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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내게로 오라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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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시니라.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실상 총체적인 표현을 쓴다면 곤고함 입니다. 악을 이룸도 곤고함이고, 선을 이루려 함도 곤고함 입니다. 아무리 내가 생각 없이 살며 내 맘대로 산다고 해도 이것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럴수록 더욱 곤고하기에 또한 그것을 넘어서려고 막무가내로 살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입니다.

복잡하게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편하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복잡하다 보니까 외부적으로 오는 것들에 쌓인 스트레스를 나의 시간이나 생각은 되도록 간편하게 놔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철학을 싫어합니다. 고리타분하고 복잡하다는 것이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잡하게 사는 사람들일수록 신앙생활을 마다합니다. 사는 것도 복잡한데 쉬지도 못하고 불편하게 무슨 종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 또 뭐 어디에 쓸 일이 있다고 산다는 게 뭐냐고 따지냐 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싫어할 뿐이지 그런 것들이 내가 싫어한다고 내게서 떠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내게 들러붙어서 나를 괴롭힙니다. 근본적으로 행복한 것 하나를 위해서 불편한 것들이 얼마나 엄청나게 투자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한 번 만족한 웃음을 웃기 위해서는 많은 인상 찌푸림과 땀방울과 다른 이들 밑에 굽신거림이 필요합니까? 그렇게 얻은 웃음이라고 또 영원히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쉬 사라지고 또 다시 웃음을 웃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여야 합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공부가 아닐까? 물론 천성적으로 공부가 즐겁고 적성에 맞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혹 입니다. 자녀들을 모질게 몰아붙이는 엄마들도 뒤돌아보면 자신들은 더욱 지지리도 이를 갈면서 공부를 싫어했던 이들이 많습니다. 응애 하면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인간은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남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친구 뜻대로 살고, 남의 눈치 보면서 살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고, 남들이 하는데 나만 안하면 불안해서 마지못해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죄악된 인생의 모든 것들이 수고해야만 하고, 무거운 짐이 되어 나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나를 쉬게 만들어 주신다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고마우신 말씀입니까? 그러나 오해하면 안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인에게 나 하기 싫은 일을 떠맡기듯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아야만 합니다."그 일들은 어차피 내가 이 세상에서 목숨을 가지고 사는 한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다. 그런데 맡기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맡기면 아무 것도 안해도 되는 그런 쉼이 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인생이 왜 피곤한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내 맘대로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분명한 진리를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 가운데 우선해서 선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직시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네 인생의 주인을 나 하나님 아버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즉, 네 인생의 곤고함의 문제와 네 인생의 내용들을 짐지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을 누가 해결하여야 하느냐? 어떻게 해결해 주시느냐? 하는 관점에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층 저 깊숙히에서 나를 곤고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런 곤고함들이 외부에서 들어와 나를 곤고하게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살펴보면 결국 나의 한계이고, 불편이며, 나의 사고관에 걸맞지 않는 현상에 대한 나의 심기가 곤고함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돈에 무슨 힘이 있습니까? 권력이 있습니까? 생명력이나 나를 구원할만한 그런 권능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그 돈에 그런 것들을 실어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곤고한 것입니다.

사람의 본능 중에 하나는 내가 내 일을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안심할 만큼의 어떤 힘, 조건, 사람. 이런 것들을 가지고 그 일을 이루어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들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이런 것들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나를 누군가가 말하면 자존심 상하고, 복수하여야만 직성이 풀리고, 이기고 싶고, 지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것. 하나님에게가 아닌 인간들에게 무능한 그것들을 감추고, 채우고, 변형시켜서라도 인정받으려는 것. 이것이 무거운 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있을 때, 가장 무거운 짐은 곧 나입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자신 있게 행동을 합니다. 남의 눈치보지를 않습니다. 세대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도저히 용납 못할 일도 서슴없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 또한 다른 이들을 신경 쓰지 않고 한다지만 오히려 더욱 인정받으려고 하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역설적인 행동이지요. 자신의 본질은 감추고 오히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으로 남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얻으려고 하는 그들의 생각과 삶의 양태가 얼마나 곤고한 것인지를 그들 자신은 잘 압니다. 얼마나 전심으로 추구해야 할까요? 즉각적인 변화에 자신들을 투자해야 합니다. 모든 인생이 마찬가지입니다. 모양은 다르고 차별이 있을지언정 곤고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곤고함은 곧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그 유혹에 넘어가 타락하였습니다. 그 유혹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모두 합당합니다. 화려하기도 합니다. 그 누구의 삶일지라도 무가치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의 인생 속에서도 곤고함이 없는 인생은 만나볼 수 없습니다. 그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누가 답을 줄까요? 어느 종교에서처럼 해탈하여야 할까요? 그럼 해탈하기까지의 곤고함은 무엇으로 보상받아야 하나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라고 하신 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모른 척 하고,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 무지함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쉼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인 생명을 생각해야만 인생의 짐을 벗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호수 전체가 오물인데 거기에 한 트럭의 생수를 쏟아 붓는다고 먹을 물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곤고함이 결국 타락으로 말미암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 의한 법칙으로 나오는 것이라면, 나를 지배하는 권세를 주님께 양도함으로써만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주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과 내 인생의 곤고한 짐을 벗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분명한 상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이 아니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은 우리가 아는 그런 착하고 겸양을 떠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을 흉내내는 것으로 아는 그런 온유나 겸손이 아닙니다. 진정 내 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나의 것이 된 온유이며 겸손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나의 인생의 짐을 맡길 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은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인생의 곤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나 도구나 환경이 달라지고 채워져서 이루어지는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유와 겸손한 자가 되어야지만 그 때부터 무거운 짐을 벗고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님의 능력을 요구하지만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온유하고 겸손해지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멍에가 쉽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멍에가 가볍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멍에와 주님이 지신 특권의 멍에가 질이나 양으로 다른 것입니까? 그런 뜻입니까? 아닙니다. 멍에를 감당하는 자세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본질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여전히 인정 못하신다면, 그리고 다른 방법을 여전히 추구하신다면, 세상이 변하여도 문명이 아무리 발전을 한다 하여도 그럴수록 수고와 무거운 짐만 더욱 느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된 나와 죄악된 세상이 줄 수 있는 전부인 것입니다.

멍에를 메는 방법을 바꾸십시오. 그것을 주님이 해결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나의 주인은 곧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믿고, 주님의 가르치신 방법을 따라 나와 나의 모든 인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인이 주인되심,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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