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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비유연구(7) - 누가 잃어버린 아들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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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비유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예수님의 비유는 <집 나간 탕자의 비유>입니다. 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누가복음에만 나오지만 예수님의 모든 비유 중에 가장 유명한 비유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학생회 때 수련회를 가면 늘 촌극대회 순서가 있었고 이 <탕자비유>는 촌극 때마다 늘 등장하는 단골메뉴였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 본문을 아무리 찾아봐도 이 ‘탕자’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본문을 통해 왜 이 둘째아들이 탕자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모두 판 뒤 먼 나라 유흥가에 달려가서 ‘허랑방탕’하여 흥청망청 다 써버립니다. 또 그 전에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 몫을 달라고 조릅니다. 신 21:17에 의하면 재산을 상속할 때 맏아들에게는 재산의 2/3를, 둘째아들에게는 1/3을 분배하는데 둘째아들은 이 자기 몫 1/3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재산상속은 주로 아버지의 임종이 임박할 때 이루어졌기 때문에 멀쩡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상속을 요구하는 것은 심하게 말하자면 “아버지, 빨리 죽어주세요”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누가 봐도 이 무례하고 방탕한 둘째아들이 탕자요 그에 비하면 집에서 고분고분 아버지 말을 잘 듣고 있던 맏아들은 정말 효자요 모범생입니다.

다시 찾은 기쁨

오늘 이 탕자이야기는 사실 누가복음 15장 전체의 문맥에서 보아야만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온통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4절부터 7절에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8절부터 10절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11절부터 끝까지는 오늘의 본문인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입니다. 우선 1~2절에 이 세 개의 비유가 나온 까닭이 나옵니다. 본문에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비난합니다. 여기서 이들의 행동을 보면 분명하게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당시 대표적인 죄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세리나 창기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잘 들으려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오려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오히려 주님을 원망합니다. 그 까닭은 왜 예수님이 죄인들, 더러운 인간들, 인간쓰레기 같은 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무지한 자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세 가지 비유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몇 가지의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 가지 모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이야기입니다. 그 잃어버린 것이 여럿 중에 하나지만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자와 여자와 아버지는 그 잃은 것을 애타게 찾고 기다립니다. 결론적으로 그 잃었던 것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이 너무나도 커서 모두가 잔치를 베푼다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묻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애타게 찾는 목자, 잃은 은전 하나를 애타게 찾는 여자, 잃은 아들은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잃었던 소중한 것을 되찾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며 큰 잔치를 베푼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그 잃었던 양, 잃었던 은전, 잃었던 아들은 바로 누구일까요? 죄인을 뜻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세리, 창기, 그리고 죄인들은 모두 잃어버린 양이며 은전이며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인들이 지금 예수님께 나아와 회개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설명하십니다. 이들을 되찾은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한 마리의 잃은 양과 한 개의 잃은 은전, 한 명의 잃은 아들이 바로 죄인들이라면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과 아홉 개의 은전과 한 명의 아들은 누구일까요?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선 이 세 비유에서 안 잃어버린 것들은 어떻게 됐는지 봅시다. 목자는 잃어버리지 않은 양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이 부분에서 어떤 분들은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방치했다고 설명합니다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결코 양들을 방치한 것이 아닙니다. 이 양들은 한 마디로 말 잘 듣는 양입니다. 그냥 들에 두어도 알아서 풀 뜯어먹고 잘 있습니다. 마음 놓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도 될 정도입니다. 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머지 아홉 개의 은전은 아마 식탁 위 같은 곳에 두었겠지요. 거기 두어도 잃어버릴 염려가 없으니 마음 놓고 잃어버린 한 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어떻습니까? 날마다 잃어버린 둘째아들을 기다리느라 아버지는 동구 밖에 나가 서있습니다. 그러면 안 잃어버린 맏아들은 어디 있습니까? 맏아들은 열심히 일하다가 밭에서 돌아옵니다. 가만 놔둬도 알아서 제 일 찾아서 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입니다. 29절에서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31절에 보면 아버지도 이 맏아들이 모범생임을 인정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다”라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분명 목자나 여자나 아버지는 잃어버리지 않은 것들을 결코 소홀히 대하거나 방치하지 않습니다. 다만 남아있는 것들에 비해 비록 소수지만 잃어버린 양과 은전이 너무도 소중해서 그렇게 찾아 나섰고, 비록 말 안 듣는 자식이지만 너무도 소중해서 그렇게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입장을 바꿔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아홉 개의 은전과 결정적으로 맏아들은 이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 봅시다.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비록 목자나 여자나 아버지가 남은 양들이나 은전이나 아들을 함부로 대한 것도 아니고 소홀히 대하지도 않았지만 분명 남은 자들은 기분이 몹시 나빴을 것입니다. “아니, 왜 멀쩡하게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양 아흔아홉 마리는 들에 놔두고 하필 말 잘 안 듣고 도망간 양 한 마리를 찾느라 그 야단이냐? 그러면 그 한 마리가 우리 모범생 양 아흔아홉 마리보다 소중하다는 말이냐?” 하는 것이지요. 남은 은전 아홉 개도 이런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남은 맏아들은 돌아온 동생을 위해 제일 좋은 옷을 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 잔치를 베푼 아버지를 보고 이렇게 불평을 터뜨립니다. “내 여러 해 동안 아버지에게 순종해서 열심히 일했는데도 나를 위해 염소 새끼 한 마리 잔치하라고 주지 않더니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탕자 녀석이 돌아오니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까? 이런 억울하고 불공평 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충분히 모범생인 맏아들이나 남은 양 아흔아홉 마리, 은전 아홉 개의 입장에서 이런 불평이 나올 만도 합니다.

누가 진짜 탕자인가?

그런데 이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맏아들, 혹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 아홉 개의 은전들은 누구를 뜻할까요? 예수님은 이 세 가지 비유에서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이 모범생들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다름 아닌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같은 유대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일 뿐 아니라 율법적으로 완전한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나 창기 따위와 예수님이 어울리고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그토록 불만이요 공격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세 가지 비유에서 주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그래, 너희가 의인이라고? 맞다. 적어도 너희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의인이요 내가 어울린 저 창기와 세리들 같은 죄인과는 다르다. 저 죄인들은 마치 잃어버린 한 마리 양, 한 개의 은전, 그리고 무엇보다 집 나간 둘째아들 같은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너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남은 아흔아홉 마리 양이며 아홉 개의 은전이며, 집에 남아있던 맏아들이다. 말도 잘 듣고, 모범생이란 말이다. 하지만 잘 봐라. 이 맏아들은 집에 다시 돌아온 둘째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아버지에게 뭐라고 불평하냐?” 여러분도 한 번 보십시오. 맏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나 같이 착한 모범생 아들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주더니 저런 탕자요 후레자식에게는 왜 잔치를 베풀어줍니까?”라고 따집니다. 여기서 ‘노한다’는 말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모습을 뜻합니다. 너무 화가 나서 견디지 못하고 흥분하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맏아들은 동생을 지칭할 때 ‘이 아들’(30절)이라고 부릅니다. 원문에 보면 ‘당신 아들’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거부하며 ‘당신 아들’이라고 부르다니 참 해도 너무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아버지는 너무도 나약한 모습으로, 그러나 애원조로 이렇게 설득합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하지만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냐?” 그리고 ‘당신 아들’이라는 맏아들의 표현을 ‘네 동생’으로 고쳐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대답에 맏아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성경에 안 나옵니다. 제 생각에 아마도 맏아들은 더 화를 내며 끝까지 잔치에도 참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맏아들이 바로 자칭 의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나는 죄가 없다는 자기 의에 빠지고, 나는 아무 문제없다는 착각에 빠져서 집 나갔던 동생을 판단하고 정죄한 맏아들입니다. 나아가 둘째아들을 용서하고 따뜻하게 맞이하는 아버지도 마음에 안 든다고 공격하고 불평하는 아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맏아들이 모범생 같고, 훌륭한 아들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왜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어울리냐고 따지고 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이 맏아들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본다면 진짜 잃어버린 아들은 누구일까요? 둘째아들은 집밖의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한다면 맏아들은 집안의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결코 집 나간 둘째아들이 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 탕자도 내 아들이라고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맏아들도 결코 잘 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니, 이 정도가 아닙니다. 둘째아들은 탕자였지만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먹이(쥐엄 열매)조차도 못 먹다가 어떻게 합니까?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켰다”고 합니다. 원어에서 이 ‘돌이킨다’는 말은 ‘제 정신을 차린다’, 즉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개한 둘째아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18~19절을 보세요.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진심으로 회개하고 아버지에게뿐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도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아니, 차마 용서를 구할만한, 나를 다시 아들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할 만한 자격도 없으니 아예 나를 아들로 여기지 말고 종들 중에 하나로 여겨 달라고 말씀드리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 우리는 이 둘째아들이 진심으로 회개했음을 알게 됩니다. 잠시 위기를 모면하려고 꾸며낸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며 무릎 꿇고 항복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이 죄인은 당신의 아들이 될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분노하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탕자요 잃어버린 아들입니까? 오히려 맏아들이 진짜 잃어버린 아들이 아닐까요? 여러분, 우리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 진심으로 회개하여 무릎을 꿇고, 겸손히 그 분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길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큰아들답게

오늘도 우리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모범신자로서 주일성수도 잘 하고, 십일조와 헌금생활은 물론이요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들려주신 바유는 이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사람들을 품어주며 받아주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모범생 신자요 이 정도 믿으면 잘 믿는 것이라고,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와 착각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혹시나 집 나간 탕자나 구원에서 제외된 버림받은 사람 정도로 이해하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오늘도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새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또 교회를 다니다가 잠시 세상으로 빠져 떠났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먼저 태어난 맏아들로서, 아버지 집을 잘 지키며 일해 온 형으로서 너그럽게 그들을 받아주고, 품어주고, 그 한 생명 다시 돌아옴으로 인해 아버지처럼 기뻐 달려가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며 잔치를 벌이는 모습입니까? 그 이전에 혹시라도 돌아올까 노심초사 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라는 모습입니까? 아니면 그까짓 탕자 하나쯤이야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나아가 왜 교회가 나는 놔두고 새신자만, 잃은 양들만 그렇게 신경 쓰냐고 불평하는 모습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교회 잘 나오고, 알아서 신앙생활 잘 하는 분들은 큰아들입니다. 정말 칭찬 받아 마땅한 분들입니다. 교회에 이런 분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교회에는 제 몸, 제 신앙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연약한 분들도 있습니다. 누군가 계속 격려하고 용기를 주지 않으면 금세 쓰러지고 매주 마다 돌보고(care) 신경 써주지 않으면 바로 세상으로 달아나고 딴 데로 새는 길 잃은 양 같은 분들도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날마다 시름 속에 살아가는 분들도 많습니다. 교회는 이런 분들을 잘 돌보고 더 신경 쓰고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니 불평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목회할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잃었던 둘째아들을 기다리고 맞이하고 잔치를 벌여주는 일은 아버지 혼자만 해서는 안 됩니다. 큰아들도 진심으로 아버지와 함께 동생을 맞이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맏아들이 함께 동구 밖에 서서 둘째아들을 기다리고 함께 달려가 얼싸안고 입 맞추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형이 함께 잔치를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형다운 것이고 그래야 진짜 형제인 것입니다. 아버지 혼자 하는 일이 아니고, 목사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함께 동구 밖으로 나가 서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립시다. 저와 함께 그들을 부둥켜안고 입 맞추며 잔치를 베풉시다. 오늘 내가 이렇게 해야 할 나의 동생, 집나간 아들,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저도 탕자요 죄인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나도 죄임인 것을 잊어버리고 남을 정죄하거나 함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 같은 죄인, 집 나간 탕자도 사랑하는 아들이라 딸이라 부르며 맞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사랑 감격하며 오늘도 길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는 좋은 큰아들 되게 하옵소서. 아멘.
(이 하 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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