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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는 그리스도인 (느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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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종 사람은 스프링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만 놔두면 작게 오므라드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죠. 될 수만 있으면 편하게 자기중심으로 살고 싶은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광복60주년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생존하기에도 바쁘고 힘겨운 일상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 별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죠.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좀 힘들더라도 이런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사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광복60주년이 민족 앞에서 나의 삶의 태도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의 모습은 우리에게 사뭇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느헤미야는 그리스도인이 민족과 시대문제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갖고 살아야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물론 한 걸음에 느헤미야처럼 될 수는 없겠죠. 그렇더라도 마치 큰 바위 얼굴을 마음에 품듯 그를 우리 마음에 아름다운 이상으로 확연하게 새겨 경주를 아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느헤미야, 그는 어떤 인물입니까?

1. 그는 안정된 삶을 살았지만 민족의 형편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1-2, 11b)

느헤미야는 도성 수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바사 제국의 수도입니다. 그는 왕궁에 거주하면서 아닥사스다 왕 곁에서 가까이 섬기는 신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워싱톤 백악관에서 일하는 대통령 측근인사라고 할 수 있겠죠. 그는 왕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왕에게 술잔을 받들어 올리는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왕이 그의 안색을 살필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2:2). 이만 하면 당시 약소국이며 바사 제국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의 백성으로서 크게 출세한 셈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안주를 거부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동족에 쏠려 있었습니다. 때마침 느헤미야의 형제 중에 하나인 하나니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유다에서 왔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붙들고 포로됨을 면해 이스라엘에 남겨진 동족 그리고 예루살렘 형편을 묻습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하면 이는 매우 부질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안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바사 왕의 술을 맡아 관리하는 입장에서 속국인 자기 민족의 어려운 형편을 역전시켜볼 가능성은 상식적으로 매우 희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고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그의 가슴에 끌어안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느헤미야처럼 이렇게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물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은 고금을 막론하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먼저 자신과 가정을 건강하게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안주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까지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관심의 폭을 넓혀 가기 위해선 소시민적 일상에 집착하는 우리 시대의 거대한 흐름과 소위 맞짱을 떠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대세는 관심의 폭을 될 수 있는 데로 좁히는 것입니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가정의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쟁취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에 영국의 고전경제학자 아담 스미스가 기여한 바가 매우 크죠. 그는 그의 역작 『국부론』이라는 책에서 각자가 자기만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결국 공익을 극대화하게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죠. 경제적 이기주의에 대한 도덕적 부담을 한방에 날려보내는 그럴듯한 논리입니다. 물론 이타성과 함께 인간의 중요한 본능을 구성하고 있는 이기성을 감안할 때, 100% 틀린 주장은 아니죠. 하지만 이 이론은 경제적 이기주의가 가져오는 심각한 폐해를 너무 간단하게 포장해버리는 오류를 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담 스미스의 사상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현대인들을 살벌한 생존경쟁의 장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현장을 살아가노라면 민족의 고통이 어떻고 민족의 장래가 어떻고 하는 것은 참 한가한 짓처럼 보입니다.

한편 내가 민족의 고통을 끌어안은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패배주의적 좌절감이 현대인들의 관심의 폭을 갈수록 좁혀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눈엔 민족문제를 놓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은 살만하니까 말장난을 즐기고 있거나, 현실을 망각한 채 망상에 사로잡힌 철없는 낭만주의자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슬픈 일은 그리스도인들마저 이 거대한 흐름에 쓸려 내려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과 신앙도 그 흐름에 맞추어 각색되고 포장되어져 그런 삶을 합리화시켜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자신과 가까운 주변을 넘어 민족과 시대의 아픔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마다 소중하게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나이 40이 되자 동족들의 삶이 너무 궁금해 궁중에서 나와 동족들의 삶의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애굽 사람에게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민족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물론 인격적으로 좀 더 연단되어야 할 부분이 있어서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만 하나님은 모세의 민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결국 사용하셨습니다(행 7:20-25; 히 11:24-25).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히틀러가 전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 바르멘 선언문 작성에 앞장 섰습니다. 그 선언문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주인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떠나 시대를 장악하는 어떤 이념적·정치적 확신에 굴복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히틀러의 교회 장악에 대한 용감한 도전이었죠.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한 손에 신문을 들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모두 광복60주년을 맞는 뜻 깊은 때에 우리 민족의 형편에 눈을 돌릴 수 있길 바랍니다. 민족의 형편의 진실은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진실을 왜곡하는 정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니와 그 주변사람처럼 진실을 정확히 알려주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바르트의 제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는 여러분이 관점과 성향이 다른 두 개 이상의 신문을 꼭 보실 것을 제안합니다. 인터넷을 통하면 모든 신문을 무료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을 보실 때 사설, 칼럼 그리고 기획기사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분석을 면밀하게 살피셔서 어느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의 현장을 종종 직접 찾아보는 일도 중요합니다. 앞으로 우리 언덕교회는 이 점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선 우리 내부에서부터 가장 고통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 돕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점점 폭을 넓혀 세상 한 가운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2. 그는 민족의 아픔을 온 몸으로 끌어안았습니다(3-4)

하나니와 그 동행인들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 외세의 억압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은 정서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진실을 알게 된 느헤미야의 억장은 무너졌습니다. 그는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울었습니다. 수일 동안 음식을 입에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민족의 아픔을 그야말로 온 몸으로 끌어안았습니다.

오늘 한국민족은 이렇게 민족의 아픔을 온 몸으로 끌어안을 그리스도인을 찾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민족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일제 암흑기 초기입니다. 물론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해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도 없지 않았겠죠. 그렇다고 해도 기독교회가 민족독립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그 당시 교회가 건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무슨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 같은 정치신학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한국초대교회 성도들과 사역자들은 출애굽기, 다니엘서, 계시록을 읽으면서 기독교신앙과 민족의 비극적 정치상황을 연결시키는 법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을 뿐입니다. 당시 교회는 종종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모세 같은 지도자를 보내주셔서 현재의 노예상태로부터 우리를 이끌어내 해방을 누리게 하소서. 하나님,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여 일제는 제일 먼저 이 세 가지 책을 금서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등 돌림을 받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민족의 아픔을 외면한 채 자기 몸집 불리기에만 여념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혹자는 우리가 그렇게까지 슬퍼해야 할 민족의 과제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경제는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적어도 덩치 면에서 세계 12위를 오르내리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87년 민주화운동이 마침내 성공하여 군부독재를 무너뜨렸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밝히 떠 주변을 바라보면 아직도 정말 우리의 억장을 무너지게 할 일들이 수없이 널려 있습니다.

광복 자체만 해도 미완의 해방이었습니다. 60년 전 8월 15일 같은 날 해방과 분단이 동시에 선언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해방은 우리 민족 자체의 역량이 채 총집결되기 전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개입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소는 한반도를 두 동강이내고 국내의 극단적인 좌우세력들을 앞세워 고착화시켜나갔습니다.

결국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 한국사람 200여만 명이 전사하고 100여만 명이 학살당하고, 중국군이 90만여 명, 미군 중심의 유엔군이 5-6여만 명이 전사하는 비극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아픔과 앙금이 우리 사회에 아직도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어느 신문을 통하여 <TV 구술사-8.15의 기억>이라는 KBS TV 프로그램 녹취록을 읽었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두 할아버지가 8.15 해방 후의 정국을 이야기 하는 데 한 분은 좌파인 전국노동평의회, 남로당에 몸담았던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우파인 서북청년단에 몸담았던 분입니다. 대화는 팽팽하게 이어졌고 두 분은 악수도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처럼 말입니다.

남북문제가 제대로 다루어지기 어려운 것도 전쟁에서 비롯된 불신과 원한과 증오 때문입니다. 정치경제사회문제와 관련해 대화와 토론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분단의 현실이 반목과 갈등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북한에서 그 동안 굶어 죽어 간 동포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남한에서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의 차이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은 또 무슨 죄가 그렇게 큽니까? 자유시장경제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그들만의 문제인양 몰아붙이는 것처럼 비합리적 처사가 없습니다. 이는 경제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입니다. 자유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의 대부라 일컬어지는 하이에크, 그는 노벨경제학상을 탄 탁월한 경제학자였지만 상황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자유시장경제에서 빈부의 문제는 부분적으론 자기 노력에 부분적으론 행운에 기인한다고 솔직하게 분석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 경제체제가 상당부분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도덕적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는 마음만 합하면 이러한 현 체제를 보다 더 정의롭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꿈으로 머물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되듯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현 경제체제를 통해 가장 큰 유익을 얻고 있는 대부분의 상층부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이 체제보다 더 낳은 체제는 실현 불가능하니 이대로 가자고 설득하기도 하고 때론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지 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까지도 그렇게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체제를 좀 바꾸자고 하면 그 사람들이 먼저 들고일어나서 반대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체제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여전히 비현실적 몽상가 혹은 불순한 적색분자로 의심받기 일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슬퍼해야 할 민족의 대표적 아픔입니다. 그밖에도 너무나 많지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런 민족의 현실을 바라보며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성경적으로 왜곡된 신학과 설교, 그리고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이런 현실을 파악하고 아파하고 울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한국교회를 보시며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계실까요? 저는 언덕교회가 민족의 아픔을 온 몸으로 끌어안는 교회로 발돋움해갈 수 있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웃을 줄도 알아야지만 울 줄도 알아야 합니다.

3. 그는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로 몸부림쳤습니다(5-11)

느헤미야는 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민족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 그는 몸부림쳤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기도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민족이 이렇게 큰 비극을 경험하고 있는 근원적인 이유는 바사의 억압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포함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데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일성 수령, 김정일 위원장 탓한 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원망한들 별 소용없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 탓하고 있는 것처럼 불쌍한 일이 없습니다. 먼저 뼈저리게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인 10사람을 보시고 큰 도시를 멸망에서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창 18:32). 아니 한 사람만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여도 예루살렘 성을 구하시는 분이시요(렘 5:1), 한 사람만 하나님을 가로막아 심판을 하지 말아달라고 간구해도 하나님은 민족에 대한 심판의 손길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겔 22:30-31). 교회가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선 어찌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희망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 가운데 느헤미야는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지금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다 무너져 내렸다고 해도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 민족을 다시 회복시켜줄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느헤미야를 냉소주의와 패배주의에서부터 구출해낸 궁극적인 힘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과 교회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앓고 있는 가장 심각한 병은 절망입니다. 모든 진액이 다 소진되었습니다. 그들의 수고는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안 됩니다. 아니 철저히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역설적으로 희망의 때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더 기댈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불변하는 약속에 우리의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냉소주의와 패배주의를 과감하게 털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진실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이 한반도 위에 찬란한 희망이 빛을 비쳐주시고야 말 것입니다. 새 역사가 꿈틀거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행동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행동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왕의 마음을 움직여달라는 기도입니다(11). 2장에 보면 구체적인 계획이 나옵니다만 그는 왕의 허락과 지원을 받아 예루살렘 중건 사역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감상적으로 울고 회개하고 희망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우고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그리스도인과 교회에도 민족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전략과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막연히 꿈만 꾸지 않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여기엔 과감한 용기와 배짱도 필요합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세운 행동계획도 인간적으로 보면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감하게 시도했습니다. 역사의 전환점은 바로 이런 상상력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은 새 역사를 열어갈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엔 느헤미야처럼 과감하게 차고 나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과감한 행동의 사람에겐 기도가 결여되어 있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겐 과감한 행동전략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사람들이 한국교회에서 나와야 합니다. 언덕교회가 그런 인물을 배출하는 데 쓰임 받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맺음말

해방60주년을 뜻 깊게 보냈으면 합니다. 느헤미야처럼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단하는 기회로 삼아야겠습니다. 자기 안정만을 꾀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해방60주년을 맞는 우리 민족이 여전히 겪고 있는 아픔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로 다짐해야겠습니다. 민족분단으로 말미암은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울 수 있어야겠습니다. 민족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을 굳게 붙들어야겠습니다. 행동전략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하여 우리 민족을 새롭게 하는데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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