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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내 백성을 보내라 (출 10:1-3, 눅 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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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은 교회에서 광복주일, 해방주일 또는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공동 기도주일'로 지킵니다. 일제에서 해방되고 민족이 분단된 채 반세기를 훨씬 넘기도록 아직 우리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금 우리 정세를 보면 서해교전 이후 대화 재개에도 불구하고 남북 관계가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것은 분노하는 국민의 정서이기도 합니다.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형성되던 화해 분위기에 물을 끼얹었고, 따라서 통일에 대한 우리들의 의지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큰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하나님 손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모세처럼, 에스더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역사를 바꾸기 위한 의지와 함께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제와 공산치하를 겪으면서 신앙적인 이유로, 또 애국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린 순교자 애국자가 이 땅에는 숱하게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흘린 피가 교회는 물론 오늘 이 땅의 밑거름이 된 줄 믿습니다. 일찍부터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라고 하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라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만큼 누리고 살게 된 그 배후에는 순교자들과 애국자들이 흘린 피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지역에서도 이원영 목사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순교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안동은 이 땅의 독립운동 역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한 분을 기억하고자 하는 분은 전계원 조사님입니다. 이 분은 이하 출신인데 결혼을 아주 예수를 독실하게 믿는 안동 김씨 감천이라는 분과 했습니다. 처음에는 시어른들이 턱없는 일이라고 반대했으나 결국 며느리의 전도를 받아서 믿게 되었고, 남편인 전계원도 역시 못 이긴 채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가고 보니 평소에 그렇게 소원이었던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고등성경학교에 입학을 한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던지 '성경박사'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난 후 일제는 교회마다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다가 감옥에 넣고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전계원도 붙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회유나 협박에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정조와 나라 위한 열심이 합해서 죽음의 고문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구타, 물 고문, 주리틀기, 전기고문, 거기다 아내와 아들을 데려다가 본인이 보는 앞에서 온갖 못된 고문을 하였으며 농사 지어 놓은 것은 공출로 다 빼앗아 가고 모든 자유와 권리는 제약을 받아야 했습니다. 해방이 되기까지 안동, 영덕, 대구 형무소를 거치면서 4년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이렇게 일제와 싸웠던 신앙과 애국의 용사들은 미쳐 해방된 조국에서 제대로 숨 한번 크게 쉴 사이도 없이 6.25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때 전계원 조사는 서울의 산정현 교회의 조사로 부임했다가 6.25를 만났는데 차마 교회와 교인들을 두고 피난 갈 수 없어서 교회를 지키다가 비행기 폭격을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해방과 민주화, 그리고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서는 애국자들의 피의 제물이 바쳐졌고, 이 땅의 교회가 이만큼 성장하기 위해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땅에 흘린 아벨의 피의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이런 피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실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런 확신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을 위한 우리 사명을 새롭게 다짐해야 될 줄 믿습니다.

2. 오늘 구약 성경 출애굽기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직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 중요한 말씀은 "내 백성을 보내라"(Let my people go!)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서 계속 요구한 말씀이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바로는 거절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고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요구를 하는 모세와 아론을 면전에서 쫓아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더욱 가혹하게 압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태가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이 저질러 온 죄악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내 나라, 내 민족을 사랑하는 그것이 죄였습니다. 내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그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나중에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할 그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극도로 거주의 제한을 받았습니다. 강제 노역을 했습니다. 노임과 재산을 착취당했습니다. 그리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임을 당해야 했듯이 민족이 전멸 당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바로를 신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대로 섬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것은 생명권의 주장이요, 재산권의 주장이요, 인권과 특히 신앙의 자유에 대한 투쟁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제에 맞서 싸운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났을 때 우리는 새 세상을 맞은 것이 아니라 일제의 앞잡이가 독재의 앞잡이로 여전히 독립 운동가들을 박해하게 된 기막힌 현실이었습니다. 북한에는 공산 독재요 남한에는 자유당 독재였습니다. 여기서 불행하게도 6.25 전쟁으로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동강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면서 동시에 독재 정권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4.19니, 5.16이니, 12.12니, 5.17이 하는 암호같은 숫자가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은 이런 우리의 수난의 역사였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바로같은 강한 세력을 향하여 "내 백성을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물론 정권의 저항도 바로만큼이나 강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을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history)를 하나님의 이야기(His story)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깨어 있으면 일을 이루어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민주주의의 염원이 그토록 간절했기 때문에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맞을 때마다 흥분과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엄청난 좌절과 실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독재와 싸운 저들이 부패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긴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사람마다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더라"고 하는 사사시대 때처럼 오늘 우리는 혼란과 무질서를 봅니다. 법도 윤리도 도덕도 양심도 다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럴적 마다 주변의 국가들을 통하여 징계하였습니다. 미디안이라든지, 불레셋, 나중에는 앗수르나 바벨론과 같은 강대국을 통하여 징계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현실이 아닙니까? 우리 한반도를 둘러싸고 잇는 소위 4강이 지금 어떠합니까?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어느 나라가 우리 우방입니까? 없습니다. 먹이를 앞에 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마치 한말 이 나라가 세계 열강의 거세 도전 앞에 견디어 내지 못하고 결국 나라를 잃게 되었던 그 쓰라린 역사의 반복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런 현실인데도 우리 국민들의 정신은 어떠합니까? 시계 하나에 7천 만원 하는 외제를 선호합니다. 사치와 향락이 끝이 없습니다. 부정과 부패는 세계 4강에 들고도 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쳤듯이 "너희가 이미 맞은 매만 해도 넘치는데 얼마나 더 맞으려고 하느냐?" 라고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그 옛날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셨던 그 말씀의 다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우리 교회가 이런 일에 앞장서야하지 않겠습니까? 회개도 우리부터 해야 합니다. 아니 나부터 해야 합니다. 주님을 찾는 일도 나부터, 우리 교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통일도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3. 신약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읽으시고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 말씀을 "메시아 취임사"라고 합니다.
여기 중요한 말씀은 "은혜의 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구약의 표현대로 하면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이 일을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해"는 무엇을 말합니까?

구약에 보면 소위 희년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일주일 중 7일째가 안식일이듯이, 6년이 지난 다음 해 즉 7년째는 안식년입니다. 그런데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다음 해 즉 50년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했습니다. 이 희년이 되면 3가지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1) 모든 빚이 탕감을 받게 됩니다. 빚으로부터 자유케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죄 용서 받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빚진 사람은 채주에게 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빚 탕감을 받고 나면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아들이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 자유를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찬송가에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2) 팔아먹었던 토지를 찾게됩니다. 자기 기업을 회복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광된 기업을 찾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동시에 우리 민족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된 나라를 회복하게 될 것을 예언해 주는 것입니다. 

(3) 종이 풀려나게 됩니다. 종이 아들이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에 안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된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끝까지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이 신령한 운동에 동참하는 백성들, 주의 일군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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