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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교회에 오니 희망이 있더라 (벧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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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에 지식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몸부림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나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신다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메마른 대지 위에도 비만 내리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바짝 말라버린 시냇가를 보십시오.  가물어서 바짝 말라버린 풀잎들이 다시 소생할까 싶지만, 그러나 비가 오면 바짝 말라 비틀어져 버렸던 산천초목이 푸른 빛깔을 띠며 다시 살아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심령에 은혜의 단비만 내리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의 내 자신이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성령의 단비만 내리면 나는 당당하게 오늘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면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 때문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전에 나왔습니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아버지 집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의 강물에 푹 잠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힘든 우리의 삶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이 한 주간도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삶을 위대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때는 캄캄한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내가 상상하지 못하던 그런 좋은 때가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의 때를 잘 분별하여 붙든 사람들은 인생에 놀라운 기회를 잡게 됩니다.  “돌이켜 보니까 내가 그때 그 기회를 잡았어!”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기회를 붙잡지 못하고 지나간 다음에야 탄식을 하며 아쉬워합니다.  “그때 붙들었어야 되는 건데…”  “그때 그런 결정을 했어야 되는 건데…”  “그때 내가 생명을 내놓고 그 기회를 붙들었어야 되는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놀라운 삶의 때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일 처음에 주시는 복은 돈이 아닙니다.  건강도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제일 처음에 주는 일차적인 복은 삶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언제나 기회로 환산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삶의 또 다른 기회를 주시기를 원한다는 마음, 그런 은혜의 마음 문이 활짝 열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누구도 맑은 날과 비오는 날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 오늘은 날이 맑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비가 좀 왔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날이 맑을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다가오는 평안의 날과 슬픔의 날을 우리 인간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권세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못합니다.  세상에 자기 돈이 어디 있는지 그 돈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땅에 밀려오는 슬픔의 날과 기쁨의 날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날씨는 내가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놀라운 것은 내 마음의 날씨는 내가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에 벼락이 쏟아져도 내 마음은 청청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깥날이 그렇게 청청 해도 내 마음에 벼락이 쏟아지고 우박이 터지면 형편없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 길, 극한 슬픔이 파도처럼 엄습해 올 때에 무서운 삶의 수레바퀴에 짓밟히고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돌아가는 바퀴에 엉켜서 같이 돌아갈 때도 있습니다.  패배하고 파멸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보면, 이런 슬픔의 무서운 바퀴를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전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퀴에 찍혀서 끝없는 나락의 길로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란 누구입니까?  바퀴에 짓밟혀서 그 바퀴에 짓눌려 패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바퀴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영혼이 독수리처럼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치고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약속의 땅을 내 것으로 쟁취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명한 시인이요, 미술가인 제임스 쉬래탄이라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교회에 나갑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나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축복입니까?”라고 다시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가면 분노와 경멸이 사라지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감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나갑니다.”

참으로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간 말못할 분노와 경멸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오셨으니 모든 분노와 경멸이 눈 녹듯이 다 사라지고 기쁨과 만족만이 가득 차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교회 나오면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 품에 나오면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희망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슬픔들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슬픔이 파도처럼 엄습해 올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오면, 주님의 품에 오면, 하나님의 의로움을 믿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하는 믿음이 와야 합니다.  생명을 다해서 힘차게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와야 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적인 순간일지라도 끝까지 믿을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찬송가 205장)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환난이나 곤고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핍박과 기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위협들이 성난 파도처럼 나에게 달려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라도 우리가 힘차게 외칠 수 있는 말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할렐루야!

우리는 이 위대한 믿음을 탐내야 합니다.  이 위대한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위대한 믿음만이 오늘 우리가 성난 파도와 맞설 때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인 것입니다.
어느 글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휴대폰에 낯선 번호가 있어서 호기심을 가지고 전화번호를 돌렸다고 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보세요? 저 아무개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아주 탁한 음성의 남자가 전화를 받으면서 너무 반갑기도 하고 당황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남자가 그 목사님의 교회에 나간지 두 달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전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금지옥엽 하던 자식이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세상을 가고, 그 자식 문제 해결하겠다고 이리 쫓아다니고 저리 쫓아다니다가 기업도 부도나서 날아가 버리고, 경찰서를 가도 희망이 없고, 법원을 가도 희망이 없고, 신문사를 가도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술에 절고, 분노와 원한으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누가 이야기하기를 그러지 말고 그 앞에 있는 교회를 가 봐라.  교회에 가면 정말 용기가 생긴대.  한번 가 봐!

그래서 한 번 왔습니다.  이층에 몰래 앉아 가지고 가만히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 하나님이 계시는지, 예수님이 누구인지 나는 모르지만, 내가 분명히 하나 아는 것은 그 교회에 가니까 희망이 있었어요.’  경찰서를 가도 희망이 없었고, 법원을 가봐도 희망이 없었고, 신문기자를 만나도 희망이 없었는데, 그 교회에 나가서 보니까 희망이 생겼습니다.”
저는 이 말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에 나가서 보니까 희망이 생겼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지극히 당연하지 않는 이 말이 목사인 제 자신의 눈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삶에 찌들리고 살아갈 용기를 잃어버린 어떤 사람이 ‘그러지 말고 영신교회에 한번 가 봐라.  그 교회에 가면 용기가 생긴대’라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교회에 올 사람이 있을는지….  있다면 그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왔다가 집에 가서 제게 전화를 걸어서 “목사님, 제가 영신교회에 나갔었는데, 경찰서를 가도 희망이 없었고, 법원을 가봐도 희망이 없었고, 세상의 어느 누구를 만나도 희망이 없었는데, 영신교회에 나갔더니 희망이 생겼습니다.  살아갈 용기가 생겼습니다”라는 말을 들어 볼 수 있을는지….
“이 교회에 오니까 희망이 있더라”
저는 이 말이 굉장한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문제는 목사만이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주 앞에서 풀어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형편이 어떻든, 우리의 위치가 어떻든, 우리의 건강이 어떻든, 세상 어디에서도 희망을 얻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희망입니다.  인류의 희망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슬픈 일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앞으로 살아가면서 절대로 슬픈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은 사람도 이 땅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슬픈 일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사탄들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겨울 파도처럼 우리를 떨치려고 난리를 칩니다.  한 파도 지나면 또 다른 파도가 옵니다.  한 고난이 지나면 또 다른 고난이 다가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품에서 새 길을 얻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인류의 소망도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나라의 소망도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집안의 소망도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의 소망도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내 사업과 직장의 소망도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가꾸기 위해서 별 짓을 다합니다.  칠하고, 붙이고, 바릅니다.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데 굉장한 투자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먼저 내 심령을 새롭게 하는데 투자하셔야 합니다.  마음의 근심은 뼈를 녹입니다.  심령을 새롭게 하는 일에 투자해야 합니다.  내 심령이 맑으면 얼굴이 맑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다 타서 썩어 가는데 거기다 아무리 좋은 것을 붙여 보십시오.  다 가식이고 가면입니다.  썩은 것에다 썩은 것을 붙이면 전부 썩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을 새롭게 하는 일에 정열도 투자하십시오.  돈도 투자하십시오.  시간도 투자하십시오.  주님은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습니다.  오늘 내 심령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영안의 눈을 뜨는 사람마다 내 영혼에 자유와 희망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나를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앞에 펼쳐진 문제 거리는 형벌이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 앞에 절망합니다.  분노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문제 거리는 형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룩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그러므로 문제 앞에 담대해 지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이 문제 가운데 있다면 오히려 그것으로 내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생기를 얻고, 더 힘차게 소망의 날개를 펼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고난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자는 고난을 압니다.  역경과 고난 앞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탄식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 앞에 그나마 지켜오던 실개천 같은 믿음까지도 무너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영웅들을 보십시오.  아무렇게나 믿고 간 사람들은 탄식과 슬픔에 잡혀 나락의 길로 빠져들지만, 그래서 실개천 같은 믿음을 포기하지만, 그러나 믿음의 영웅들은 다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때를 위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그 사건을 위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그 날을 위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영웅들은 역경과 고난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때를 위한 믿음이라, 이 날을 위한 믿음이라, 이 사건을 위한 믿음이라.  “주여! 내게 산을 옮길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주여! 내가 산을 옮길 믿음을 가졌나이다.”  그러면서 당당하게 맞서는 겁니다.  그렇게 실개천 믿음처럼 맥없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어느 때를 위한 믿음이냐?  바로 환난과 고난과 역경에 맞서야 할 그 때를 위한 믿음입니다.  깊은 밤일수록 작은 불씨는 더욱 밝게 빛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힘들과 어려운 역경에 처할 때일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굳세어집니다.

사실 이 때를 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역경과 고난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삶의 여유가 생기는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것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자기 소견으로 자꾸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불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져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본문 3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에 거듭납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들 안에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 살아있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 희망은 계속해서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 우리를 다시 살리신 주님.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소망,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인생을 다시 살게 하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무기력한 삶의 자리에 앉아 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청년들이 나사로를 주제로 하는 연극을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동네 사람이 부활한 나사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죽었다가 살아보니까 뭐가 달라졌습니까?  당신에게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그런데 나사로가 이런 대답을 합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미지의 사실, 모른다는 공포입니다.  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다시 산 나사로에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분이 참으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보다도 달라져야 할 것은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을 극복하는 소망입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보면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후렴을 영어 가사의 의미를 살린다면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졌다.  그 분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  그분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인생의 미래를 만날 수가 있다.”

여러분이 살아 계신 주님을 내 안에 소유하고 그분과 더불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이 정황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왜 무기력한 자리에 계십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주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소망의 주님을 붙들고 마음의 모든 근심들을 정복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과거의 기억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일은 지나갔습니다.  그 사람도 지나갔고, 그 말도 지나갔습니다.  다만 자기 마음속에 붙들고 있는 거지같은 감정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고 감정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땅에 고통은 없습니다.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지우지 못하는 과거에 대한 기억만 있을 뿐입니다.  다 잊어버리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행복이 무엇입니까?  하는 일입니까? 아니면 그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입니까?  아무리 기가 막힌 일을 해도 어떤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한심한 일을 해도 어떤 사람은 행복합니다.  따라서 행복은 일이 아닙니다.  그 일에 대한 자기의 생각입니다.  사람에 대한 것도 문제입니다.  사람을 바꾸면 행복 할 꺼야, 바꿔! 바꿔! 바꿔….  그렇게 바꿔보았댔자 그놈이 그놈입니다.  그래도 굴러먹던 돌이 좋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사람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벽장 속에 쌓아둔 것은 없지만 내 마음에 쌓아둔 것이 있습니다.  내 안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분이 내 마음속에 노래를 만들고 시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강한 믿음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간증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시시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캄캄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빼앗기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흔들릴 수 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시련을 통해서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합니다,  내 믿음은 더욱 순결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주 앞에도 거룩한 자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나는 마침내 어느 날 주님 앞에 시련을 통과하고 그 앞에 칭찬 받을 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자로, 존귀한 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시련의 폭풍의 한 복판 속에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이런 당당한 자세로 살아보십시오.  세상이 얼마나 도전을 받겠습니까?  여러분의 그런 당당한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 교회에 오니까 희망이 있더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사십시오.  웃고 사십시오.  영혼이 웃고 가십시오.  이 시간 우리 모두 크게 웃어 보시겠습니다.  잘 웃는 사람이 잘 삽니다.  한 번 크게 웃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웃음을 안다고 하는 위대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 정말 하나님을 진실하게 아는 자에게는 웃음이 있습니다.  웃음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입니다.  웃음이 있는 곳에 행운도 모입니다.  웃음이 있는 곳에 돈도 모입니다.  웃음이 있는 곳에 넉넉함도 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내 자신이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보입니다.  기쁘고 감사하게 보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 볼 때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면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주간 동안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에 기쁨과 평안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만 기쁨과 평안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든지, 어떤 삶의 현장이든지 여러분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만드는 사람, 화평케 하는 자들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다같이 주보에 있는 복음송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를 찬양하시겠습니다.
그 분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졌습니다.  그 분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분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나는 나의 인생의 미래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힘차게 찬양하시겠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얻게 하옵소서.  이 지역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능력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오 주 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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