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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빚진 것을 내가 갚으리라 (삼상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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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이 말복이랍니다. 복날이면 보신탕들 하러 가시지요? 보신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는 보신탕을 하지 않는 손님을 위하여 삼계탕을 합디다. 이런 집에 가면 손님들에게 주인이 주문을 받으면서 대뜸 “개 아닌 분 손들어보세요”라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전부 개지요?” 합니다. 그러면 “예” 하면서 자신을 개로 인정합니다.
  여기에 죄인 아닌 분 손들어보세요. 빚지지 않은 분 계세요? 전부 죄인이지요? 전부 빚지고 살지요?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을 인정하고 빚진 자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스티븐 아터번이 쓴 ‘누가 변화를 꿈꾸는가’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남자와 바위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당에 있는 덩치 큰 바윗덩어리를 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남자는 몇 주 동안 바위와 씨름하였습니다. 끙끙거리면서 열심히 밀었지만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남자는 하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주님, 도대체 무슨 일로 이 일을 시켰습니까? 밀라고 하셔서 몇 주 동안 밀고 있는데 손톱만큼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때 하늘에서는 천둥 같은 큰 소리가 그 남자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로 들려왔습니다. “나는 너에게 돌을 밀라고 했지 움직이라고 하진 않았다. 그 돌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나밖에 없다. 네가 준비되었을 때 내가 움직이마. 자 이제 네 손을 봐라”. 양 손 모두가 굳은살이 단단히 박혀있었습니다. 팔에는 근육이 생겼습니다. 그 동안 헛수고 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는 강해졌습니다. 게다가 좀 더 지혜로워지기 까지 했습니다.

  사람이 준비되면 하나님이 변화시키십니다. 변화되지 않는 것 같지만 서서히 변화가 나타납니다. 내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변화는 힘이 생기고, 모습이 바뀌는 것입니다.
  종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입니다. 종이 없어져도 누구하나 서러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면 변화합니다. 힘이 생깁니다. 근육이 생깁니다.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도 준비만 되면 하나님은 유익한 자로 변화시키십니다.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으로 새로워지게 됩니다.

  인간이 자유롭고, 쓸모 있고, 유익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많지만 특히 빚을 갚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빚은 삶을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빚이 있으면 항상 평안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사업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의 빚은 있어야 하고, 있어도 괜찮다고 합디다. 저는 사업을 잘 모르지만 빚은 누구에게나 볼모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빚이 많으면 많을수록 쉽게 넘어갑니다. 그 어마어마한 덩치의 대우그룹도 하루아침에 넘어가고 지금은 초라하게 감옥과 병원을 오가고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장로님은 자그마한 제조업을 하십니다. 그 장로님의 생활수칙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분은 절대로 남의 빚은 안 쓰겠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크질 못하지만 그 분은 얼마나 편하게 사시는지 모릅니다. 사장인 장로님과 공장장과 월급이 같습니다. 교회에 많은 선교비를 봉헌합니다. 봉사할 때가 있으면 아무 때나 전화한 하면 시간을 냅니다. 그리고 가정이 평안합니다. 제가 볼 때는 너무 행복하게 사시는 분입니다. 빚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영적 빚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마귀에게 빚진 자였습니다. 죄의 빚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야할 빚입니다. 이 빚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빌레몬에게 대한 빚을 갚겠다고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빌레몬의 자신에 대한 빚을 갚겠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 안에 안기기 전까지는 결코 평안이 없다”고 했습니다. 빚진 상태에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결코 자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빚을 해결해주어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합니다. 빌레몬을 자유롭게 해줍니다. 탕감 받아 자유를 누리게 해 주었습니다. 탕감해주어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빚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첫째, 남이 진 빚을 내가 갚아주는 삶입니다.

  바울은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도망갔습니다. 오네시모가 로마에 까지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노예는 소유가 없었습니다. 로마까지 가는 여비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훔쳐야 했습니다. 또 도망하므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이 컸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버지로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아들이 진 빚을 아버지가 갚아 주는 사례를 많이 봤습니다. 아버지로서 법적 책임은 없을지 모르지만 도덕적 책임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아들과 같은 오네시모의 빚을 갚아주려고 합니다.

  바울은 부친으로부터 상속을 받았다고 추측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성경구절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서 돈을 얻고자 하였습니다(행 24:26). 사도행전의 마지막에는 로마에서 세를 주고 2년이나 살았다고 합니다(행 28:30). 바울은 이 돈으로 빚을 갚아주려고 합니다.
  안식년과 희년의 의미를 아시지요? 땅을 쉬게 하고, 빚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빚의 탕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빚이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는 엘리사가 과부의 형편을 도와주는 글이 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아들들이 빚으로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들은 엘리사는 과부에게 동네에 다니면서 그릇을 빌릴 수 있는 만큼 빌려오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집에 있는 작은 한 병의 기름을 그릇마다 붓게 하여 모든 그릇이 다 차게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과부에게 말합니다.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빚을 갚아 아들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것을 면하고 자유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빚을 갚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그림자가 빚을 갚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의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데려와서 빚진 것이 얼마인가를 물어보았습니다. 기름 백말을 빚진 사람에게 오십이라 쓰라고 합니다. 밀 백석을 빚진 자에게 팔십이라고 쓰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지혜 있게 하였다고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빚을 탕감하는 청지기의 마음을 지혜라고 하신 것입니다.

  중세 시대의 교부 안셀름은 신학에 중요한 틀을 놓은 사람입니다. 이 분은 ‘Cur deus homo’라는 책을 썼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나’라는 뜻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아들의 생명을 보상으로 주고 인간이 지는 죄의 빚을 갚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론을 ‘보상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빚을 갚기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산상보훈에는 “은밀하게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이 여러번 나옵니다. 마태복음 6:4에는 구제를 은밀하게 하는 사람은 “은밀하게 갚으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6:6에는 기도를 은밀하게 하는 사람은 “은밀하게 갚으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6:18에는 금식을 은밀하게 하는 사람은 “은밀하게 갚으리라”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은밀하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갚으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지은 죄의 빚을 갚으십니다.
  사무엘상 22:2에는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 때에 빚진 자들의 모든 어려운 형편을 헤아려 주었기에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빚을 갚아주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유대인들의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편이 갚아야 할 돈이 있어 안절부절하며 잠을 못자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왜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빚을 갚아야 하는데 대책이 없다고 하자 아내는 “당신 참 멍청하네요. 내일 당신이 돈을 못 갚으면 걱정스러워 잠을 못 잘 사람은 바로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인데 어찌 당신이 잠을 자지 못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빚진 자는 이래저래 편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게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빚을 다 갚으셨는데 빚을 갚은 것을 알지 못하고 불안하여 하고, 잠을 자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다 갚으셨으니 평안하게 잡시다. 더 이상 빚이 없으니 평안하게 삽시다.
  로마서 8:12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 빚진 자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빚진 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빚도 예수님이 다 갚으셨습니다. 이제는 빚이 없는 자로서 자유하게, 평안하게 삽시다.

둘째, 남이 나에게 진 빚을 탕감해주는 삶입니다.

  바울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빚진”이란 말은 ‘프로스페일레이스’란 말입니다. 이 말은 ‘오페일로’(빚지다)는 말과 ‘프로스’(더하여)라는 말이 합하여진 말입니다. 더 큰 빚을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빚보다 더 큰 빚을 빌레몬은 바울에게 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까지도 탕감해주겠다고 합니다.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서 믿음을 가진 것 즉 마음의 빚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큰 빚입니다. 바울은 이것도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주기도문에는 주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치십니다. 원문의 의미는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남이 나에게 진 빚을 탕감하는 자가 탕감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의 비유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을 받고 나가다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하지 못하여 다시 잡혀온 말씀이 있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 있는 빚은 용서받았으면서 갚을 수 있는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잘못 때문입니다. 나에게 진 빚을 탕감하는 자가 자신의 빚을 탕감 받습니다. 이것이 용서의 비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 시절에 국방장관이었던 에드윈 스탠턴이 있습니다. 이 분은 육군장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한 번은 대통령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링컨은 “따끔한 편지를 쓰게”라고 하였습니다. 스탠튼은 편지를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이 편지를 다 읽은 링컨은 “이제 그 편지를 어떻게 할건가?”라고 묻습니다. “물론 보내야죠”. 링컨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자네는 보내고 싶지 않을걸세. 난로에 집어넣게. 나는 화가 나면 편지를 써서 난로에 넣어 태워버리지. 딱 적절한 때에 편지를 잘 썼네. 기분이 한결 나아졌을걸세. 그러니 이제 태워버리고 다른 편지를 쓰도록 하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용서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가 용서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할 다리를 스스로 부서뜨린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용서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속여서 거둬들인 돈은 네 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좋은 생각이구나” 하지 않으시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돈을 사용하고, 빚진 자의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빚진 자의 자세를 가지고 용서하고 나눠주는 사람입니다.

  용서는 곧 빚을 탕감하는 일입니다. 찰스 스탠리는 ‘깨끗한 영혼으로의 초대’라는 그의 책에서 용서의 다섯 가지 단계를 설명합니다. 1단계는 나 자신이 용서받은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2단계는 내게 진 빚을 용서하십시오. 3단계는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4단계는 다른 사람을 성장의 도구로 바라보십시오. 5단계는 화해하십시오. 엄청난 사랑으로 빚을 탕감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작은 빚을 탕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지 맙시다. 야고보서 2:13에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도무지 용서하지 못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요즘 돌아가는 이야기 가운데 우리나라의 정권을 김치에 빗댄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정희정권은 보쌈김치랍니다. 전두환정치는 깍두기입니다. 노태우정권은 물김치입니다. 김영삼정권은 파김치입니다. 김대중정권은 나박김치입니다. 그럼 노무현정권은 무슨 김치일까요? 겉절이라고 합니다. 모든 게 겉도는 정권이랍니다. 왜 이렇게 겉도는 것 같습니까? 이해와 용서의 부족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감싸지 못합니다. 나와 조금만 달라도 용납이 안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겉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내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보복이 아니라 용서와 이해입니다. 자신이 조금 억울하고, 팽 당했고 자신이 영원히 묻어 두어야 할 일들을 모두 들춰내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지금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은 그래도 누구보다 국가의 권력과 이익을 한 때나마 누린 사람들입니다. 이것만 해도 고마워하고 서민들에게 미안해 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서민을 불안하게 하고, 나라를 걱정하게 만듭니다.

  우리 사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모두 빚진 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채권자 같이 살고 있습니다. 채권자 의식은 국가의 망조입니다. 그리고 빚을 같아주고 용서해주고 용납해주는 자세가 필요한 때입니다. 내가 빚을 졌으니 내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까? 내가 갚아줄 여유를 가집시다. 내게 빚진 자가 있습니까? 나도 탕감 받고, 용서받고 은혜로 사는데 탕감해주고, 용서해주고, 이해해 주고, 사랑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에 베푼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빚을 탕감 받은 자유자의 모습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이 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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