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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매니아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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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좋은 것을 선택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어느 옷을 입을까? 이 옷이 좋을까? 저 옷이 좋을까?
출근할 때는 어떤 길이 막히지 않고 잘 뚫릴까? ‘이쪽 길일까? 저쪽 길일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잘못 선택하면 손발이 고생합니다.
회사에 가서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또 점심시간에는 어떤 음식을 먹을까? 냉면을 먹을까? 자장면을 먹을까?
또 시장에 가면 물건을 때에도 이것이 좋은 것인가 저것이 좋은 것인가 자세히 따져보고 물건을 삽니다.
이러한 선택은 어떻게 보면 조금은 가벼운 선택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 상대자를 선택해야하는 문제는 너무나 신중하고 중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어느 대학을 선택하느냐하는 문제는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하면서 이 사람과 계약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결정하는 문제들도 참으로 중요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광고카피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할 때 순간순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말씀하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선택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 11장 26절에서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11:2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복과 저주로 엮어져 있습니다. 지키면 복을 받고 버리면 저주를 받는다는 선택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너의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라고 주께 늘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선택이 나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이 가정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한 촌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기 마을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자기의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르다는 예수님께 좋은 것을 대접하기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준비할 것이 많은 마르다가 마음이 분주하여 예수님께 나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2)

여러분 마르다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일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봉사할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마르다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마르다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하면서 자기만 일하고 다른 사람이 일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이것이 마르다의 단점이었습니다.

여러분 봉사하다보면 때로는 자기만 일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안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괜히 불평이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일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열심히 전도하는데 왜 다른 사람은 전도하지 않는 것일까? 왜 나는 열심히 기도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다가 원망하게 되고 불평하게 되고 결국 미워하게 되는 것 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일하면서 시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하면 좋겠죠? 그러나 혼자 한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내가 한다고 다른 사람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할일이 있다면 내가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일이 있겠지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일한다고 하면서 불평하는 사람은 교만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 혼자 일하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내가 하는 일도 중요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전부처럼 생각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개성이 있습니다. 각자의 은사가 다릅니다. 그리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다른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사역들을 존중하고 인정하십시다. 이것이 바로 좋은 것을 선택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하다보니까 염려하게 되고 근심하게 되고 결국 짜증이 나고 불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많은 일보다는 한가지만이라도 기쁨으로 하는 것이 좋은 선택입니다.
팔방미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를 두루두루 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팔방미인은 배고프다.’라는 말을 어른들이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 보니까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게 되고 그러나 보니까 분주하기는 하는데 실속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저도 좀 그런 측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운동이면 운동, 레크레이션이면 레크레이션, 또 찬양이면 찬양, 노는 것이면 또 노는 것…
그래서 그런지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한가지만이라도 확실하게 배워 놓을 걸!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는 한 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설교입니다.
저는 여러 가지 다 잘 하려고 하다보면 두 마리의 토끼를 다 놓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라도 확실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잘 하는 목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잘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십시오. 그렇다면 그곳에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전문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저희 노회에 증경 노회장님의 자녀가 스타그래프트 팀풀의 황제라고 부르는 심소명이라는 형제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목사의 아들이 무슨 게임머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우물을 계속 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스타그래프트의 팀풀에서는 황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형제의 십일조가 아버지의 십일조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형제의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학생들도 있다고 합니다. 전주 토요일에 게임한다고 해서 보니까 심소명형제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매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하나님 이기게 해주세요.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여러분 우리가 여러 가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으면 좋은 일입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고 실망하지 마시고 주님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무엇일까? 교회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가운데는 조금 일찍 오셔서 건물 앞에 지저분한 것을 휴지들을 줍고 교회 주변을 청소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모닝글로리에서 그 모습을 참 좋게 보셨고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작은 일 하나에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큰 것을 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충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않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일하는 일보다보다는 예수님 발아래서 말씀을 듣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머무르면서 예수님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기 보다는 예수님 자체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마리아는 예수님 매니아입니다.

여러분 자동차 매니아는 온통 관심이 자동차에 쏠려 있습니다. 그래서 모터쇼를 한다면 열일을 제쳐 놓고 흥분된 마음으로 모터쇼를 보러갑니다. 그리고 길을 지나가다가 희귀하게 생긴 차를 보면 저절로 시선이 고정됩니다. 그리고 자동차에 대한 정보, 자동차에 대한 잡지,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저절로 걸음을 멈춥니다.

낚시 매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낚시 갈 수 있을까?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낚시 이야기를 꺼내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열변을 토합니다. 조금만 경제적인 여유가 되면 더 좋은 낚시 대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낚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즘 각종 매니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에 매니아입니까?

마리아는 예수님 매니아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마리아는 자기의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요 11:2)

매니아가 무엇입니까? 적당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푹 빠진 사람을 말합니다. 한 곳에 미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푹 빠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푹 빠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발아래 머물면서 한순간도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 매니아였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6장 24절에 보면 베스도가 바울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든 유익하던 것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고백하였습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서 죽네.

이태리가 낳은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예수님 매니아였습니다.
그는 43세 되었을 때에 이태리 밀라노의 성당에서 예수님의 최후 만찬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 받았습니다. 그는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서 ‘최후의 만찬’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열두제자가 양쪽에 앉고 중앙에는 예수님이 오른 손에 잔을 들고 계시고 그 좌우에 여섯 명씩의 제자들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작품이 완성되자 절친한 친구를 불러서 그림을 보여주며 평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림을 본 친구가 깜짝 놀랍니다. 최대의 걸작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는 특별히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있는 은컵이 너무 섬세해서 그 컵에서 눈을 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붓을 들어 컵을 지워버렸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떤 것도 시선을 끌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컵을 지우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매니아는 다른 것 안보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매니아는 예수님만 보입니다. 예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설레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 전에도 “구속만 주 만 보이도다.”라고 찬양한 것처럼 이 세상과 나는 간 곳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 매니아입니다.

저는 우리 아름다운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매니아되기를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7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신앙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 15절과 16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미치도록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사나 죽으나 나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을 위해서 살리라” 찬양하며 예수님께 푹 빠져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함께 찬양하며 주님께 사랑을 드립시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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