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거룩한 욕망 (마 5:6)

  • 잡초 잡초
  • 249
  • 0

첨부 1


8복 중 처음 네 가지는 복 있는 사람의 내면 상태를 언급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과 다른 지체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없다는 자기 무능을 절감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습과 삶 그리고 이 사회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필연적으로 ‘애통한 자’가 되며 주님의 은혜로 온전히 회복될 그날을 소망합니다. 그는 자신이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를 방어하거나 정당화하는데 정열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스스로 보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애통해 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온유한 자’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역시 복 있는 자의 내면 상태와 관련이 있으나 방향이 약간 밖으로 향합니다. 복 있는 자의 최대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번째 복 부터는 내면 상태를 언급하면서 동시에 다른 대상과 관련이 된 것들입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복 있는 자의 욕망을 생생하게 표현 해주는 말입니다. 절망의 상태가 되며 생명이 꺼져가는 감을 느끼며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을 겪어본 적이 있습니까? 주려죽을 지경이 되면 먹으려는 일념을 제외한 모든 욕망이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명예욕이나 정욕이나 수면욕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굶주림은 체면과 염치와 도덕관념까지 상실하게 만듭니다. 3일만 굶으면, 후각이 예민해져서 다른 사람 주머니에 있는 껌이나 말라빠진 땅콩 하나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모든 생각이 먹는 것과 연결되어 나중에는 음식을 환영으로 보기도 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힘을 완전히 소진하기까지는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아 채우려고 합니다.

이처럼 ‘주리고 목마른’ 문제는 ‘우리 생애 최대의 의욕이 무엇인가?’ ‘나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목이 마르십니까? 무엇에 주려있습니까? 사람마다 다양한 목마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다른 것에 주린 사람들은 복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은 예전부터 복(福)자를 좋아했습니다. 베개와 이불에도 복을 수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에도 복을 새겨놓았습니다. 자나 깨나 먹으나 복을 갈망했습니다. 그런데도 선조들 중에서는 팔자타령이며 한(恨)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현대인들은 ‘행복감’을 느끼기를 갈망합니다. 무공해 식품을 먹고 친환경적인 주거지에 살며 이상적인 배우자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도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술과 마약과 각종 퇴폐적인 애정행각에 빠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의가 아닌 다른 것에 주린 사람은 결코 배부름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축복’ 받기를 갈망하며 신비한 ‘영적 체험’에 목말라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축복 받는 일은 좋은 일이며 영적 체험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복을 받고 행복감을 느끼며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의’ 외에 다른 것에 주린 사람은 필연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삶이나 신앙의  길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배부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의’에 주린 사람은 이미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행복감을 충만히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누구보다 깊이 체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것에나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모두 복이 있다고 하시지 않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의’(義)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만큼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 용어입니다. 다만 팔복이 자연인에게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특성임을 전제하면, 단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태도를 가진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학자들은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까지 포괄하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점차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생활양식’을 의미한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즉,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생활양식에서 파생되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의는 ‘의로우신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용어입니다. 에베소서 4:24를 보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새 사람은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한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실 때 의도했던 바를 충실하게 반영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보이는 공통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첫째로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알고, 하나님과 누렸던 최초의 그 의의 관계로 회복되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둘째로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고 그 세력에서 해방되기를 소원합니다. 죄 지으려는 욕망을 행동에서 제거하려 할뿐만 아니라 마음에조차 죄가 틈타지 않게 하려고 애씁니다. 셋째로 아담과 같은 상태로의 회복을 넘어서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목적대로 살아가고 싶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바꾸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려고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42:1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고 했습니다. 사슴이 목이 마르면 죽습니다.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의가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최고의 욕망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항상 그 분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며 이미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님을 알기에 더욱 온전해지기를 갈망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영접해 주시고 사랑하심을 알지만 아무런 흠과 점도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존전에 서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행동과 생각들, 그리고 순간순간의 선택까지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어떤 면에서 거의 의에 미친 사람처럼 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참 만족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과 그 분의 뜻을 알고자 하는 식지 않는 강한 열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으로 신령한 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해도 얻을 수 없는 참 행복을 알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이미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만족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깨달은 진리가 너무나 놀라워서 진리의 말씀을 좀 더 깨닫기를 갈망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알지만 좀 더 하나님을 알고 싶어 목말라합니다. 이미 인생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으나 더욱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삶을 살고 싶어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배부른 사람이지만, 동시에 항상 배고픈 사람입니다.

지난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아직도 나는 배고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8강에 진출했을 때, 이미 만족했으나 4강을 목말라 했습니다. 4강에 진출하자 더욱 만족했으나 결승전을 더더욱 목말라 했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닙니다만, 이처럼 의에 목마른 사람은 놀라운 만족을 얻게 되며 그 얻은바 만족이 너무 놀라워서 더욱 목말라 합니다. 이 땅에는 돈과 정욕, 사람의 인정과 칭찬과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기자기한 삶의 행복에 목마른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항상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과 채워진 후의 권태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의에 목마를 때는 채워진 후에 만족감이 있습니다. 권태감 때문이 아니라 충만한 만족감이 너무 놀라워서 더 큰 목마름을 느낍니다.

성도들은 ‘의’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주리고 목말라서는 안됩니다. 참신한 메시지를 듣는 것이나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목말라서도 안됩니다. 교인수를 늘리고 크고 웅장한 교회를 짓는 것에 목말라서도 안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는 것에 목말라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거룩한 욕심이 아닙니다. 오직 의에만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정말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민수기 23:10을 보면 거짓 선지자 발람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의인처럼 죽기를 원하면서도 의인처럼 살기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정말 목이 마른 사람은 감정과 말만이 아니라 의지까지도 목마른 사람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의에 굶주려 있다면 의를 위한 시간을 내게 될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분의 뜻을 헤아리고 순종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구별할 것입니다. 교회사에 등장한 위대한 성도들을 보면 그들은 바쁠수록 더 많이 기도했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고 할 일이 많을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홀해지기 쉽기 때문에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누구든지 감정으로는 얼마든지 위대한 교회사의 인물들처럼 살기를 갈망할 수 있고, 말로는 순교까지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삶에서 시간이나 정열이나 재물이 어디에 사용되는지를 확인해볼 때서야 그 사람이 진정 무엇에 주려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의를 갈망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의에 반대되는 것들과 나쁘고 해롭고 사악한 것들을 피할 것입니다. 비록 그 자체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몰두함으로서 영적인 삶을 좀먹거나 영적인 의욕을 마비시키거나 하나님을 덜 갈망하게 만드는 일들도 피할 것입니다. TV나 영화나 오락에 시간을 소비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 말씀 묵상과 기도하는 일에 시간을 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의 행위 자체가 결코 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갈망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현재 여러분의 가장 큰 소원은 무엇이며, 가장 의욕을 보이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정직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닮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다른 갈망도 결코 배부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의에만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거룩한 욕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