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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의 길 (마 19: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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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은 여러 모로 모범적인 엘리트인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삶을 살아온 도덕적인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성실하고 유능하기도 했기 때문에 재산도 많았고 “관원”이라는 지위가 말해 주듯 사회적 성공도 이룬 여러모로 선망의 대상이 될만한 젊은이였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남다른 종교적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내세나 영생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드뭅니다. 30대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대부분 40대부터입니다. 30대까지 사람들은 온통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좀더 성공하고 좀더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골몰합니다. 또 성공과 재산을 얻은 후에는 그 열매를 누리고 지키느라 종교적이고 영적인 문제는 뒷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현실을 생각할 때 이 청년은 아주 드문 케이스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람은 젊은 나이에 내세와 영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 줍니다. 그의 그러한 관심은 단지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의 것이 아니라 상당히 진지하고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예수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영생의 길을 문의했다는 데서 그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남 앞에 무릎을 꿇고 어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보통 진지한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더군다나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상당한 사회적 지위을 가진 사람으로서 한낱 시골 출신의 랍비에게 무릎을 꿇고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영생 얻는 방법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인생이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인간의 가장 큰 과제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깊고 강한 욕구는 “생”에의 욕구이다. 영화 같은 데서 밤중에 강도의 습격을 받은 부자들이 보여 주는 반응에서 나타나듯,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 전부를 내어 놓기도 한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모든 두려움의 이면에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것이요 모든 욕구의 이면에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욕구는 생에 대한 것이다.

      영생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단지 인간에게 강한 생의 욕구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일 인간이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며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망각과 소멸 뿐이라면 인간은 죽음과 그 후의 문제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죽음이란 영원히 잠자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라면 역시 우리는 죽음과 그 후의 상태에 대해 무관심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성경이 죽음 이후의 세계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성경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현세에서와 동일한 자의식 및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나아가서 성경은 죽음 이후에 하나님에 의한 최후의 심판이 있으며 그 심판 결과에 따라 어떤 이들은 영원한 복락에 다른 이들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된다고 계시하고 있다. 소위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모든 인간은 양자 중 한 곳에서 영원을 보내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과 그리스도와 복음이 가르치는 바라는 것이다.

      역사적 기독교, 혹은 복음주의적 기독교와 현대적 기독교 혹은 자유주의적 기독교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18세기 계몽주의가 인간의 이성을 만물의 척도로 승격시킨 후 그러한 현대 사조에 적응하기 위해 변신을 꾀한 현대주의 기독교는 기독교의 모든 관심을 현세에 집중시킨 결과 죽음과 그 후의 내세에 관한 모든 논의들을 배제해 버렸다. 그들은 기독교가 어떻게 하면 사랑과 정의가 지배하는 현세를 건설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만 골몰하는 바람에 전통적인 기독교의 주제, 즉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에서 나타난 은혜, 그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용서와 칭의, 구원과 영생에 관한 기독교의 본질적 계시들을 모두 팽개쳐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여전히 생생한 인간 실존의 문제이며 성경은 심판과 영원한 세계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우리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거기에 나타난 계시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부자 청년처럼 영생의 문제 앞에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빌립보의 간수처럼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는 질문을 필사적으로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생의 길: “계명을 지키라”

      그러나 오늘 이 청년은 영생을 인간의 행위와 관련시켜 생각하고 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선행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행위 구원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는 사실 복음 외의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바이다. 적선을 통해 극락에 간다고 믿는 불교가 그러하고 율법의 행위에 의해 의에 이른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의 종교가 그러했다. 자기 의를 이루어 하나님께 용납되고자 하는 생각은 사실 모든 인간들의 본성에 속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의 청년도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마치 모든 율법을 지킬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행위에 의한 구원의 길을 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하셨다. 만일 인간이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3:20).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3). 만 가지 율법을 행하다가 그 중 하나만 범해도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 율법의 엄격한 기준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행하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인간에게는 그 모든 율법을 다 행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것을 모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혹은 계명을      그러나 아직 이 청년이 율법을 다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렇다면 자신의 연약과 무력, 그리고 한계를 깨닫게 될 때까지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을 해 보라는 뜻에서 그렇게 대답하셨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자신이 도무지 계명들을 다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믿음에 의한 구원의 길을 찾게 되리라는 계산에서 우선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피상적 종교 생활: “다 지켰다”

      한편,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도덕적 능력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표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이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다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가 피상적인 수준에서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는 외적으로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둑질이나 거짓말하는 따위의 부도덕한 삶을 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모에 대한 일반적 의무를 행하는 수준의 율법을 이행한 것 같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저 바리새인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사기를 치거나 불의를 행하거나 유부녀와 간음하는 죄를 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 생활을 꼬박꼬박하는 식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계명들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 것과 같이 이 부자 청년도 사람들의 기준, 혹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적 기준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별 흠이 없는 선량하고 정직하며 모범적인 시민이었다. 바울도 회심 전에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율법의 능력을 실감하게 되기 전까지 그는 자기 행위의 의를 의지했었다. 그러나 율법의 능력을 깨달았을 때 그는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만일 이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바가 단지 그러한 외적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내적 경건, 즉 마음의 성결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어겼사오니”라고 고백하고 그리스도 앞에 꺼꾸러졌을 것이다. 산상설교와 요한일서에 나타난 것처럼,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살인이요, 형제를 향하여 노하거나 “바보 같은 놈”이라 욕하는 것만으로도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며, 이성을 향하여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이요, 자신의 권리에 속하지 않는 것을 차지하는 것은 크든 작든 도둑질이요, 진실에서 조금이라도 이탈된 말을 하는 것이 거짓 증거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이기주의의 죄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스스로 “내가 어려서부터 이 모든 것을 다 행하였습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단지 세상의 일반적 기준에 비추어 문제가 없는 정도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고 사람들 기준에 비추어 훌륭하다고 해서 계명을 지킨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장을 감찰하시고 폐부를 꿰뚫어 보신다. 기독교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 인간의 내면의 순결과 그 동기에 더 관심이 많다.

      이 청년이 계명들을 다 지키는 삶을 살았다고 큰 소리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사회적 기준에 비추어 자신이 상당히 존경할만한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고 꽤 높은 수준의 종교적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완전에 대한 감각이나 관심은 없었다.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이 율법의 표준임을 몰랐다. 단지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수준의 종교 생활을 전부로 알고 있었다. 만일 그가 엄위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신중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 표준에 도달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해 본 적이 있다면 그처럼 쉽게 자신이 율법을 모두 지켰노라고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준수하려는 노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 줌으로써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결국 믿음으로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러한 복음적인 과정을 밟지 못했다. 그렇게 볼 때 율법을 준행하려는 그의 노력은 외적이고 형식적이며 피상적이고 인간적 수준에 머물렀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청년의 정체를 폭로하신 예수

      그러나 이 청년은 아직 율법의 능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계명들을 다 지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상태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켰노라는 허황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가 계명들을 지키는 데 실패하고 있으며 따라서 영생에 이를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셔야 했다.

결정적 시금석: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스도는 그 청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꿰뚫어 보고 계셨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집착이었다. 예수는 그 청년 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의 질병을 드러내고자 하셨다. 물질에 대한 과도한 애착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그가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을 자기 부인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탐욕을 정죄한다. 율법이 지향하는 바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를 지게 하며 가난을 견딜 준비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자신의 부를 신뢰하고 그것에 소망을 두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의 내면은 재물에 대한 애착과 탐욕으로 가득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꽤 강한 종교적 관심을 가진 자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물질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차적인 것이었다. 그의 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돈에 대한 그의 사랑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그에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재물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욕망에 비하면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태는 결코 율법을 다 행하는 자의 상태가 아니었다.   

      예수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를 직시할 수 있게 하는 한 가지 테스트를 제시하셨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이것은 다른 말로, “네가 정말 율법을 다 지키고자 하는 열심이 있을진대....” 혹은 “네가 정말 계명을 다 지킴으로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하는 의미였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아마도 이 청년이 바로 그처럼 두 주인을 섬기려는 태도를 가졌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

      인간이 심중에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가진 상태에서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서 영생을 얻을 수는 없다. 전쟁에서는 2등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2등은 의미가 없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 속에서 세상 모든 여자들 중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 아내 외의 다른 여자 다음으로 두 번째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없다. “그래도 2등이 어디야? 세상에 그 많은 여자들 중 내가 두 번째로 사랑하는 여자라는 위치만 해도 상당하지 않아?”라는 말이 일리가 있는가?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을 다른 어떤 남자 다음으로 사모한다 할 때 은메달을 받으니 다행이라 여기는 남자가 지구상에 있다면 그것은 선량한 것이 아니라 얼빠진 남자 아닌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결혼 관계에 비유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따라서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 누군가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어떤 것을 더 귀히 여긴다면 그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배우자들처럼 우리의 영적 배우자이신 그리스도도 우리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주변이 아니라 한 가운데 보좌를 요구하신다. 그는 중심 외의 어떤 자리로도 만족하실 수 없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스도는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명하셨다. 그 젊은이는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책임을 외면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단지 재산을 다 파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판 것을 현금이나 귀금속이라는 다른 형태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판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했다. 검소 그 자체가 충분한 덕은 아니다. 단지 자기 재산을 포기하는 것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쓸데없는 야심”일 수 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핍절히 지내게 하는 것은 아무 칭찬받을 일이 못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 청년에게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사랑이야말로 온전케하는 띠”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모든 이들이 다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사유 재산을 전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약간의 땅뙤기를 가지고 농사를 지어 가족을 부양하면서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가 땅을 다 팔아 버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부자 청년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그가 자신의 재물에 자기 삶의 첫 번째 자리를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태도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식은 다소 과격해 보이지만 확실한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개신교의 본질적 교리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회개와 분리될 수 없다. 믿음이 회개와 구별은 되지만 서로 유리될 수는 없다. 회개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구체적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참된 회개는 삶으로 그리고 행위로 그 증거를 나타내어야 한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영생의 길은 단지 한 차례 선을 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다.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다. 세상과 육신에 대한 소망을 버리는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 것이영생의 길이다.

      예수를 찾아와 영생의 길에 대해 문의했던 그 청년은 영생에 대한 소원은 있었다. 그러나 그 조건을 충족시킬 마음은 없었다. 아무리 영생을 위해서라지만 자신의 그 큰 재산을 다 포기한다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였다. 영생에 대한 갈망이 큰 것도 사실이지만 재물에 대한 그의 애착은 그보다 더 컸다. 그리하여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영생을 얻자니 탐욕을 버려야 하겠고 탐욕을 간직하자니 영생을 얻을 수가 없었던 그는 결국 어두운 얼굴로 그냥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에라도 그가 영생을 위해 물욕을 버렸는지 아니면 영생을 포기하더라도 물욕을 극복하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천 년 전 예수를 찾아 가 영생의 길에 대해 문의했던 그 청년과 같은 인물들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땅 위에 무수할 것이며 어쩌면 교회 안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적용
      오늘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자. 우리는 이 본문에 나타난 청년과 유사성이 없는가?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종교적인 생활을 하면서 살아왔다.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참석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헌금도 하는 등 하나님의 계명들을 이것 저것 지키는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도덕적으로 별 흠이 없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모범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결코 외적으로 드러나는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등의 죄를 범하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종종 선한 일도 한다. 우리는 근면과 성실, 검소와 내핍, 그리고 이재 능력을 사용하여 재산을 축적하고 남부럽지 않은 정도의 성공도 이루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본문의 청년처럼 “내가 계명들을 다 지켰나이다!” 하는 도덕적 자부심을 가진다.

      오늘 청년도 그리스도에게 2등의 자리를 내어 줄 용의는 있었다. 재물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계명을 순종할 용의가 있었다. 재물에 관한 욕심을 빼고는 종교적인 삶을 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재물에 대한 애착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교회 다니고 예수를 믿을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런 식의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심리 자체가 혹 재물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재물을 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히 여길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이 없는가? 아마도 물질은 가장 흔한 우상일 것이다. “탐욕은 우상숭배니라”(골3:5). 물질에 대한 애착과 탐욕 때문에 우리의 영생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물질 외에 세상에 있는 어떤 다른 것들도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다. 명예, 지위, 사회적 신분, 출세, 쾌락, 오락, 자기 자녀, 배우자, 애인 등이 그리스도보다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리스도보다 더 귀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영생에서 멀어지는 길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정리하자. 우리 속의 데릴라를 제거하자. 세상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의 인생을 탕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우리 생을 헌신하자. 사도들은 누구나 그 진리를 알고 실천한 자들로서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 15, 17).
(양 낙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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