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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는 핍박 (마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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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천국백성의 특성을 8가지 측면에서 기술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은 누구든지 이러한 특성을 가지게 되어 있으며, 신앙이 성숙해간다는 것은 이러한 특성들이 더욱 뚜렷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팔복에 나타난 특성들은 불신자들에게는 전혀 찾을 수 없는 것들인 반면, 아무리 미성숙할지라도 참으로 구원을 얻은 성도라면 팔복의 특성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천국 백성과 이 세상의 백성 간에는 그 특성에 있어서 좁혀질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팔복은 어디에 소속된 백성인지를 판가름해주는 시금석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미 언급한 7가지 복 있는 자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천국에 소속된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는 팔복의 마지막에 언급하고 있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의 특성도 역시 나타낼 것입니다.

성도란 존재는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천국 백성입니다. 마치 오리들 틈바구니에서 자라가는 ‘미운 오리새끼’와 같습니다. 근본이 백조인 그는 다른 오리들로부터 미움과 질시와 천대를 받습니다. 특별히 어떤 행동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겉모양과 행동은 유사했지만, 오리들과는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본질적인 차이점들이 있었기 때문에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이 땅에서 살고 있으나 본질상 이 땅 백성과는 이질적인 존재입니다.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행동을 하면서 사는 것 같지만, 근본적인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고 소망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 성도는 이 땅에서 불신자들보다 더 성실하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성경이 모든 일에 대해 주께 하듯 하고 눈가림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골 3:22), 성실하게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가족을 돌봅니다. 그러나 성실의 결과로서 성공과 성취를 획득할지라도 그것에 얽매여 사는 존재는 아닙니다. 재물과 명예를 얻을지라도 거기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훌훌 벗어버리고 떠날 수 있는 나그네처럼 이 세상에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삽니다. 그는 이 땅의 세계관에 종속되지 않고 성경적인 세계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문화와 관습에 통제 받기보다 하나님 말씀에 통제를 받습니다. 돈이 최고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최고라는 의식으로 살아갑니다. 가족을 위한 삶과 자식을 위한 희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는 풍토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삶의 대원칙을 결코 망각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천국백성의 삶이 이 땅 백성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핍박을 야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튀면 미운털이 박힙니다. 모두 과속하고 있는데 혼자 정규속도를 지켜보십시오. 사람들이 그의 준법정신을 존경합니까? 오히려 빨리 가지 않는다고 경적을 울리고 욕합니다. 아는 사이면 적당히 대충 눈감고 넘어가주는 풍토 속에서 원칙을 고수하면서 살아보십시오. 까다롭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왕따를 당하기 쉽습니다. 성도가 어떤 행동을 적극적으로 취했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성도의 존재자체를 이미 거북해합니다. 모두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인 사람들 사이에 혼자 제정신으로 말짱하게 앉아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도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뭔가 자신들의 추잡한 말과 행동이 정죄 받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함께 있는 성도의 존재만으로도 기분이 잡치고 분위기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때로 그러한 핍박은 불신자들보다 명목상의 신자들에게서 옵니다. 마치 미운오리새끼가 소나 말이 아니라 백조 비슷하게 생긴 오리들로부터 핍박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제 10절을 읽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때로 이 말씀을 건성으로 읽고서, 핍박 자체가 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핍박이라고 생각하는 순교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핍박 자체를 갈망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 목적과 동기가 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모든 핍박에 대해 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의를 위하여’라는 말로 한정하셨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불신자가 당하는 고난이라고 해서 모두 무의미하다거나, 신자가 당하는 고난이라고 해서 모두 ‘의를 위한’ 고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성질 때문에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으르고 무책임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약속한 바를 지키지 못해서 핍박을 당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인격이 부족하고 사람이 덜 돼서 박해를 당하는 것은 복 있는 핍박이 아닙니다. 그러한 핍박은 가능하면 받지 않아야 할 핍박입니다. 때로 자기 부족함 보다 어떤 대의명분을 고수하기 위해 핍박을 감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도 ‘의를 위한 핍박’은 아닙니다. 성경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선을 행한 후에 받는 핍박인데, 이 경우도 의를 위한 핍박이 있는 반면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 이런 비유를 듭니다. 마음 착한 등대지기가 있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등대의 기름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은 등대지기를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폭풍우가 일던 밤 등대를 밝힐 기름이 부족해서 등불을 켜놓지 못했고, 그 결과 배가 좌초되어 그 마을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등대지기는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좁게 보면 등대지기는 마음이 어질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그는 자기 사명이 무엇인가를 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착한 마음 때문에 오히려 큰 손해를 입혔습니다. 그가 쫓겨난 것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이 들 때, 과연 그 일이 ‘의를 위하여 받은 핍박’인가를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받은 핍박’은 어떤 것일까요? 원래 성경에서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 위해서 받는 핍박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11-12절에서 10절을 좀 더 상세하게 부연 설명하셨습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받은 핍박’을 ‘예수님을 인하여 제자들이 받는 핍박’과 동일하게 여기셨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는 핍박이 의를 위한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인격적 결함이나 실수 때문에 핍박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대의명분이나 선을 행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으신 것도 아닙니다. 그 분은 완전하셨고 조금의 흠도 없었지만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당시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증거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건함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며, 실력에 있어서 위대한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그들의 위선이 다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위험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바른 가르침 때문에 그들의 왜곡된 가르침이 드러났고 예수님의 권위 때문에 그들의 권위가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반영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증거 할 때, 그 자체가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됩니다. 이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의를 위하여 받은 핍박’입니다. 하나님을 잘 반영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증거 하는 삶은 다른 말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살려는 신념만 포기하면 무난히 살 수 있는데, 그것 때문에 다른 것들을 희생함으로서 필연적으로 당하는 환난이나 고통이 복 있는 핍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예수님은 핍박의 형태를 다양하게 언급하셨습니다. 핍박은 채찍과 십자가의 형태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욕’이나 ‘거짓 된 모함’의 형태일 수 있습니다. 시대마다 환경마다 핍박의 형태는 달라집니다. 기독교를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곳에서는 탄압의 형태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를 허용하는 곳에서는 조롱하고 모욕하고 왕따 시키는 형태일수도 있습니다. 커닝을 안 함으로 해서 성적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수군거림을 당하는 형태, 혹은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금전적인 희생을 감수하고도 어리석다는 핀잔을 받는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부당해고의 형태일수도 있습니다.

의를 위한 핍박을 감수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두 번 당하고 나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지속하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튀지 않게 사는 것이 좋다는 타협으로 물러서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이미 소속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 사람임이 확증된 사람일뿐만 아니라 큰 상이 있습니다.

성도는 피학성 쾌감을 추구하는 불건전한 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핍박 자체를 즐거워하거나 추구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없거나 무능해서 핍박 속에서 그냥 히죽히죽 웃기만 하는 자도 아닙니다. 핍박을 참음으로서 ‘내가 너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획득하려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잠시 받는 환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이 하늘에 있음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고후 4:17). 핍박과 함께 오는 하나님의 위로와 신령한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때문에 핍박 속에서도 보복하거나 자학하지 않습니다.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을 기꺼이 감수하며 즐겁게 살아갑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성경은 반대로 말합니다. 누가복음 6:26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고 했고, 디모데후서 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에 경건한 삶의 추구로 말미암는 핍박이 없다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참 성도가 아니라는 증거이거나, 참 성도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판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백성처럼 살지만 속으로는 세상백성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삶에 의로 말미암는 핍박이 있는 지를 살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평생 의를 원칙으로 삼고 핍박을 감내하며 살아간다는 가는 진정한 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최  동  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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