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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겔 37: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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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해방 60돌을 맞은 우리 민족이 이제 통일 첫돌을 맞을 수 있는 감격이 하루 빨리 맞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여러분 모두가 살아계실 동안 이 나라의 통일을 꼭 보게 될 것을 축원합니다.

80년대 대학가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김민기 씨가 작사·작곡하고 양희은 씨가 불러서 유명했던 노랜데, 오늘은 김민기 씨의 굵은 목소리로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 날 연못 속의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 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이 노래는 한반도를 연못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살던 예쁜 붕어 두 마리는 남과 북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을 죽이면 더 잘 살 것 같았지만 결국 그 죽은 붕어의 살이 썩었습니다. 덩달아 연못물도 썩어 버립니다. 결국 거기엔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됩니다. 남과 북,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이긴다고 해도 마침내 죽은 한 쪽의 살이 썩어 들어가 결국 공멸(共滅)하지 않을까 하는 멸망의 위험을 경고한 노래입니다.

우리는 60년 전에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자유를 담을 그릇이 필요했습니다. 그 그릇은 <평화>라는 그릇입니다.
60년전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의 감격을 함께 노래하며 기뻐했던 겨레는 지금 남과 북으로 나뉘어졌습니다. 함께 한 깃발 밑에서 해방의 춤을 출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또 가장 먼 이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반도에서 평화라는 단어는 아직도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닙니다.

자유와 해방이 이 땅에 주어진지 60년이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우리민족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북한에만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우리나라와 북한의 의견이 합쳐지는 것만으로는 되질 않습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와 함께 6개 나라가 모여 얘기해야 합니다. 그것도 당사자인 한국과 북한의 의견이 중요시 되는 게 아닙니다. 미국과 중국의 입김이 더 셉니다.
우주시대가 도래했는데도 IT 강국이라는 우리는 아직 300km, 탄두 중량 500kg 미사일 제한 규정에 묶여 우주에 띄울만큼 추진력을 갖춘 로켓을 우리 기술력으로 맘대로 개발하지 못합니다. 일본이 마음껏 무기를 개발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사거리 제한규정에 발목이 묶여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우리 힘으로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없어서 다른 나라에서 위성을 쏘아 올려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수조원대의 국방비를 아직도 계속 대야 합니다. 남쪽 68만, 북쪽 117만명의 우리의 자녀들은 꽃다운 젊은 날 푸른 제복을 입고 국방의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배부른 자유인, 상대적이지만 북쪽은 배고픈 부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유가 너무나도 귀중하고 소중함을 알며, 이 자유를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점점 분명해지는 것은, 이 자유를 제대로 잘 지키기 위해서는 북쪽의 부자유가 자유로 바뀌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동안 근대사를 거치면서 도달한 결론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만의 자유는 가능했지만, 이 자유를 앞으로 계속해서 지키려고 하면, 싫으나 좋으나 북쪽과 전쟁 없는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 분단의 나라, 이스라엘.
우리 민족처럼 이스라엘도 분단된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사울, 다윗왕 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된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솔로몬 왕 시대에는 그 영광이 극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풍요롭던 솔로몬 시대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납니다. 왕은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합니다. 결국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기어코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대, 둘로 갈라졌습니다.
두 나라로 갈라져 살던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 경에 앗수르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그들은 세계 도처로 흩어지고 맙니다. 다윗을 생각하여 유대를 사랑하시던 하나님은 결국 바로 서지 못한 유대마저 바벨론을 통해 치십니다. BC 586년 경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침공했고 그 때 다니엘 등을 필두로 한 젊은 사람들을 볼모로 대거 잡아갑니다. 나라 뺏긴 남쪽 유대왕국은 598년에 마키비가의 독립전쟁으로 인해 잠깐 독립을 했었지만 다시 침략을 받아서 만 명의 이스라엘 귀족들과 지도자들이 함께 잡혀갑니다. 이 때 끌려갔던 민족 지도자 중에 한명이 본문의 저자 에스겔입니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다음, 시드기야왕은 다시 나라의 권위를 회복하고 싶어서 남쪽 이집트의 군사력을 빌어 독립을 꾀했지만 결국 느부갓네살이 3년 동안을 예루살렘을 포위해서 함락시킬 때, 그 성의 기초인 주춧돌까지 모두 뽑히는 비참한 지경에 이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성전은 완전히 훼파되어 버렸고, 이 세 번째 함락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전 세계로 흩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던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환상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마른뼈가 살아나는 환상이요, 두 번째는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는 환상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처럼 막대기 두 개를 취해서 하나는 먼저 망했던 북쪽 이스라엘이라고 쓰고 또 하나는 남쪽 유대라고 써라. 그리고 그 둘을 네 손에 쥐어라 그러면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렇게 말할 때 그것이 무슨 장난이냐 그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거든 이렇게게 말하라. 너희들이 손으로 붙잡을 때 여호와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시는 역사를 경험할 것이다.”
이것이 에스겔이 받은 놀라운 민족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 통일 독일의 교훈
이 메시지를 자신들에게 주신 메시지로 받았던 민족이 있습니다. 바로 독일입니다.
독일이 세계 2차 대전에서 패망한 다음,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되었습니다. 동독은 인민 공화국인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했고 연합군이 차지했던 서독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가진 나라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때 독일 교회는 ‘우리는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나눠지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총회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동독의 정권 담당자들이 매년 모이는 총회의 회의를 못하도록 여행의 자유를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서독의 교회는 국경지역에서 전화코드를 뽑아놓고 회장 선거를 하고,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우리는 분단을 용납할 수가 없다. 하나된 것을 우리 교회는 지켜야 된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습니다.

동독에서 종교세를 폐지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성도가 헌금을 해서 교회를 유지하지만 독일은 모든 국민이 종교세를 냅니다. 그 종교세에 의해 교회가 운영됩니다. 종교세를 폐지하는 것은 교회의 재정적인 루트를 봉쇄하고자 하는 계책이었습니다. 이 때 서독 교회는 ‘우리 교회는 하나다 동독 교회의 모든 부족한 재정을 우리가 채운다.’ 그리고는 서독교회가 동독교회의 재정 전체를 부담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교회만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정치권에서 조금씩 동서독의 교류가 증진되었습니다. 먼저 서신 왕래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서독 교인들은 동독의 사람들의 주소를 조사해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고 부활절 카드를 보냈습니다. “이 땅에 구세주 오신 날이 25일, 성탄입니다.” “그 분께서 사망 권세를 깨치시고 우리 죄악을 모두 해결하신 다음 부활하셨습니다.” 그들은 계속 카드를 보내고 친척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과 부활절 선물을 보내면서 우리 주님의 살아계심을 직,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선포했습니다.

자유가 더 진전이 되어서 자동차로 서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동독과 서독의 경제 격차가 1:4였습니다. 그런고로 동독 사람들이 서독에 돈을 가지고 오면 그 돈이 너무 쓰임새가 없었고 도무지 여행할 수 있는 돈이 안되었습니다. 그러자 서독교회들은 모든 교회가 문을 개방해서 동독의 여행자들이 오면 침식을 제공해주었습니다. 교회마다 누구든지 가면 받아들이도록 했고, 아침을 주고 점심 샌드위치를 싸주는 일을 전 독일 교회가 행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한 달 전에 라이프찌히에서 동독의 교회들이 저녁에 촛불행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교회로 촛불을 들고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촛불을 켜서 들고 들어가서 “하나님, 이 땅에 다시 통일을 주시옵소서. 교회가 하나된 것처럼 이 민족이 하나되게 해주시옵소서.” 저들이 눈물로 기도했고, 그리고는 그 다음 달에 아무도 상상하지 못햇는데 기어코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붙잡은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에 의해서 통일 독일을 주신 것입니다. 당시 세계는 ‘독일만은 이 세계에서 가장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가 되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쟁의 원흉 독일을 다시 통일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 주변 국가의 공통된 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합의된 의지를 뚫고 도무지 힘쓸 여유도 없이 갑자기 통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갑자기 이유없이 통일된 것이 아닙니다. 독일 국민들의 노력과 또 독일교회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붙잡은 그 손을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같이 붙잡아 주신 것입니다.

■ 한국 교회의 통일노력
그러면 우리 한국 교회는 그간에 무엇을 했는가?
한국 교회는 우리나라가 민주화와 인권회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1970년대까지는 주로 독재에 항거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광주민주화 운동을 맞이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민주화와 인권이 회복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분단 상황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권과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정당성이 다시는 6·25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분단 상황 때문에 우리의 인권은 제한을 받아야 되고 민주주의는 유보되어야 한다고 모든 핑계를 그것에 돌렸고,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빨갱이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또 통치자들은 오히려 분단이라는 그늘 아래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도 밝혀진 사실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인 분단 극복 없이는 민주화와 인권은 사상누각이라는 생각을 갖고 분단 극복을 위한 통일 문제를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81년 한반도통일문제연구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수많은 기독교 진보 인사들이 감옥에 갇히는 불행한 사건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86년 남북한이 가장 예리하게 대치해 있었을 때, 모든 남북한의 교류가 끊어져 있을 때, 1986년 9월 25일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기독자대회를 결행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안되니까 세계 교회협의회의 초청을 북에서도 받고 남쪽에서도 받아서 글리온에서 처음 회의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1988년 11월에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었지만 교회 없는 도시가 되고만 평양에 봉수교회를 지어 하나님 앞에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한국 교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을 채택해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통일에 대한 이런 견해를 가졌다고 천명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 선언문대로 통일문제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6·15 남북정상회담까지 가는데 지침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1992년, 한국의 양대 큰 기독교 세력인 진보계열과 보수계열이 서로 만나서 통일 문제만은 힘을 합하자고 해 ‘남북 나눔 운동’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민간단체 가운데 북을 돕는 것의 70%를 한국 교회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붙잡는 이 손 축복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될 것 있습니다. 그것은 통일을 위해 다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북한과 우리의 민간교류는 더욱 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저들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장벽을 허는 가장 중요한 키는 뭘까요? 사랑입니다.

몇 해 전에 북의 중요한 인사 몇 사람을 미국에 초청해서 미국 곳곳을 구경 시켜줬다고 합니다. LA, 그 화려한 라스베가스, 멋있는 뉴욕, 아름다운 워싱턴 등 다 구경 시켜줬는데 별로 이 사람들이 놀라는 반응이 없더래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가서 감격한 곳이 한 곳 있다고 합니다. 그곳은 랑카스터라는 곳인데 메노나이트 교파 사람들이 삽니다. 이 메노나이트 교파는 지금도 18세기 복장을 그대로 하고 같이 공동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자동차로 꽉찬 나라 미국에서 아직도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호롱불을 켜며 서로 사랑하고 있는 아미쉬 공동체, 거기를 둘러보더니 이 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러더래요. “충격이다. 우리가 그처럼 염원했던 그 곳이 이 세상에는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 있다.” 자기들의 시각으로 보는 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63빌딩으로 자랑 못합니다. 코엑스로 북한 사람 감동 못시킵니다. 우리가 저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나갈 때 저들에게 사랑의 생명은 부활할 것입니다. 저들과 오랫동안 묵혔던 증오의 벽은 헐어질 것을 믿습니다. 미움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이외에 미움을 이길 수 있는 세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보복은 보복을 낳습니다. 미움은 한없는 미움을 낳는 법입니다. 의심은 한없는 의심을 만듭니다. 믿음이 모든 의심의 종지부라면 모든 미움의 마침은 사랑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가 입니다. 사랑할 수 있으면 반드시 북의 동포들을 감격으로 만날 줄로 믿습니다.
한국 정부가 북을 향해서 많은 것을 주기 때문에, 또 큰 기업체들이 엄청난 프로젝트를 교환했기 때문에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못하는 것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 속에는, 그 프로젝트 속에는 사랑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가 비록 적은 것 가졌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함으로 나갈 때마다 저들이 55년 동안 얼은 마음이 녹을 줄로 믿습니다. 주께서 통일의 영광의 날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분단의 아픔을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맙시다. 아들 군대 보낼 때 우는 분들, 이제 나라의 통일을 위해 울며 기도하십시오. 그래야 손자가 군대 안가도 될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도만으로는 안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남과 북, 두 막대기를 믿음으로 붙잡읍시다. 내 손은 힘이 없지만, 나를 붙잡고 계신 주님의 손은 전능하신 손입니다. 그 손안에서 저들이 하나가 될 줄로 믿습니다. 주께서 우리 손으로 붙잡은 그 두 막대기에 통일의 영광을 이 민족 앞에 펼쳐주시기를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여기 네 손은 좀 더 넓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든 손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한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손과 북한에 있는 모든 남은 성도들의 손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화해와 통일은 손 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손은 말이 아닌 느낌을 가리킵니다. 논리가 아닌 정서를 가리킵니다. 이론이 아닌 실천을 가리킵니다. 손은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손은 사랑을 표시하는 방식입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먼저 손을 잡습니다. 어떤 때는 손으로 온 몸을 끌어 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이 감격적으로 열릴 때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두 정상이 말을 하기 전에 두 손으로 굳게 악수를 했습니다. 떠날 때는 두 손으로 서로 몸을 껴안고 뜨거운 포옹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어야 합니다.
화해와 통일은 정치적 협상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통일은 관심과 사랑의 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화해와 통일은 여러분들과 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계속해서 북한 동포들을 향해 뜨거운 관심과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화해와 통일은 저와 여러분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말에 달려 있지 않고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서로 손을 맞잡읍시다. 그리고 믿읍시다.
주님, 화해와 통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손에 이 민족이 붙잡히게 하옵소서. 못 박히신 당신의 손 안에 이 민족의 영혼을 사로잡아 주옵소서.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과 간구와 기도를 정성을 다해 올려 드립시다.
하나님, 나를 평화와 화해의 도구로, 통일의 도구로 삼아 주옵소서.
다 일어나서 손을 잡고 세번 이렇게 외치겠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여 나를 화해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여 나를 통일의 도구로 써 주소서."
(정 연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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