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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815광복절 60주년을 맞이하여]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신 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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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는 구수한 호남 사투리로 우리에게 웃음을 주었던 미즈노(전 전남대 일문과 교수)씨가 믿기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극우잡지 사피오(SAPIO)에 쇼쿤, 겐다이 코리아에 노히라 슈스라는 필명으로 수차례 한국을 비하하는 글을 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주장은
① 한류는 미친 짓이다(영화배우 배용준)
② 북한에 농락당한 멍텅구리 한국 드라마
③ 한국 왕인 가야 유적 날조
④ 한국 지자체 교류 못마땅
⑤ 일한 우호기대는 일본의 짝사랑 등 대충 이러한 줄거리입니다.

미즈노씨가 한국에 대해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태어나서 학습능력이 있을 때 부터 한국에 대해 그렇게 배워 왔기 때문입니다. 예측컨대 일본에 있는 미즈노(38세)씨 후배들은 미즈노씨보다 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체험한 시대는 상대 평가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학습된 역사는 학습에 대한 절대적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기 때문에 향후 일본인들은 한국을 더욱 비하할 것입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어 23만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지난 8월 6일 오전 10시에 히로시마 참사를 기념하는 행사에 유독히 어린 소년 소녀들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이들은 이 날을 잊지 말자고 몇 번이나 되뇌었습니다. 그리고 원폭의 잔해들을 침묵 속에 전세계에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우리와는 대조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Ⅰ. 일제 식민지 시대의 근대화 정책의 허구성입니다

한국기독교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한국교회 역사를 통시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종교정책을 이해할 필요를 가집니다.
미국 장로교 외국 선교사회의 총무였던 아더 브라운(Arthur Brown)이 재미 일본 대사관에 쓴 편지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일본통치는 한국이 다른 나라에 통치되는 것보다 훨씬 낫고 또 한국이 자기 손으로 다스리는 것보다 더 낫다고 썼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의 태도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입장을 대변할 뿐 아니라 당시 한국 교회의 공식적인 견해이기도 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종교정책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나머지 한국 교회 발전에 유익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최근에 식민지 근대화론과 영합해서 일제 식민지 통치 시대를 통하여 한국 교회가 한층 더 선진화하는데 기여했다고 하는데 통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근대화론 자들은 현대 한국의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기원도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이 시도하고 있는 소위 근대화론 내지는 개발론은 일제와 그 집행기관의 하나인 구 일제 조선총독부와 일제의 식민지 관료들이 일제 36년동안 계속해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설득하여 주입해 왔던 이야기들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말하기를 한 민족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제대로 독립국가를 영위해 본 적이 없는 타율성이 지배하는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민족 스스로는 근대화할 능력이 없는 민족인데 일본이 식민지로 품어 안아서 근대화를 시켜 주었으니 크게 감사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제의 농간입니다. 우선 근대화에 대하여 사회학적으로 그 골격만이라도 정의해 보면 근대화란
① 정치적으로는 독립한 국가가 전제 군주제를 입헌 대의 국가로 근대 국가론의 체제 변화를 하는 것입니다.
② 경제적으로는 중세적 경제 조직과 생산방식으로부터 산업자본주의 공업화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③ 사회적으로는 전근대 신분제 사회로부터 시민권을 가진 국민들의 근대시민 사회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④ 문화적으로는 특권 귀족층 중심의 귀족 문화로부터 일반 평민 중심의 근대 민족문화로의 변혁적 발전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정치적 근대화가 나타난 곳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중국 상해에서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습니다. 일제 식민정책은 임시정부를 적으로 규정하여 파괴하는 공작을 강행했으니 일제가 한국의 정치적 근대화를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경제적으로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은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한반도의 50.4%를 일제 총독부 소유로 무상 수탈하고 한국 농민의 권리를 소멸시킨 정책이었습니다. 일제의 소위 공업화라는 것도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군수공업 병참기지를 함경남도 장진군 부전호 부근에 설치한 것에 불과 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이 시설은 군수공업이었기 때문에 전리품으로 소련이 뜯어갔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시민의 기본권인 생명과 신체의 자유, 재산 소유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참정권, 시민저항권 등 어떠한 국민적 권리도 한국인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제 식민치하의 한국인은 무권리한 노예 상태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문화적으로는 일제의 식민 정책에 의해 민족 문화의 근대화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민족문화 말살 정책이 조국 산하 전역에 걸쳐 교묘하게 자행되었던 것입니다.

Ⅱ. 천황제 국가의 보존 수단과 주권 찬탈 의 수단으로서의 종교정책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종교정책은 천황제 국가 특유의 정책이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1868년 3월 15일에는 전국의 모든 신사를 신지관에게 소속시켜 국가가 장악하도록 하고 4월 21일 신지관을 임명함으로서 신도국교화의 체제를 완비했습니다.
천황이 지배하는 국가는 일종의 신성 가족 국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신도는 이러한 천황의 신성불가침성인 혈통 카리스마의 순수성과 신성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도구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헌법은 국가신도를 철저히 국가 의례를 주관하는 제도로 범주화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타 종교를 국가의 신성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그 통치에 순복하는 교화 수단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1914년 8월은 일본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때였습니다. 이러한 대외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총독부는 2개 사단 병력을 상주시키는 등 한국 내에서의 병력을 증강했습니다. 일본은 동맹국인 영국이 독일과 교전 상태임을 들어 1914년 8월 23일 독일에 대한 최후 통첩을 했습니다. 그리고 태평양 독일령 군도와 산동반도 남단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극동에서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제의 패권주의적 침략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1915년 1월 18일 중국에 대한 일본의 21개조 요구에서 나타났습니다.
일제는 종교적 통치가 일본이 요구하는 쪽으로 장악되어가자 서서히 자신들의 국채의 우월성을 교화하는 국가 신도를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와서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사를 창건하는 저들의 솔직한 의도는 일본을 한국에 이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조상신을 우리의 조상으로 삼아 황민화를 달성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신사의 창건과 함께 1915년 1월 총독부 훈련 2호로 공포된 교원심득(敎員心得)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황민화 정책의 의도를 일상적 교육 현장에 있는 교원들에게 주입하여 자라나는 세대에게 완전히 일본인으로서의 정신 개조를 할 목적으로 제정 발표된 것입니다.
결국 일제는 한국의 주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신사를 세우고 한국 교회를 무력화하겠다는 의도를 들어낸 것입니다.

Ⅲ. 신사참배 강요와 종교정책입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 36년간 한국교회는 무수한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본격적인 박해는 1936년부터 1945년 어간에 일어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였습니다.
183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장에 거류하게 된 일본인들이 그들의 거주지역에 소규모의 신사를 건립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합방 2년후인 1912년부터는 조선 총독부가 한국에 신사의 건립을 계획했습니다. 마침내 1918년에 서울 남산에 조선 신사건립을 착수하여 1925년 조선 신궁이라는 이름의 신사를 완공했습니다. 이때부터 신사참배 강요는 공식적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국채는 만고불변의 국가이고 절대 불패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섬기는 것이 신으로부터 온 대도라고 선전했습니다. 또, 이 대도를 따르고 나타내는 일정한 양식의 건물이 곧 신사이고 이곳은 신령을 모시고 제사하는 장(場)입니다.
1931년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면서 천황제를 배경으로 군국주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앞세우기 시작했습니다. 1936년 남차량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① 국채명칭과 경신사상 함양 ② 선만일여 ③ 교학진작 ④ 농공병진 ⑤ 서정쇄신이란 5대 지침서를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천황제의 견고한 확립과 영토확장을 꾀하기 위하여 황민화 정책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강요했습니다. 그들은 면(面)에 1개의 신사 설립을 적극 추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조선어 대신에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고 창씨개명, 전시정신 함양, 시국체제 확립에 분주했습니다.
이러한 신사참배 강요 의도는
첫째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정신무장을 꾀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는 일제 무단정치의 권력 유지의 방법으로 황국신민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함입니다.
셋째는 한민족의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내선일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넷째는 신앙자유를 유린하는 종교적 침략 행위이며 나아가 기독교 말살 정책으로 전개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패권주의를 앞세운 일제는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학생들은 이것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1932년 1월 전남 광주지역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를 개최하고 학생들을 참석하도록 하였으나 기독교계 학교가 이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평양지역에서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를 개최했습니다. 이 때 기독교계 학교도 참여토록 도지사가 공식 통첩을 보냈으나 숭실전문 학교를 위시한 10개의 기독교계 학교가 불참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기독교계 학교에 사찰을 강화하고 노골적인 탄압을 가했습니다.
일제가 이러한 강경책을 쓰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조류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제의 의도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간의 분열을 조장하고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시킴으로써 식민지 교육을 본격화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일제는 신사참배 강요를 논리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총독부의 강경한 태도에 안식교의 의명학교 교장은 신사참배를 하기로 굴복하였으나 숭실학교의 맥큔과 숭의여학교 교장 스누크(V. L. Snook)는 끝까지 거부하여 이듬해 1월 교장직에서 파면됩니다.
일제는 일반인에게도 신사참배와 신도적 행사를 적극 장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제는 산간, 벽지, 면단위까지 신사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파출소, 주재소 등 관공서나 학교에 신궁대마를 넣어두는 간이 신사라 할 수 있는 가미다나를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사는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에 근거하여 천조대신과 종신들을 신사에 모시고 천황을 현인신으로 섬기는 민족종교입니다.
일제 명치유신 정부는 현대 국가 건설이라는 명분에 맞도록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리고 信敎의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함께 일제의 종교 행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신교의 자유화에 따라 일본의 신도도 다른 종교와 같이 강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신도를 계속해서 강력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도를 신교의 자유화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도신사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법적으로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도신사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내무성 신사국에 속하게 하고 국가의식 또는 국민의례에 지나지 않으므로 국민은 의무적으로 참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간악한 술책에 지나지 않으며, 신도신사 그 자체가 바로 우상 숭배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일본정부는 소화 13년 9월에 종교단체법을 공포하여 종교통제 정책을 실시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그런 몰지식한 짓을 하면 안녕 질서를 어지럽게 하고 공익을 해치는 자이므로 종교 단체법에 의해서 처분하고자 한다'고 종교국장은 국회의 질문에 의기양양하게 답변했습니다.

일본 문무성 종교국은 이 종교 단체법에 의해서 신사신도를 전 국민에게 강요할 방침을 세우고 시달했습니다. 따라서 신사참배가 종교행사가 아니라는 명목 아래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신도인이 되게 하려 했습니다.
일제는 신교의 자유에 따라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국민의례라고 위장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신도이념으로 천황을 중심한 국민의 단결과 황국신민 운동을 목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명치 헌법상의 신교의 자유는 사실상 정권과 상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습니다. 그것도 국가의 통치 행위에 도움을 주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습니다.
이 원칙이 철저히 한국교회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일제의 종교정책 방침은 일차적으로 정권에 의한 교권의 보호를 약속하고 그 대신 교권은 정권의 지배 정당성 논리의 교화를 담당하는 기구로 작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천황제 국가가 요구하는 氏子적 소명의식에 충실하고 선량한 신민으로 모든 한국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황민화 정책입니다.
일본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할 줄 몰랐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황도 기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권에 대한 정권의 지배 정당성이 가시화된 것입니다. 그것을 일제가 종교단체법에 따라 문무대신이 교회정치와 교리에 대한 비토권과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안녕질서를 해하고 국민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자나 그렇게 가르치는 자에게 가벌할 것(제16조, 26조)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의 의무는 궁성요배, 신사참배를 의미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종교단체는 면허를 박탈당하고 목사는 그 직을 빼앗겼습니다.

Ⅳ. 신사참배 거부 운동입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일제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조직적인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신앙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운동이었습니다.

1) 민족정신의 배경입니다
일제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민족주의자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민족주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성경 정신에 그 뿌리를 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민족을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내제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2) 성경적 배경입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제 1, 2 계명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3)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4) 앞서간 성도들의 한결같은 신앙의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5) 순교에 대한 열정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한 말씀이 저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전 K대 명예교수인 H씨가 일본의 우파잡지 세이론(正論)에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는 불행 중 다행이라는 요지의 글을 기고해 국민들을 격분시켰습니다. 그는 만약 한국이 당시 러시아의 식민 지배하에 있었다면 더 불행해졌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민족 분산 정책으로 한민족이 뿔뿔이 헤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한국의 매스컴을 할멈(정신대)들의 행동과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기사를 열심히 보도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일제의 대변인이 나타났나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일본의 패권주의 야망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급부상하는 8·15 야스쿠니 신사참배로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이즈미는 2001년 취임 첫 해에 8·15 참배를 강행하려다가 후쿠다야스오 관방장관이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8월 13일로 당겨서 했습니다. 2002년에는 4월 21일 야스쿠니 신사봄대제 첫 날에 맞춰서 했습니다. 2003년에는 1월 14일에 새해를 맞아 전몰자에 참배한다는 명분으로 했습니다. 2004년에는 1월 1일 새해 첫 날 신사참배하는 일본의 전통에 맞춰서 했습니다. 2005년에는 8·15일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종전 60년이 지났는데 언제까지 주변국의 눈치를 봐야 하느냐는 논리입니다.
A급 전범 도조 히데키의 손녀 등은 방송에 나와 공공연히 8·15 참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자민당 소장파 의원 116명은 지난달 38일 야스쿠니 참배를 지지하는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합사되어 있는 A급 전범 때문입니다. 전범을 참배하는 것은 침략전쟁을 합당하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 당사국들이 용납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야스쿠니는 전사들을 추모하거나 애석하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전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야스쿠니 참배는 일제의 지배 정당성을 찬양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긍지의 방문입니다. 야스쿠니는 저들의 강력한 천황지배 이데올로기가 낳은 실증입니다. 전쟁시에 병사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며 자랑스럽게 죽어갔다고 합니다. 야스쿠니 정신은 일본 청소년들의 수업에 무섭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철저한 전범적 자기 반성이 없이는 왜곡된 그들의 과거사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작금에 일본의 태도가 이러할 찐데 일제강점기의 저들의 잔인성과 지배국에 대한 우월주의를 다시 거론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강 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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