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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직분을 주셨으니 (엡 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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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두 주간 동안 연속으로 ‘교회,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교회는 혈연을 넘어서는 새로운 확장된 가족임을 확인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온 성도들이 하나가 된 한 가족됨의 역동적인 힘으로 교회에 닥친 고난의 시대를 이겨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형제와 자매는 한 해 몇 차례 밖에 만나지 못하지만, 우리는 매주일 만나는 믿음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피보다도 더 진한 그리스도의 피로 엮어진 소중한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울영동교회의 가족으로 불러주시고, 하나되게 하셨지만, 이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과제와 사명을 주셨습니다.

1. 내게 직분을 주셨으니

우리는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을 이루게 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를 영광스럽게 이끌기 위해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11절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우리는 모두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직분이 있다고 가르칩니까?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 이 다섯 직분은 초대교회의 기둥이었습니다. 여기 목사와 교사는 한 직분으로 보기도 하고 두 직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헬라어 목사와 교사에는 다른 직분에서와는 달리 관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칼빈도 이를 두 직분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를 볼 때 목사였던 바나바와 바울 외에도 여러 교사들이 교회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13:1). 어떻든, 이러한 직분들은 초기 교회를 이끄는 리더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들에 의해 든든히 서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교회의 기초를 놓았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도 다양한 직분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은사를 따라 배치하고, 봉사하게 합니다. 어떤 분은 찬양대로 봉사하고, 어떤 분들은 교사로 봉사합니다. 어떤 분들은 주차 안내를 하고, 어떤 분은 예배 안내를 합니다. 요즘 같이 이렇게 더운 날은 여성도들의 식당 봉사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여성도들의 헌신적인 수고로 모든 성도들이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각기 다릅니다. 우리가 이런 작은 직분에 충실할 때 교회가 왕성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내가 맡은 직분이 시원챦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 큰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직분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교회에 중요한 일꾼이도, 또 큰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작은 봉사를 크게 보시고, 기쁘게 받으십니다. 나의 봉사로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에 직분을 맡았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 아닙니까?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직분이 무엇입니까? 직분을 소중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직분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러한 직분을 생각하면 자주 교회 안의 직분에만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직분 외에 또 다른 직분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일터에서, 나의 사업에서 맡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거룩한 일입니다. 속된 일이 아닙니다. 썩어질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거나 우리와 이웃의 신앙과 삶에 해를 주는 일이 아니면 이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일과 직업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작은 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사업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어찌 다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한 기업의 경제적인 가치는 별개로 하고 나와 우리 직원들의 수고를 통해 한 가정을 살리게 됩니다. 아이가 건실하게 자라고, 그 가정에 행복을 주고... 이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보람입니다. 어려운 시절에 그 모든 것을 정리하여 은행에 두고 이자로만 생활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기업을 하면서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작은 식당을 경영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오전 내내 혹은 하루 종일 일에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이 우리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육신이 회복되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도 직접 작은 식당을 경영하신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갈멜산 전투는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전투였습니다(왕상 18:20-40). 그 전투를 마치고 탈진하고 지친 엘리야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물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그 과정을 통해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왕상19:1-18). 우리는 음식을 통해서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섬기는 일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불러 주셨습니다(고전3:9). 나라의 대통령이 나를 불러 함께 일하자고 하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같이 일하자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일터에서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보존하고, 개발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역하고, 그를 높여드리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의 일터에서 하나님과 아름답게 동역하는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직분을 주신 목적

우리에게 이러한 고귀한 직분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12절에서는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성도를 온전케 세우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를 견고하게 세우고 봉사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직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나의 섬김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나의 돌봄으로 연약한 성도들이 격려를 받아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나의 도움으로 어린 신앙인들이 확신을 넘어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학생들이 내가 보내는 격려와 응원에, 내가 초청한 작은 파티에서 변화가 됩니다. 우리 가정에서 차린 작은 식탁의 봉사가 사람을 새롭게 하고, 구역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봉사가 비록 적은 것이지만 이러한 놀라운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벧전2:9). 중세 천년동안 이 진리가 가리워 있었는데,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이 진리를 다시 발견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고, 기도하고, 사죄의 은총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사제들, 곧 사람의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사역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역자로 세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말씀의 사역자, 돌봄의 사역자, 격려의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분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총회 세계선교위원회가 주관하는 선교포럼이 방콕에 참석하였습니다. 내년이 우리 교단이 선교운동을 시작한지 50주년이 되는데, 지난 50년을 반성하고 새로운 50년을 전망을 모색하는 의미있는 모임이었습니다. 교단 지도자. 선교 지도자, 두 텀을 마친 경력 선교사 등 70여명이 모여 새벽기도회 부터 밤 9시까지 4일 동안 뜻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수들과 선교사들이 오랫동안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여 선교전략을 개발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파송한 황혜림 선교사도 민났습니다. 황 선교사가 방콕 가까이 치앙마이라는 곳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현지 선교사로 참여하여 포럼을 위해 많은 봉사를 했습니다. 황 선교사는 지금 열심히 언어훈련을 하고 있고 다민족 교회인 Fellowship 교회에서 협력하며 Cell Group을 맡아 수고하고 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께 인사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그 포럼에서 여러 지역에서 온 선교사들과 교제할 수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 그들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방콕에서 12년간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님의 이야기는 인상 갚은 것이었습니다. 타이는 가장 대표적인 불교국가인데, 대단히 다원주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두산을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이듯, 여러 강물이 바다에 모이듯, 그들은 불교나 기독교나 같은 종교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원주의 사상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설명하면 “아, 똑같네”라고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의 좌절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실 태국은 그들은 19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두고 각축을 벌릴 때 도 외국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한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때로 적당한 협상과 외교를 통해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을 붙이기도 하고 깨로는 적당히 땅을 떼어주고 나라를 보존하던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나무를 보면 ‘절개’를 연상하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그러한 개념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대단히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그들에게서 ‘복음을 위한 희생’이나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를 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선교사들의 좌절이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12년을 사역하는 가운데 지나는 동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신학생이 생기게 되고, 변화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선교의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것입니다.

3. 성숙한 신앙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성숙한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한국교회의 역사가 이제 120년이 지나고 있지만, 한국교회의 신앙의 성숙도는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젊은이가 교회를 떠나가고, 어린이가 줄어들고,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그것의 가장 큰 요인을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의사표시를 한 사람들이 900만 이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이 어떠합니까? 믿는 사람들은 많은데 우리의 삶에서 말씀의 실천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데, 밤하늘 장안을 보면 붉은 십자가는 많은데, 많은 기독교인 사업가가 있어도 기독교 사업가는 많지 않습니다. 기독교인 교사는 많이 있어도 기독교 교사는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인 정치가는 많이 있어도 여전히 세속적인 방식으로 정치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거의 모든 분야에 편만 해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의 불성실로 교회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 아니라, ‘거지같은 제사장’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은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것과 아는 것과 하는 것이 일치된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들을 믿음과 삶이 하나된 사람으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문제는 배움이 없고, 훈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대단히 중요한 시간이지만 훈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성장을 위한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6월은 현충일과 6. 25전쟁으로 나라를 생각하게 하는 달입니다. 6. 25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까? 이들의 희생 위에 우리나라가 재건되었고, 오늘의 우리가 여기 서 있습니다. 얼마전 한 전쟁영화가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만, 전쟁이 급하니까 훈련도 없이 총도 제대로 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전쟁에 나가서 총알받이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군인에게 훈련이 없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는데, 입대하여 기본훈련을 마치면 계급을 받고 군인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군인 노릇을 하려면 제법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훈련을 하고, 연습을 하고 또 하고.. 그렇게 제대로 군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된 신자가 되려면 배움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훈련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예배로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예배는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출발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겨서는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예배에 조금만 일찍 오시면 좋겠습니다. 예배에 늦게 오시는 것은 습관입니다. 1년을 지각하던 분들이 당장 하시기는 어렵겠지만, 한 주에 5분씩만 일찍 오시면 예배가 달라집니다. 예배를 위해 준비하고, 기도하고, 주일마다 새로운 기대로 나아와야 합니다. 준비가 없고, 기도가 없고, 기대가 없으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 얻을 것도 없습니다. 주일 예배에 승리하는 사람이 또 다른 예배인 삶의 예배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교육과 훈련으로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분주하십니까? 그러나 이 일이 중요한 것을 아신다면 시간을 내어야 합니다. 바쁘다고, 어렵다고, 번거롭다고 훈련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강한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들을 준비하여 성도님들을 돕고 있습니다. 예배만 왔다 가지 마시고,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십시오. 훈련을 통해 더욱 튼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말씀묵상은 우리의 신앙성장에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복있는 사람’ 큐티를 소홀히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은 대개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모이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개인적인 신앙생활에는 소홀한 경향이 있습니다. 전체가 모이는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는 독립적인 신앙생활이 함께 따라야 합니다. 내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고민하고, 실천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합니다.

=성도들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함께 살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 교회에서는 어렵지만, 작은 그룹에서 교제를 강화하여야 합니다. 선교회, 구역, 교육기관은 그 역할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격려하고, 기도하고, 도와주는 것이 한 가족된 사람들의 신앙생활입니다.

=일터에서 말씀대로 살고 봉사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바를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치열한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적인 신앙생활이 우리를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는 신앙에는 단계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이 있고,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사람의 신앙이 있다는 것입니다(14절). 젖을 먹는 어린 아이 신앙이 있고, 단단한 식물을 먹는 성숙한 신앙이 있습니다(히5:12).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어린 아이 신앙의 특성에 대해 가르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사람은 누구에게나 성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기를 열 달 동안 기다렸는데, 자라다가 성장이 정지되어버린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우리가 그 아픔을 어찌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부모 역할을 하려면 20년이나 수고하고 희생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 역시 성숙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어린 아이의 믿음이 어떠합니까? 어린 아이들은 독자적인 판단능력이 부족합니다.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궤술은 주사위를 뜻하는 정육면체를 말하는 것으로서 교활, 속임수를 나타냅니다. 간사한 유혹은 당시의 교활한 거짓 선생의 잘못된 가르침을 말합니다. 어린 아이 신앙은 이러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으로 마치 물결같이 이리 저리 밀리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린 아이 신앙으로는 스스로 독립적인 신앙인으로 바르게 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믿음의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린 아이의 신앙을 벗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돌봄과 수고로 다른 사람을 성숙한 신앙으로 도와야 합니다.

맺는 말: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

이러한 우리의 성장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계속하여 15절을 보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미래를 향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 대한 기대도 있습니다. 우리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비전, 나의 꿈, 나의 야망은 무엇입니까? 아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야망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우리의 야망, 우리의 신앙생활의 분명한 목표는 예수님처럼 자라고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예수님이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예수님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소원을 나의 소원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 자신이 나의 직분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세워 가는 것 아닙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이곳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단순히 예배의 참석자가 아니라 서울영동교회의 교회의 한 가족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일 뿐만 아니라 가족으로서 하나됨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위해 직분자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직분을 맡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앙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어린아이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사역자의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세워주고 격려하는 일에 앞장섭시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견고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삼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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