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화평 조성자 (마 5:9)

  • 잡초 잡초
  • 277
  • 0

첨부 1


이사야 48:22을 보면 여호와께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악인이란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불신자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즉, 불신자들에게는 평강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같은 말씀을 접할 때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 주변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불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안은 참 평안이 아니라 무지로 인한 착각일 뿐입니다.

무지로 인한 평안을 말기 암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상적으로 암이 발생해서 고통을 느낄 정도가 되면 이미 치료하기가 힘든 상태라고 합니다. 또한 고통을 느끼기 이미 오래전에 암이 발병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 환자는 고통을 느끼기 전까지는 평안하게 지냈을 것입니다. 평안이 이미 깨어졌다는 것을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무지하기 때문에 잠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 평안이 아닙니다. 평안이 없는데도 평안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이처럼 위험한 일입니다. 암에 걸렸는데도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의 평안은 이미 깨어졌고 곧 심각하게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이처럼 자신의 평안이 깨어졌음을 모르는 위험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음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요한복음 3:18절을 보면 독생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했습니다만 이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들 위에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감지하지 못합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바로처럼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 것 자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 받은 증거라는 사실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합니다. 그에게는 이미 평안이 깨어져 있지만 이 사실에 무지하기 때문에 평안한 줄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가 곪아터져서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평안한 줄로 알고 지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조기 진단하면 치료하고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평안할 줄로만 알고 있다가 망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참된 평안은 진리를 바르게 아는 근거위에서 비로소 존립할 수 있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평안을 누리려면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화평이 깨어졌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부담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수직관계에서 화평을 누리지 못하자 다른 인간과도 수평관계에서도 화평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뼈 중 뼈요, 살 중 살이라 고백했던 아담과 하와 사이가 서로 책임을 회피하고 원망하는 사이로 변했습니다. 자연만물과의 관계도 비틀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으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아 온갖 나쁜 것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수치와 두려움이 생기고 질병과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평관계가 깨어짐으로 해서 그 결과로 모든 관계에 있어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죄로 오염되고 부패한 인간 스스로는 화평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힘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깨어진 화평을 회복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고 다시금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다시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타락한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암환자에게 암을 완전히 고칠 수 있는 치료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약을 투여함에 따라 환자는 서서히 회복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영접하는 순간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화평 관계가 다시 회복됩니다. 근본적으로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어도 모든 만물과의 관계가 일시에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적으로는 모든 것이 회복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 완전하게 회복될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에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는 날 동안에는 성령님께서 적극적으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은 결과로, 즉 성령의 열매로서 화평을 맛보며 살게 됩니다. 중생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화평을 누린 자이지만 만들어가야 할 화평이 아직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8절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제 9절을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화평을 사랑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화평을 누리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 곧 화평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peace maker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며 이 직책을 잘 감당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원래 화평케 하는 사역은 메시아의 사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메시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평강의 왕”(사 9:6-7)으로 예언되었으며 그 분의 통치는 구원과 평안을 공포한다고 예언되었습니다(사 52:7).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직책을 잘 감당하려면, 그의 전 삶을 통해서 예수님이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화평은 내가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성취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화평을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전할 뿐입니다. 화평케 하는 일에 있어서 복음 전파가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모든 면에서 화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중요합니다.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평안하게 지내라’는 말로서만 화평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평’에 관한 말씀을 준비할 때, 깊은 좌절을 느꼈습니다. 저 자신이 화평케 하는 일에 뼈저린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실패가운데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화평케 하는 직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려면 예수님처럼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철저한 자기부인과 자기희생 없이 화평케 하는 일을 하려다보면 Peace maker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게 trouble maker가 되었습니다. 화평케 하려는 의도로 시작했으나 결과는 분쟁이 야기되었습니다. 진리대로 살고자 하면 싸우게 되고, 화평을 조성하려면 진리를 타협해야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곤 했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원인은 제가 예수님의 방법을 철저히 본받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시면서 철저히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셨으나, 자기를 향한 모욕과 조롱과 멸시에 대해 대항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긍휼을 베푸셨고, 공의를 무시하지 않으시면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진리를 담대히 주장하시되 요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이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평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금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기는 했지만, 나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지 못하고 도리어 주장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은 상처받은 부위가 대단히 민감해진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가 깊은 사람도 자기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합니다. 입을 열면 민감하게 자기를 방어하는 말, 되받아 치는 말,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하는 말, 정당한 자기 권리가 무엇인지를 주장하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위(胃)가 상한 사람이 입을 열면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내면이 상한 사람도 입을 열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치유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상처받은 냄새를 풍깁니다. 자기의 상처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하다 보니 원치 않게 trouble maker가 되고 맙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나타내는 허물을 정죄하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려면 자기 부인을 하고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무감각해야 하는데,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오히려 대단히 민감해서 화평케 하는 직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연변에서 웨스트민스터 공부를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내안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아직도 자신에 대해 민감해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자기를 변호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자기를 주장하려함을 보게 하셨습니다. 나의 깊은 속마음, 지하 10층에 숨겨진 그 중심이 하나님과 깊은 화평을 누리고 있지 못함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주님과 더불어 화평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화평케 하는 직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피해의식과 손해의식에서 자유하지 못한 사람은 평소에는 말 못하다가도 술만 먹으면 했던 말을 반복합니다. 이처럼 마음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도 말할 수 있는 환경만 갖추어지면 입으로부터 상처받은 것들이 술술 나옵니다. 그것이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그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까닭은 그의 깊은 중심이 그리스도와 함께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특이한 예술품을 하나 보았습니다. 무대 위에 쓰레기를 잔뜩 쌓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휴지며 빗자루며 온갖 종류의 지저분한 쓰레기 더미에 불빛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쓰레기 더미의 그림자를 보니 두 명의 연인이 등을 마주대고 분위기 있게 포도주를 한잔 마시고 있는 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그 작품을 만든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작품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비춰지는 모습은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일 수 있지만, 정작 우리의 깊은 본모습은 쌓인 쓰레기 더미가 아닌지 생각하며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더러운 것이 쌓여 있다면 비록 남들에게 비취는 것은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실상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peace maker로 살기보다 trouble maker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하시고, 화평을 누리는 자 답게 화평케 하는 직책을 잘 감당할 힘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 (최 동  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