫 번째 바른 지혜로운 생각의 관리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미련한 자는 자기의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긴다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작은 노력은 크게 평가하고 다른 사람의 큰 노력은 적게 평가하는 것이 죄로 오염된 인간들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마음이 작고 공정하지 못합니다. 다른 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크게 여기고 내 아픔은 오히려 다른 이를 위해 넘어갈 수 있는 대의적인 자세가 주어지면 되는데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한 수고는 크고 가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수고는 별 가치 없이 생각하는 이와 같은 마음이 들게 될 때 우리는 자기의 행위를 바르게 여기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행위를 늘 바른 것으로 여기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것과 우리의 연약한 것과 그리고 우리의 틀린 점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욱더 강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도취에 빠져 스스로를 바라볼 수 없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항상 내 자신이 옳다는 그릇된 자아도취적 권위에 빠지거나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내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 같은 취약한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언제나 내 자신이 옳다라고 생각하고 싶어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자가도취에 빠지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는 용기가 없는 경우를 봅니다.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상대에게 가해를 가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보면 너무 상처를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상처를 다른 사람이 많이 입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상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자아구조가 연약하기 때문에 내 내적구조가 건실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늘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전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이 기회를 통해서 나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내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치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상처받기로 작심하기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도 상처를 받고 저런 말을 들어도 상처받고 우리는 정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견고한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튼튼한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하면 이러저러한 감염이 되어도 우리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여 질 때 연약한 상태에서 작은 병원체가 우리에게 투입해도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서 큰 병을 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상처받기에 합당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견고하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의 백성의 모습을 이루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면 우리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는 생각보다 항상 내가 어떤 점이 부족하고 어떻게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나 자신을 수정하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강화시켜 나가야 될 것을 생각해 봅니다. 나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늘 해야 될 세 가지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입니다. 어떤 말을 우리들에게 해도 감사한 것입니다. 내게 칭찬해도 감사하고 또 내게 꾸짖어도 감사한 것입니다. 칭찬하면 격려해 주셔서 감사하고 꾸짖으면 그것을 통해서 나를 바로 알게 해주시니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하지요.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내가 당신 아니면 만날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여기 아니면 있을 때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이 일 아니면 할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이런 자세라는 것은 가장 취약한 가장 치졸한 자세입니다. 그저 우리 자신이 겸손한 마음이 되어서 ‘감사합니다 제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제가 최선을 다해서 더 좋은 결과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이와 같은 겸허한 삶의 구조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권고를 듣는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의 지적과 충고를 인정하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잘못을 고치려고 하는 수고와 애씀이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권고를 받았을 때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발전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언제나 지금보다 더 잘 할 수 없을까 하는 욕구가 있으므로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회복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진보를 위한 코칭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뭔가를 지적하면 상처로 받아들이지 말고 내 마음에 정말 진보를 위한 코칭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에게 발전적인 코칭을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감사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충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하고 우아한 심적 평안의 능력입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사고가 유연해지면 다른 사람의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상대가 좋지 않는 상태에서 지적을 해도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줄 아는 지혜로움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음식을 아주 잘 먹습니다. 그런데 저는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이 구별이 없습니다. 모든 음식이 다 맛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음식도 막론하고 다 맛있어서 굳이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 맛있기 때문에 혹시 성도님들 저하고 식사하실 때도 굳이 맛있는 것 골라서 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저는 다 맛있습니다. 저희 집에서 식사하면 저희 딸아이가 저보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아빠는 뭐가 그렇게 맛있어? 아빠가 먹는 건 다 맛있나봐.’ 그런데 저는 맛있어요. 식사 때 되면 또 식사시간이 기다려지고 그리고 굉장히 맛있게 잘 먹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건강하니까 식사 때가 기다려지고 건강하니까 모든 음식이 소화가 잘 되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고 또 언제든지 마음에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하지 못하다면 모든 음식이 쓰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마시는 물까지 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건강하면 모든 음식을 맛있게 섭취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내적으로 건강하고 견실해지면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는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기쁨과 감사의 발전적인 코칭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 속에 정말 내가 건강하다면 영적으로 건강하다면 내가 심적으로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옳아 당신의 말이 틀려’가 아니라 ‘정말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제가 한 번 더 어떻게 잘해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좀 제 자신을 발전시켜 보겠습니다’라는 이와 같은 건전한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각을 관리해야 합니다. 내가 과연 어떤 사고구조를 가질 것인가?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왜 다른 사람의 권고를 들어도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고 또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고를 들을 때 정말 내 자신을 돌아보고 권고를 받아들일까요? 이건 다름이 아니라 늘 인생을 대결 구도 속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에 만끽하는 행복한 삶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가려는 것이 있으면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늘 대결구도로 보면 안됩니다. 인생은 성공과 실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성공과 실패를 두 가지로 상정하고 ‘모든 것은 성공 아니면 실패야 성공하면 기쁘고 실패하면 슬퍼’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이 언제든지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삶이라는 것은 밤이 있고 낮이 있는 것처럼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 이것이 윤환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공할 때만 기뻐하고 실패할 때 슬퍼해야 한다면 우리는 늘 성공과 실패 속에 우리는 늘 슬픔과 기쁨이 반복되면서 결국 우리의 삶 가운데 늘 우울한 때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외적인 성공과 실패를 능가하는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기뻐하고 누릴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자체가 성공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져도 감사하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며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이룬 것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이 무엇인지 아세요? 오늘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숨을 쉬는 것입니다. 숨 안 쉬고 숨 꽉 막아볼까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시간 산소호흡기 필요해야만 여러분이 살 수 있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렇게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손을 한번 움직여 보고 손이 움직인다는 것에 대해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고 어슴푸레한 가운데 아침이 밝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사물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도 구별할 수 있고 아침이 밝아오는 그 명암 속에 무엇인가 마음에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하지 않습니까? 살아서 호흡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지 않아요? 살아서 호흡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잖아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무엇인가 이룰 것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호흡을 주신 것이 있을까 생각하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습니까? 어떤 일이 성공해도 어떤 일이 실패해도 내가 평가를 받아도 내가 평가를 받지 못해서 남에게 지적을 받아도 그리고 남에게 좋은 소리를 들어도 그래도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며 순간순간 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쓸 수 있는 것이 감사하잖아요.

때로는 우리는 승부심을 가지고 어떤 일에 집착하며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승부의 관점과 승패의 관점과 모든 것을 대결구도에서만 보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늘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고 우리들에게 행복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부족을 보고 더 나아지려고 하는 겸손함과 진보에 대한 열망입니다. 우리의 진보는 겸손에서 출발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그를 가르칠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더 이상 배울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진보도 없고 앞으로 나아질 가망이 없습니다. 남은 것은 그 상태가 최고봉이니 그 상태에서 추락하는 일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내일이 더 나아지고 그 다음 날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제 나는 지금부터 점점 더 추락하는 일만 남았어’라고 생각하면 우리 삶은 얼마나 처절해지겠습니까? 우리는 진보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서 더 큰 지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해질 때 우리의 진보의 지경은 확장되며 진보의 지경은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을까에 대한 뜨거운 믿음의 자세가 결국 인간의 진보와 겸손과 은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성취해 드릴 수 있을까? 믿음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는 실패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내가 좋은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어려운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모세는 왕궁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초를 이루었으되 광야에 머물면서 그는 또 하나님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좋은 상태에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게 아닙니다. 어려운 상태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공이다 실패다라는 개념을 벗어나서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한 가지 한 가지 다 수용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언제든지 내게 주어진 모든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고 내게 주어지는 권고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게 내 마음에 맞아야 평안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세상에는 내 마음에 맞는 일보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지혜로운 생각의 관리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에 맞아야 행복한 게 아닙니다. 내 뜻에 맞아야만 행복한 게 아니라 내 뜻에 맞지 않아도 내가 그것을 어떻게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언제나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바르고 지혜로운 정서관리, 느낌의 관리입니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낸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지적당했을 때 혹은 마음대로 안될 때 실망과 좌절감에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에게 분노를 나타낼 때가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분노하는 것을 보면 그 순간이 자기의 취약 지점입니다. 내가 분노할 때 보면 내 취약지점이라는 것입니다. 감정의 표출이 빠른 것은 아직 내가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상태의 삶이라는 것은 나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괴롭힙니다.

사울의 경우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승전하게 됩니다. 사울이 맨 앞에 섰고 이제 다윗이 따르게 되고 그들이 전승하여 돌아오게 될 때 사람들이 훤화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 그 한마디에 그는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시기심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다윗이 얻은 것이 백성의 민심이다. 이제 다윗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왕좌를 얻는 것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의 마음속에 시기가 들고 의심이 들고 분노가 들었습니다. 그는 분노의 포로가 되어 그 자신과 나를 분노에 빠뜨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울의 마음에 조금만 여유가 있어 그 마음을 ‘아, 내가 천의 능력밖에 안돼도 내가 만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저 다윗을 내 신하로 거느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분노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것이었습니다. 나는 천밖에 능력이 안돼도 만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다윗을 내 신하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내가 저를 잘 대접하고 내가 저를 잘 활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그는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어떤 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중의 제일 우수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우수한 자를 뽑아서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는 제구사이의 즉 마차바퀴 밑에 숨어서 나는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고 시기심이 싹트기 시작했고 분노가 싹트기 시작하니 그는 결국 이와 같이 추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분노는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 여러분 민수기 20장을 보면 모세의 분노의 장면과 하나님의 징계의 장면이 나옵니다. 백성이 신광야에 이르러 가데스 지역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가 참 좋지 않을 때였습니다. 미리암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모세의 마음이 울적했어요. ‘그래도 내 누님일이야. 어렸을 때 나를 갈대상자에 담아서 나일강에 떠내려 보내 나를 이렇게 살렸던 내 누이 미리암이 그렇게 죽었구나’ 그 마음이 얼마나 울적했겠습니까? ‘같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좋았을 걸’ 그런데 그때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과 더불어 다투고 불평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죽였으면 좋았지 왜 우리를 광야에 데리고 와서 죽게 하느냐. 우리는 목말라 죽겠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반석에 물을 내서 먹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에게 물 좀 주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고 이와 같이 불평을 하며 달려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반석 앞에 서서 물이 나오라고 명령하여라 물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분노가 생겼습니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내 누이가 죽어서 장사를 치를 때인데. 그리고 전에도 반석에서 물을 먹어 본 사람들이 아니 어떻게 이렇게 얘기할 수 있나?’ 정말 분이 났습니다. 그런데 전에 출애굽기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야 네 지팡이로 반석을 쳐라 그래서 반석을 쳤더니 물이 났다 말이에요. 그래서 그냥 하나님의 말씀은 귓전에도 스치지 않고 분이 나서 그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두 번 후려쳤어요. 그랬더니 물이 콸콸콸 쏟아 졌습니다. 백성이 다 먹고 불평이 다 잠들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이 백성을 가나안에 들이지 못하리라.’ 모세의 사역을 거기서 끊어버리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반석에게 명하여서 물이 나라고 하였는데 너는 어떻게 분기탱천한 너의 분노를 가지고 반석을 두 번이나 후려쳐 백성에게 마치 징계를 하듯이 물을 내었느냐. 내가 너에게 말한 것은 무엇이고 너희 행동은 무엇이냐. 나와 너는 더 이상 관계없는 자가 아니냐.’ 하나님은 백성들을 위하여 물을 내긴 하였지만 모세에게 이와 같이 준엄히 꾸짖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가운데 정말 수고하고 애써서 가나안 목전까지 갔다가 한순간의 분노로 말미암아 거기서 추락하고 모든 것을 깨뜨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도 기껏 수고하고 분노관리를 못함으로 가나안 목전까지 갔다가 마지막 순간에 일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분노를 관리하는 영적 관리 시스템의 부재이거나 혹은 작동하지 않는 고장의 상태입니다. 내가 너무 자주 분노가 일어난다 그러면 내 영적인 상태가 저조하거나 혹은 내 영적인 기반이 빈약한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결국 분노를 낸다는 것은 사단에게 끌려 다닌다는 것입니다. 분노를 내는 순간 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분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령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어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멸망의 자리로 이끌러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데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나타내지만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겸손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허함과 인격적인 여유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15장 21절부터 보면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나안 여인이 자기 딸이 귀신들려서 너무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예수님 내 딸 좀 고쳐주세요.’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왔지 너를 위해서 오지 않았다.’ 예수님께 또 간청합니다. ‘좀 어떻게 고쳐주세요.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이 많지 않습니까?’ ‘자녀들에게 줄 떡을 개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 그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는 개와 같은 사람이다. 개와 같은 이방여인이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그 수욕을 참고 주님 앞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 떨어진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수욕을 참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시로 딸이 나았습니다. 수욕을 참는다는 것은 상대를 설복시키는 것입니다. 수욕을 참는 다는 것은 내가 상대방보다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내 내적인 자아세계는 그만큼 견고하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 4장 3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총독이 되어서 예루살렘 성도들과 더불어서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지 않습니까?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이 나타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희가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 한 마리만 올라가도 우르르 무너지리라’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일절 대구하지 않고 그 마음의 수욕을 참으면서 마음 들여 역사하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들여 역사하매 마침내 그 성이 완벽하게 이루어 진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에 그들이 분기탱천해서 당장 군사를 모집해서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들과 싸웠다면 이것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공정함으로 수욕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결과에 순종해야 합니다. 인생에 억울한 것 없다고 말씀드렸죠? 다 받을 대가받는 것입니다.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 대해서 너무 관대해서 그런 것입니다. 나는 그저 남에 대해서 받을 대가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수고하고 애썼는데 다른 사람이 애매하게 말해도 나는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 내가 뭔가 부족했구나. 내가 정말 저런 소리듣지 않도록 더 애써야지 내가 더 기도야지 내 기도가 부족 했나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정서상 믿음상 유익합니다. 핑계하기 시작하고 결과를 상대에게 전가하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한이 없습니다. 내가 받아야 될 대가를 정확하게 받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억울한 게 없습니다. 내가 사람에게 억울하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하세요. 자 우리 따라해 봅시다. ‘하나님의 손으로 축복하게 하십시다.’ 하나님의 손은 커서 하나님의 손으로 축복하게 하면 그 축복은 너무나 커요. 하나님의 손으로 거둬가게 하면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어지잖아요.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게 하셔야 되요.

우리는 따라서 정말 훨씬 좋은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부족한 말을 내가 여러 가지 가슴 아픈 말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음성으로 받아들여 내 자신을 개선하기 위해서 애쓰고 깨끗이 털고 새로운 진보의 지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결과를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견실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공정한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치러야 될 대가를 치룬 것입니다. 억울한 것 없어요. 하나님이 보고 계신데 우리에게 억울한 것 주시겠습니까? 있는 것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출발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노력과 애씀을 이루면 만약에 우리가 정말 억울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주의 역사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수욕을 참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무한한 진보의 지경을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수욕을 참을 때 우리에게는 억울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는 더 큰 은혜와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내 속에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됩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상대방의 진정한 용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삶의 지혜와 진정한 용기에 대해서 다시 성찰할 수 있는 은혜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리석은 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데요.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언제나 제어되기 어려운 인간의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영적 능력과 지혜로움 차이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의 본성은 언제나 널 뛰듯이 그저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이와 같이 죄악의 상태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의 상태를 어떻게 통제하느냐 이것은 영적인 능력과 지혜입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냉철함과 뜨거운 열정’ 이 두 가지는 우리 성도들에게 공존해야 합니다. 우리는 냉철하게 우리 자신을 늘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막 화가 났을 때 그 앞에서 냉철하게 딱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람에게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화내는 사람이 늘 진다는 걸 우리는 알잖아요. 우리는 나에게 어려움이 왔을 때 내 마음속에 상처가 된다고 생각할 때 정말 냉철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정말 탕자가 나에게 상처를 주는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인가? 정말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는가? 아니면 정말 내가 그와 같은 일을 했는가 생각해 보면 많은 경우에 내 부족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내 부족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면 그것이 우리를 좌절시키는 근거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진보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에 감정을 통제하고 영적인 능력과 지혜로 나를 이끌어 갈 수 있어야 됩니다. 일단 즉각적인 반사라는 것은 초보자의 것이에요. 한 템포 받아들여 숙성시키고 이후에 받아들여 숙성시키고 이후에 반응하는 훈련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그저 내게 어떤 감정이 탁 들어왔을 때 반사처럼 착 하고 튀겨 버리면 이건 언제든지 우리는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사고와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예상하고 책임지는 성숙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이 우리 입장을 생각해서 그 말을 들어줘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처참합니까? 다른 사람이 우리 입장 생각해서 우리 말을 그냥 들어주는 거예요. 참고 겉으로 얘기하지 않지만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에요. 여러분 우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대부분 사람들에게 이런 일을 행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가만있는 게 아니라 참아주는 거예요. 우리가 분노를 내고 우리 마음대로 감정 표출을 하는 것 감정 표출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그렇게 유익하지 않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쓴다면 우리는 감정관리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느낌관리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서를 관리해야 됩니다.

제가 우리 청년들하고 가끔 식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 우리 청년들이니까 제가 식사도 사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청년들하고 식사를 같이 할 때마다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얘기하고 밥 먹으면 제가 꼭 일어납니다. ‘아 내가 시간이 바빠서 가야 되겠어’하고 일어납니다. 그런데 거기서 안 일어나고 거기 계속 눌어붙어 앉아서 얘기하면 다음에 애들 밥사준다고 해도 오지도 않아요. 밥 먹고 딱 일어나야 됩니다. 목사님 시간돼서 가야겠다하면요 ‘목사님 벌써 가세요’ 그러죠? 안가면요 ‘왜 안갈까’ 기다립니다. 그리고 다음엔 오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절제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의 헤아리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우리는 그 관계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내가 절제하면 그 관계가 유지되는데 내가 절제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 관계는 오래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청년들과 앉아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건 어떻고 이런 얘기하면 다음에 질려서 오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내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어도 분노도 절제할 줄 알고 또 내 마음에 흘러가는 마음의 방향도 절제할 줄 알고 또 내 마음속에 하고 싶은 일도 절제할 줄 아는 이와 같은 느낌과 정서의 관리를 이룸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성도로서 자기 관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지혜로운 언어 관리입니다.
자 따라서 해 봅시다. ‘지혜로운 생각의 관리’, ‘지혜로운 느낌의 관리’, ‘지혜로운 언어의 관리’ 우리는 생각과 정서 즉 느낌과 언어 이 세 가지를 관리하는 마지막 언어 관리입니다. 미련한 자는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면 정말 무례한 사람이 있어요. 하고 싶은 말 다 합니다. 함부로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가지고 상대방 마음대로 찌르고 오늘 성경에 그대로에요.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함이라. 언어는 그 사람의 지적, 교양, 영적상태를 말해줍니다. 악인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말하고 선인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말하나니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말에 하나님의 은혜의 전부를 걸어도 우리는 정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언어의 관리를 해야 합니다. 속 시원한 말은 언제나 큰 문제를 야기하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원수를 만들어 나의 심령과 상대방의 심령을 바닥으로 추락시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게 만듭니다. 벌써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내 입에서 말이 나갈 때는 얼른 말을 접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 말을 그만두셔야 되는가 하면 상대가 내말을 한참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빨리 말을 그치셔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어떤 일을 이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내 말을 조심해야 됩니다. 자신에게 상처가 많으니 늘 비수 같은 말로 상대를 찌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상대를 칼로 찌름 같은 말은 속 시원한 말입니다. 그냥 그 말하니까 속 시원한 말입니다. ‘그냥 그 말 하니까 속 시원해요.’ ‘나 이 말해야 속 시원해’ 그 말은 상대를 찌르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자 따라서 해봅시다. ‘속 시원하게 살지 말고 좀 답답해도 참고 삽니다.’ 속 시원하게 해버리면요 그것 가지고 3년 동안 고생합니다. 속 시원하게 말해버리면 그것가지고 3년 동안 고생한단 것입니다. 여러분 하고 싶은 말 조금 참고 마음속에 꿀꺽 삼키고 소화해 버리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영적인 자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고 무엇인가 욕구불만에 가득 차 있거나 아니면 상대가 내 마음을 너무 불편하게 하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내가 환자상태에 있다는 것을 속히 깨닫고 내 자신의 내적 치유를 위해 속히 착수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불편한 것은 상대가 괴롭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환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환자라는 것 알면 조심하려 할 것이고 고치려고 애쓸 것이고 효과를 볼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환자라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하면 나도 망가지고 다른 사람들도 망가뜨립니다. 속 시원해질 것 같아서 비수 같은 말을 하지만 시간 지나면 내 마음은 더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인이 아닌데 상대방 마음 아프게 하고 오히려 기쁠 수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왜 선한 일 하고 내 것 나눠주고 다른 사람 위로하고 힘을 주면 우리 마음이 기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심정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비록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심정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든지 내가 하는 말이 결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예상되고 어떻게 책임을 져야 되며 어떤 유익이 있을까를 예상한 다음에야 말해야 합니다. 그저 내 마음속에 말이 술술나온다라고 생각하면 ‘야 실수하고 있다’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떤 말을 해야 될까 조심스러워지면 그때는 말하셔도 괜찮아요.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치료하는 약이에요.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 치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치유하는 말이에요. 지혜로운 자의 특징은 따뜻하고 힘과 용기를 부어주고 부족함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고 결국 마음을 치유하고 생활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치유에 도움이 되는 말은 자신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확히 잘 통제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끼며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날 컨디션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는데 컨디션을 능가하는 기본적인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아무리 어른이 힘이 없는 날도 어린이와 더불어 팔씨름을 하면 이깁니다. 기본 수준이 어린이보다는 강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기본적인 수준이 올라가요. 자 우리 따라합시다. ‘기본적인 수준을 높입시다.’ 살다보면요 엎치락뒤치락 좋은날 나쁜 날이 있습니다. 그 좋은 날 나쁜 날 합해도 결국 기본적인 수준자체가 높아져야 합니다.

또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주는 말입니다. 내가 속 시원해서 주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을 세워주는 말입니다.
언제나 화풀이로 꾸짖는 말은 변화를 못줍니다. 진정으로 가르치는 말이 변화를 줍니다. 비난하는 말은 변화를 못줍니다.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으로 아끼는 심정으로 충고 한마디가 변화를 이룹니다.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주고 힘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쩌다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 있고 지속적으로 그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두고두고 그 사람의 말을 생각하면 그 사람의 말이 내게 힘이 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흘러갈 말을 하지 말고 남을 말을 해야 합니다. 흘러가 없어질 말을 하지 말고 꼭 남아서 유익을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들의 말은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니 그 말은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지고 되새겨질 때마다 힘이 될 것인가 상처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힘이 될 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은 꼭 기억하세요. 영적인 언어생활을 하고 싶은 우리 마음의 각오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자 여러분 따라해 봅시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하나님께 하는 말입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에요. 내 집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에요. 내 주변에게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욕하고 그 사람에게 비난하고 그 사람에게 화내는 말 하고 그 사람에게 비수 같은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말입니다. 욕하면 하나님께 욕하는 게 되고 마음대로 말하면 하나님께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내 앞의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섭리하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상대가 피곤하고 환자상태이고 어려움에 빠져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절대로 순간적으로 베풀어서 순간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구히 영향력을 미치고 남아서 끝까지 함께 갑니다. 우리 이전에 또 했던 말 한마디 때문에 한참 내가 모든 일을 결정적으로 이루어야 할 때 그것이 화근이 되어 무너지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말 한마디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도 하고 욕되게도 합니다.

결국 마음의 각오 훈련 신중함 그리고 내 생각의 기본이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함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인격과 삶의 작품은 말과 생각과 말의 결과인 생활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이루면서도 말을 못하면 그 행동은 또 빛을 잃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이렇게 해보십시오. 다른 사람 열심히 도와줬어요. 정성으로 수고하고 애썼어요. 그리고 나서 그 일을 다 마치고 나서 이렇게 말했어요. ‘저렇게 도와줘 봤자 소용도 없어. 사람 은혜도 몰라.’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기껏 수고하고 그 말하면 상처만 더 끼치는 것이고 마음만 더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런 말 입 밖에 돌더라고 그저 꿀꺽 삼키고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해봅시다. 우리 하고 싶은 말 대신에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말로 바꿔 버리면 우리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좀 부족해도 ‘죄송합니다. 좀 부족했는데 제 능력이 이것 밖에 안됐습니다. 제가 좀 더 노력하고 애써서 다음에 더 잘 해드리겠습니다’ 하면 소망과 기대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라는 것은 우리가 천국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떠나도 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된 보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누립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만끽하며 누리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은 것처럼 우리의 생활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믿음으로 승리해야 되고 내 인격을 가다듬음에도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 이제까지 그렇게 애틋하게 애써도 못 이뤘기에 우리는 속상하지요. 하지만 다시 생각하고 다시 수고하는 애씀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영적인 수고를 해서 어떤 것을 이룬 게 믿음이 아니라 내가 영적인 수고를 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에요. 결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일을 이룬 자는 여호와시라’고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믿음대로 살려고 바둥대는 게 믿음이지 결과가 믿음이 아닙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비록 그렇게 못해도 내가 그렇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게 믿음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늘 대하는 모든 성도들 그리고 늘 대하는 모든 식구들을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을 관리하고 정서, 느낌을 관리하고 말, 언어를 관리하여 하나님 앞에 지혜로운 자기 관리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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