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 내게로 오라 (마 11:25-30)

  • 잡초 잡초
  • 200
  • 0

첨부 1


  못 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가 결혼을 하면 사람들은 그 남자 능력 있다고 말합니다. 민주적이고 겸손하게 생긴 여자와 잘 생긴 남자가 결혼을 하면 사람들은 그 여자 돈 많은가봐 라고 말합니다. 예쁜 여자와 잘 생긴 남자가 결혼을 하면 서로 조건이 맞나봐 라고 말합니다. 못 생긴 남자와 못 생긴 여자가 결혼을 하면 비로소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가봐 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귀하고 힘든 세상입니다. 인물과 조건과 능력을 넘어선 큰사랑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조건적이고 개인적이고 계산적이고 물질적인 안개와 같은 작고 가변적인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혈통이나 국경이 없이 모두를 환영하십니다. 예수님을 멀리하고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는 누구도 불행할 수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있기에 누구와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멀어지거나 등을 져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와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여러 가지 어렵고 바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본문 27절"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영광스러운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믿고 섬기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메시야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형상으로서의 성자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자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며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선하신 뜻을 따라 자신을 나타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를 계시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권한도 부여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신성과 성육신과 능력과 사랑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최대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의 은혜 가운데는 변화되는 것이 많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순종하고 헌신하는 삶을 은혜의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옆에 어떤 거울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옆 사람이 오목거울, 볼록거울이라면 자신은 괴물로 보이게 됩니다. 칭찬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장점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합니다. 열등감 있는 사람이 있으면 피곤합니다. 열등감이라는 불순물은 계속해서 칭찬을 해주고 인정을 해줄 때 사라집니다. 불순물이 제거되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1950년대에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모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각자가 쓴 소설이며 시의 결점들을 가차없이 서로 비평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창작에 도움이 되는 듯 보였습니다. 한편 여학생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서는 서로 혹평은 일절 피하고 좋은 부분만 칭찬했습니다. 10년 후 그 여학생들 중 대부분이 훌륭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유망하던 남학생들 중에서는 단 한 명의 뛰어난 작가도 나오지 못했답니다.

  사람은 보통 95퍼센트의 좋은 점과 5퍼센트의 좋지 않은 점을 갖고 있습니다. 100퍼센트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95퍼센트의 좋은 점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5퍼센트의 좋지 않은 점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95퍼센트를 보고 사는 사람은 힘있게, 자신감 있게 삽니다. 다른 사람의 95퍼센트를 보면 좋은 관계가 형성되지만 5퍼센트에 주목하면 관계가 틀어집니다. 그 5퍼센트를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5퍼센트는 그가 평생 지니는 것이고 우리가 받아줘야 할 부분이지, 바로잡으려고 애쓸 부분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들 수도 없습니다. 상대방의 결점 5퍼센트쯤은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채워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행복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 자신과 이웃이 달라 보입니다. 좋은 점을 보게 되고 칭찬하고 격려하게 됩니다. 열등감이 사라집니다. 성격과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변화됩니다. 교회와 직분이 너무 귀하게 여겨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최고의 가치이고 선물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조건과 환경과 감정 가운데서도 주님의 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절대적인 은혜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배의 승리는 신앙과 인생의 승리입니다. 예배의 실패자는 신앙과 인생의 실패자입니다. 교회 오실 때마다 넘치는 큰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선순환의 역사가 계속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와서 더 큰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쉼을 얻어야 합니다

  본문 28절"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스스로 많은 일을 하여 계속해서 피곤에 지친 상태를 말합니다. 또한 죄와 염려의 고통이나 율법과 유전의 짐으로 인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일이나 죄로 인하여 힘들고 지친 현대인들의 모습이며 이는 곧 우리 개인 개인의 모습입니다. 나의 자화상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기만 하면 쉼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쉼은 영원한 안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갈등해소와 평화와 안심까지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면 죄에서의 해방과 불안과 염려, 고통에서의 해방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맡겼던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친히 권위에 찬 초청에 걸맞게 절대적인 안식과 쉼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평안과 쉼을 주십니다. 누구도 인생의 짐과 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고 우리의 모든 큰 문제와 작은 문제까지도 온전히 맡길 때 반드시 평안과 쉼을 체험하게 됩니다. 세상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도 무엇도 쉼을 줄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참된 안식과 쉼을 누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샘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결제를 기다리며 앞에 서 있는 그에게 사장이 건성으로 물었습니다.
  “요즘 어떤가?”
  그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살아오면서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사장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그를 쳐다봤습니다. 그의 대답에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사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사장이 다시 질문했습니다.
  “자네 올해 나이가 몇 인가?”
  “쉰 여덟입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사장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 무엇인가를 쓰며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해마다 365일을 살아왔네.”
  사장은 계산을 마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벌써 2만1천170일을 살았군. 그런데 지금 여기 서서, 오늘이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는 더욱 힘주어 대답했습니다. 그는 사장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장이 믿든 안 믿은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 내가 나 자신을 믿는 게 중요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에게 사장이 따져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말하는 거지? 자네가 결혼하던 날은? 설마 오늘보다 행복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겠지?”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결혼하던 그 날을 기억할 겁니다. 아내는 눈물을 흘렸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었거든요. 첫애가 태어나던 순간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자 사장은 마치 따지듯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것 보라고. 결혼이나 첫 아이 출산만큼 행복한 날이 어디 있지?”
  하지만 그는 조금도지지 않고 응수했습니다.
  “또 다른 수많은 아름다운 날들도 기억합니다. 분명히 그런 날들도 무척 행복했어요. 하지만 오늘처럼 좋았던 날은 없지요. 그 날들 중 어떤 날도 단지 두 번째일 뿐이에요. 그 하루하루가 지금의 생활을 만들어주었습니다. 행복했던 날들이 모두 모여서 오늘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바로 오늘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제야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군. 이사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게. 자네를 영업담당이사로 특별 승진시키기로 했네. 축하하네!”

  우리 모두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예배하고 교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안식과 쉼을 얻었기 때문에 가장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 분이 주시는 안식과 쉼을 통하여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본문 29-30절"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사야는 메시야를 겸손히 고난받는 종과 온유한 인격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예언의 성취를 지적하기 위해 예수님의 겸허하며 비천하신 모습을 종종 언급하였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보다는 종으로서 타인을 섬기며 고난을 통해서 타인의 아픔을 안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멍에라는 것은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짐승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pair)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었습니다.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멍에를 메어야만 주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굴복할 때만 비로소 그분의 멍에를 멜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에 함께 보조를 맞추어 순종할 때만 우리가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벗어버리거나 나 중심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내가 주인이고 예수님을 종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 앞에서 어의가 없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칼리의 인생은 꼬여 있었습니다. 칼리는 뚱뚱하고 한쪽 다리마저 약간 짧아서 절뚝거렸습니다. 더군다나 남성 중심의 직장에서 유일한 여직원이어서 매일 편견과 싸워야 자기 몫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칼리의 외모나 절뚝이는 모습을 보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녀의 등뒤에서 비웃기도 했고, 어떤 이는 그녀의 얼굴도 보기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잘 알고 있었고 하는 일에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깔아뭉개려는 사람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장애가 있어.” 그녀는 자신을 비웃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칼리는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회사의 CEO이자 자기 분야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 비결이 뭘까요?
  칼리의 비결은 놀랄 정도로 긍정적인 자아상이었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칼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독특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도, 상사나 동료의 칭찬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밝고 친절하게, 똑 부러지고 누구보다도 유능한 칼리의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젓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칼리는 순간 순간을 온전하게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너무나도 세속적이지는 않습니까? 인간을 너무 의존하고 매어 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누구를 배우고 있습니까? 순간순간 바뀌고 변하는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얼마나 배우려고 노력했습니까? 예수님의 멍에를 메려고 얼마나 땀을 흘리며 희생의 값을 치렀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더욱 분명하고 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섬기고 충성해야 합니다. 이 길이 우리 성도와 교회와 민족이 복받는 첩경이며 축복의 통로입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모두가 힘들고 모든 것이 혼란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갈등과 분열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위기는 영적인 기회입니다. 우리 모두 은혜를 받읍시다. 쉼을 얻읍시다. 예수님을 배웁시다. 예수 그리스도로 행복하고 축복 받는 성도가 됩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교회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 정  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