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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신앙 자가진단 (고후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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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은 중고등부와 장년부 수련회를 은혜가운데 마쳤습니다. 중고등부는 국내 순교자 기념관들을 중심으로 순례하면서 청소년 시절의 비젼을 키웠습니다. 이들을 인솔한 전도사님과 교사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장년부 수련회도 참 은혜롭게 가졌습니다. 수고하신 전도사님과 진행팀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이번 수련회에서는 중고등부에서도 장년부에서도 에니어그램 성격검사를 했습니다.

사람의 체질도 몇가지로 나타나 한의원에서 약을 지을 때에도 그런 체질에 따라 약을 처방하듯이 우리의 성격도 심리 상태에 따라서 9가지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격을 1-9유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는데 1차적인 목적이 있고,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고 돕기 위한 2차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교회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모습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서로가 인식하고 서로를 더욱 잘 도와 하나님의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나가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검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검사를 해 보고 난 후 우리는 모두 즐거웠습니다. 우리의 장단점들이 유형별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 대부분이 긍정하면서 우리들의 다른 점들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마음이 되고 한 뜻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즘은 예방의학이 발달하여 병적인 증상이 없어도 건강 검진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병원에 가기 전에 스스로 건강상태를 검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가진단이라 합니다. 이 자가진단은 아직 증세가 나타나기 전에 검진하는 것이어서 초기상태에서 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암의 특징은 꼭꼭 숨는 것입니다. 숨었던 암이 자각 증상이나 진단을 통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크게 전이되었거나 문제가 심각해진 뒤라는 것입니다. 숨어있는 암을 찾아내는 것을 조기발견이라고 합니다. 조기발견만 되면 거의 완치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유방암 자가진단, 건망증 자가진단, 우울증 자가진단. . 예를 들면 자꾸 슬퍼진다. 스스로 실패자라는 생각이 든다. 앞날에 대해 비관적이다. 일상생활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죄책감을 자주 느낀다. 등등 . .

그런데 자가진단은 육체적인 질병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함에 있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했습니다.
그러면 영적 건강을 위한 자가 진단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라(5)

우리의 믿음이 시험에 빠지면 안되지만 시험해 봐야 합니다. 시험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점검입니다. 학교에서 학기말이 되면 기말고사를 봅니다. 어떤 학생은 낙제 점수를 받고 어떤 학생은 좋은 점수를 받습니다. 점수가 나쁜 학생은 선생님으로부터 책망을 당하고 부모가 불려 가는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리고 재시험을 보기도 합니다. 신앙의 시험에서도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 말속에 믿음이 있는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섭섭 마귀가 들어가서 앉기만 하면 대화 중에 믿음 이야기는 하나도 안 나오고 섭섭한 이야기와 잘못을 지적하는 이야기만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 행동 속에 믿음이 있는가? 내 생각 속에 믿음이 있는가? 내 계획 속에 믿음이 있는가? 믿음만이 모든 환난에서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이 유혹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해외여행을 하려면 여권과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비자는 여행가고자 하는 나라의 입국허가증입니다. 해외여행자는 반드시 여권과 비자를 챙기듯이 우리들은 믿음 위에 서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 입국 비자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선행이나 공로나 수양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믿음이라는 비자가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도의 자격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에도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옛날에 증자는 하루에 3번씩 자기를 살폈다고 한다.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암 부드도 하루에 3번식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자기를 성찰하며 믿음을 시험해 보면서 믿음을 검진하여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나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남을 알고 자기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라고 했는데, 자기를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내 능력을 알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알고, 육신의 건강상태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영적 상태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한 칼럼니스트가 유명한 석학에게 물었습니다. “현대인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십시오.”
이에 석학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현대인은 우주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또 더 모르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탈레스(Thales B.C 624-546 그리스 고대 철학자) 도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오.” 라고 말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는 “타인에게 충고하는 것이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안될 때에 다른 사람이 문제인 것으로 항상 생각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자신입니다. 자신이 문제입니다. 자신을 잘 아는 것은 그만큼 성공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한 신비스러운 보자기를 쓴 어떤 물체에 의해서 끊임없이 추격과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돈을 많이 모으자마자, 그 보자기 쓴 형체는 그에게서 이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또한 그가 평화와 즐거움에 못 견뎌 한잠 자려고 하면, 이 형체는 또 나타나서 그의 마음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채워 주었습니다.

그가 명성을 얻었을 때에는 이 형체가 나타나 그의 평판을 가져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어떤 위대한 기회에 문 앞에 서서 들어가려고 할 순간에 이 괴물은 나타나서 문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 마침내 그가 결혼식의 제단 앞에 서서 그의 신부의 손을 잡고 신성한 맹세를 하려는 순간에, 이 괴물은 또 다시 나타나서 그의 손을 펴 들며 “이 결혼은 성립될 수 없다”고 반대하고 고함을 지릅니다. 격분한 나머지 이 사람이 그 반대자요 원수에게 대하여
“도대체 너는 누구냐?” 하고 손을 들어 그 괴물의 얼굴에서 보자기를 벗기고 보니 놀랍게도 그는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곧 인간은 자기가 자신의 가장 큰 원수요, 반대자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안다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을 다스려 나간다는 것도 참 어렵습니다.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삶의 모든 문제의 승패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남과의 싸움인 동시에 우리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플라톤(Platon, BC 427-347)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 인간 최대의 승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똑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똑바로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 죽으신 구세주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자니라” 했습니다. “시험” 이라는 단어는 ‘되돌아 보다’, ‘성찰하다’의 뜻을 가집니다. 이 말의 뜻은 남을 평가하고, 정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믿음 안에 바로 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점검하는 데에 있어서 점검표가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점검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1) 그리고 여러분 예배를 얼마나 소중히 드리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고 있습니까? 온전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세로 하루를 온전히 드리십니까 아니면 예배 한 번으로 땜질을 하고 계십니까? 많은 경우 적당한 핑계를 대서 오후예배마저도 빠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러 갈 때, 결혼식장에 갈 때 만큼 시간에, 몸가짐에 신경을 씁니까? 예배는 하나님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6:21에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임원을 선택할 때도 십일조를 드리는지, 감사헌금을 드리는지, 절기헌금을 하는지, 교회 건축에 참여하는지 확인합니다. 그것을 왜 합니까? 액수를 보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왜 확인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것이라고 구별한 것을 얼마나 구별했는지 우리 자신은 한번 점검해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선행을 시험해야 합니다.(7)

믿음의 공동체 교회는 본질적으로 봉사의 공동체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는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하여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일을 주의 이름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기쁨으로 감당했던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영적 파워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성장한 교회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포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공원묘지에 가보면 한국을 위해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들의 묘비들이 모여 있습니다. 묘비명들을 보면 매우 감동적입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H.B.헐버트)는 묘비명도 있고,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R.캔드릭)는 묘비명도 있습니다.

지난 장년부 수련회 결단의 시간에 “당신의 묘비명에 어떤 글이 남겨지기를 바랍니까?”라는 항목에 기록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참 두려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뭐라고 기록했습니까? 또 뭐라고 기록되시길 원하십니까?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는 한국감리교의 첫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님의 따님 엘리스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이 거기 묻혀 있습니다. 첫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님은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해서 침몰할 때 순직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일단 육지까지 헤엄쳐 나왔는데 한국어 통역요원이 아직 나오지 못한 것을 구하러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 딸도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주로 이화학당을 위해 많은 일을 하다가 순직해서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이 분의 묘비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봉사해야 합니까?
교회는 일을 찾아서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억지로 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우리가 자원하여 기쁨으로 하는 곳입니다.
대접받으려고 봉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말고 봉사해야 합니다. 생색내려고 봉사하지 말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정신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희생적인 정신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정신으로 봉사하면 그 봉사가 즐거운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봉사하면 그 봉사는 무거운 짐이 됩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주부는 일찍 일어나서 밥하는 것, 와이셔츠 다리는 것,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일하면서도 피곤을 모르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같은 일을 하더라도 불평을 하면서 힘들게 하게 됩니다.
교회 주방에서도 기쁨으로 하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사들, 성가대원들, 교사들, 속장님들, 직무 맡은 분들, 모두 . .

우리가 예배드리는 대상과 봉사로 섬겨야 할 대상이 다를 뿐이지, 사실은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봉사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빠지면 성도로써의 참된 봉사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작은 소자에게 하더라도 . . .

벧전4:10-11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봉사를 할 때 성령의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봉사해야 합니다. 봉사는 내 지식의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경험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봉사할 능력을 주시옵소서. 힘을 주시옵소서. 도와주시옵소서.”

또 봉사하면서 불평이나 원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원망 없이,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면서 대가를 바란다면, 참된 봉사라 할 수 없습니다. 인정이나 칭찬을 받으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봉사가 주님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오직 주님만 드러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했는데 왜 안 알아주느냐?” “너는 한게 무엇니냐?”고 말한다면 진정한 봉사라고 말할 수 없다느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드러내려고 봉사한다면 교회나 성도는 언제나 봉사를 통해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야 참 봉사인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모든 사람이 똑같은 봉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봉사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은사대로 일하면 모두가 다 즐겁습니다.

은사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찬양을 하는 것이 아무리해도 즐겁기만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은사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것이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청소하는 것이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 은사를 감사하고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봉사하다가 어려움 겪는 분들이 있습니다. 식당 봉사하다보면, “반찬이 짜네. 국이 싱겁네 . . . . ” 이런 말을 들으면 짜증이 날 수 있습니다. 주차관리를 하다보면 “저 안쪽부터 주차해주십시요”라고 부탁면 짜증을 부리면서 자기가 일찍 빠져나갈려고 앞자리에다가 주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때면 짜증이 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갈6:9절 “우리가 선을 향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인내의 봉사가 있습니까?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를 얼마나 도왔는가? 를 점검해야 합니다.

목회자를 돕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아멘’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한다고 했습니다.(살전2:13)
세우신 주의 사자를 통하여 예배 중에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 그것이 목회자를 돕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서도 말씀을 듣지 않고, 아멘하지 않고, 순종치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목회자에게는 기쁨이요, 감사요, 의욕이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 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고 했습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순종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거부하고 하찮게 여기는 자가 있는데 이런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목회자를 돕는 것은 ‘아멘’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목장에 있는 양들이 있는데 가장 좋은 양은 어떤 양이면 가장 나쁜 양은 어떤 양이겠습니까? 좋은 양은 목자를 잘 따르는 양입니다. 나쁜 양은 말을 안듣고 엉뚱한 곳으로 나돌아 다니는 양입니다.
또 목회자를 돕는 것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자신의 것을 다 드려서 도왔다고 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벌써 2005년 후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고 영적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하게 하여 그리스도를 닮고 성숙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임 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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