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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 사랑(6) (눅 23: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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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이 인간적으로 (신앙적으로가 아니라)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인간적으로(또 역시 신앙적으로가 아니라) 성공한 개척교회 목사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저는 목회자들이 인간적으로 가장 부러워할 수 있는 인간적으로 성공한 개척교회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당사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제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요? 쉽게 말해서 그냥 목회가 행복할까요? 목회에 아무런 문제나 부담은 없는 걸까요? 크고 넓게 생각할 때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교적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요 감당 못할 부담과 문제는 없는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와 부담 없이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랍니다. 저도 가끔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법 자주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앞으로 몇 년이 지나야 은퇴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주 가끔은 앞으로 몇 년이 지나야 천국을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들으면 ‘팔자 좋은 소리 한다’라고 하시겠지만 누구에게나 삶은 고단하고 피곤하고 부담스러운 법입니다. 우리의 삶을 고단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고 부담스럽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문제와 부담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불화’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가장 살 맛 안 나게 하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불화입니다.

요즘 평화에 대한 설교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설교를 준비하는데 자꾸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복음 성가 가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라는 가사였습니다. 평화에 대한 설교를 다섯 번이나 하였는데 여전히 불화의 소문과 소식은 그쳐지지가 않습니다. 처음부터 새로 개척하는 교회에는 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절망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이 답답한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제발 하나님이 평화에 대한 말씀을 주시는 때만이라도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노력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화 설교를 할 때마다 그 설교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키워드는 ‘용서와 회개’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용서와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키워드 중에 하나가 ‘용서와 회개’인 까닭은 불화의 중요한 키워드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다면 불화는 없습니다. 불화가 없다면 사망도 없습니다. 죄를 우습게 여기고 경하게 여기는 사람의 삶 속에는 불화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화의 화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과 가까이 있으면 언제나 불화와 전쟁의 화를 면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소원한다면, 의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삶의 배부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천국의 삶은 의를 소중히 여겨 그것을 위하여 핍박 받는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만 문제는 우리가 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불화의 원인이 죄인데 우리 모두에게는 그 치명적인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평화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원칙적으로 평화가 불가능한 우리들에게 평화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은 ‘회개’입니다. 잘못을 한 후에라도 그것을 후회하고 아파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그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회개와 용서를 통하여 죄는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에 하나가 바로 ‘회개와 용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 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만 하면 모든 죄의 문제는 해결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아주 심플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 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 일서 1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다 그렇듯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십니다.

구원을 위하여, 천국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아파하는 것입니다. 후회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아파하고 후회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평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가 구원을 얻고, 천국을 얻고, 평화를 얻기 위하여 반드시 회개와 함께 따라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용서가 없다면 회개는 아무런 의미도 효과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에 하나는 ‘용서’입니다. 정말 중요한 키워드 중에 하나는 용서입니다. 용서가 없다면 죄인인 우리들에게는 평화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지은 죄를 미워하고 아파하고 후회하고 회개한다고 하여도 용서가 없다면 회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떤 죄도 다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 스스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용서의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 담이 없어졌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불화의 담, 사망의 담을 무너트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못 박는 엄청난 일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에게 평화는 없었습니다. 평화에 있어서,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fact는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구원을 논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평화를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매우 중요한 문제 하나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회개가 먼저인가 용서가 먼저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개와 용서’인가 ‘용서와 회개’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회개와 용서’입니다. 회개하면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상식은 다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것은 ‘용서와 회개’입니다. 회개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했으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 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 7 -8)


물론 용서했다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달려 돌아가셨다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도 의미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성서의 휘장이 찢어졌어도 그 찢어진 휘장을 통하여 지성소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나 회개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미리 문을 열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했으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와 용서’도 대단한 것입니다. 뒤늦게라도 용서해 주신다면 용서 받는 우리로서는 정말 감지덕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입니다만 그러므로 이제 구원은, 평화는, 천국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에 달려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적이 되면 될 수록 죄에 대하여, 특히 자기 죄에 대하여 민감해 집니다. 사람이 육적이 되면 될 수록 죄에 대하여 특히 자기 죄에 대하여 둔감해 집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면에서 아주 민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육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법을 섬긴다고 애통하였습니다. (롬 7:25) 그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딤전 1:15)

저는 그런 면에서 윤동주 시인을 좋아합니다. 그는 그의 유명한 서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이는 잎새에도 나는 괴로웠다>

부는 바람도 아닌, 떠는 바람도 아닌,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할 줄 알았던 윤동주는 마치 바울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회개와 뉘우침, 죄에 대한 예민함이 없는 사람과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어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까지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끝내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평화를 위한 오늘 우리의 첫 번 째 도전은 회개입니다.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과 상한 심령을 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개하고 뉘우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에 대하여 둔감한 마음을 없이하여 주시고 예민하고 민감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매주일 예배 시간에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평화를 위하여 우리는 회개에 도전하여야 합니다. 회개와 함께 평화를 위하여 우리는 용서에 도전하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위한 오늘 우리의 두 번째 도전은 ‘회개와 용서’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해 주자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도 쉽지 않습니다. 용서해 줄 수 있는 죄도 물론 있지만, 아무리 상대방이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고 하여도 도저히 용서해 줄 수 없는 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옳지 않다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는 자가 자기에게 일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가둔 것을 ‘악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빚을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회개하고 후회하는데도 용서해 주지 못할 죄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상대방이 진심으로 후회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데도 불구하고 상처가 너무 커서 아직도 용서해 주지 못하고 있는 분은 없으십니까? 오늘부터 용서에 도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평화를 위한 우리의 마지막 도전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처럼, 우리 하나님처럼, 회개를 앞선 용서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회개하기 전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기 전에,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도 그 죄만 미워하고 사람을 함께 미워하지 않는 것에 도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으면 그 일도 가능해 진다고 저는 믿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잘못을 하였다고, 실수를 하였다고, 반듯하지 못하다고, 상식적이지 못하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를 힘들어하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닮아 살기 위하여 노력해야만 합니다. 평화를 위한 우리의 최고의 도전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회개와 용서가 아니라 용서와 회개입니다.

회개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회개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미리 십자가를 지시는 하나님을 닮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 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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