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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의 집을 찾으신 예수님 (요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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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친구(요11:11)라고 불렀던 사람은 바로 나사로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사로의 집을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라는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였고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면 반드시 베다니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나사로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라고 하는 두 여동생이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병들었다가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살려주셨다는 이야기 외에 그의 부모 또는 가정환경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소개할 때 거의 누구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미루어 나사로에 관하여 그의 가족관계가 소개되지 않는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아마도 부모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이 삼남매가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을 예수님께서는 특별하게 생각하셨고 예루살렘에 오갈 때 그들의 집에 자주 들려서 음식을 먹기도 하시고 쉬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자주 방문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해보겠습니다. 왜 나사로의 가정에 찾아오셨는가?

  ① 불쌍한 모습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들은 부모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서 가정을 가진 것으로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추론하건데 어려서 부모를 모시고 3남매가 살아가는 불쌍한 가정 즉 결손 가정이었습니다.
  특히 요 11:5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라고 했습니다. 본래란 처음부터를 의미합니다.
  이 3남매를 처음 만난 그 순간 그 가련하고 불쌍한 모습에서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주님의 마음이 끌렸던 것입니다.
  부모도 없고 물질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그야 말로 아무것도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결국 불행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때로는 행복의 출발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사로 3 남매가 누구 보다 더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람들이 불행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연히 예수님을 가까이 했고 예수님도 불쌍한 가운데서도 가까이 따르는 나사로 3남매의 가정에 허물없이 다가가셨고 친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 나고 배경 좋고 똑똑한 사람보다 상처받고 슬픈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때로는 내가 가졌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가까이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불행해 보일지라도 예수님의 눈에 불쌍하게 여겨지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사람들은 멀리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 편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자신이 머리 둘 곳이 없는 사람처럼 사셨기 때문입니다. 마 8:2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사역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측은하게 여기시는 것으로 특징지워 졌습니다.

  힘들고 어렵습니까?
  가난하고 외롭습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그런 당신을 좋아하신답니다. 가까이 가셔서 친구 되어 주신 답니다.

  ②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요 15:14-15절에 보면 예수님이 일반적으로 우리를 친구라 하겠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친구라고 한 사람은 나사로 한 사람 뿐입니다.
  요 11:11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라고 했습니다.
  친구의 집이였기 때문에 언제라도 수시로 방문했고 사적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봅시다.
     
  ③ 대접 잘 하는 마르다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자주 가신 이유는 그집에 대접 잘하는 마르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눅 10:38절에 보면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라고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을에 지나가실 때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음식을 차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요 12:2절에 보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나사로의 집에서 잔치를 했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일을 보고 ... 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이것은 마르다는 살림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들릴 때 마다 좋은 환경을 만들고 정성들여 음식을 만들고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대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는 대접 잘하는 마르다가 있었습니다.

  대접하기 좋아하고 잘하는 마르다, 그가 있었기에 예수님의 발걸음이 나사로의 집에 자주 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대접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잠 8: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성도들은 인색하고 남을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 되지 말고 대접하는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대접 잘해서 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소자 대접 잘해야 합니다. 
  소자라는 것은 우리 주변의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가진 것 없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 그리고 고향을 떠난 나그네들 성경은 그들을 소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10:42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 18:6절에서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실족하게한다는 것은 상처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그리고 마 18:10절을 보십시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라고 했는데 업신여긴다는 것도 역시 멸시 천대하는 것으로서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소자라고 업신여기지 말고 대접 잘하는 사람에게 예수님 찾아가십니다.
 
  주의 일군 대접 잘 해야 합니다.
  주의 일군을 대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종 엘리야대접 잘 했다가 큰 복을 받았습니다.
  수넴의 한 귀한 여인이 선지자 엘리사가 길을 지날 때마다 그에게 음식을 베풀었습니다.
  왕하 4:8-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 고로 엘리사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

  이런 대접 잘하는 여인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들이 없던 수넴 여인은 어떤 복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아이를 주신 것입니다. 왕하 4:16-17절을 보겠습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돌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 대접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 10:42절에 의하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대접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격대접입니다.
  둘째는 말대접입니다.
  셋째는 물질대접입니다.
  주님을 대접하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주의 종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인격대접입니다. 말 한 마디라도 칭찬과 존경의 말로 해야 합니다. 자신의 좋은 것 물질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사르밧 과부의 축복과 수넴여인이 받은 복을 주십니다.

  ④ 말씀 잘 듣는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찾아 오셨을 때 마르다가 대접을 잘하였을 뿐 아니라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언니 혼자서 부엌에서 땀을 흘리고 있어도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사랑받습니다.
  대접 잘하면 칭찬받고 복 받습니다. 그런데 말씀 잘 들으면 사랑받고 귀염 받습니다. 대접도 잘해야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저도 설교 잘 듣는 교인이 좋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한 마디 한마디를 정성들여 듣는 교인 그리고 듣고 깨닫고 깨달은 것을 순종하는 성도가 가장 사랑스럽고 좋습니다.
  왜 설교를 잘 들어야 주님이 기뻐하십니까?

  히 13:7-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으로 주의 종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계 1:19-2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라고 했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즉 목회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계 2:1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 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세우신 주의 종들 사자들을 붙잡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사자를 통해서 말씀을 들을 때 주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설교를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 사람에게 주님은 즐겨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듣는 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듣는 자세가 좋다는 기본적 의미
  2) 듣고 따라 순종한다는 실천적 의미
  두 가지가 다 좋아야 합니다.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설교가 단지 사람의 교훈이나 강연정도로 아는 사람은 결코 주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져야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잘 듣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달은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여야 그것이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나사의 집을 즐겨 찾으신 이유는
  ① 불쌍한 가정 즉 결손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② 대접 잘하는 마르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③ 말씀 잘 듣는 마리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은총이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이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박 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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