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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네 아비에게 물으라 (신 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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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들의 거듭되는 배신과 탐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점철된 사랑과 긍휼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순종과 연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지난날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주자주 지난날을 잊어버리는 패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한국 교회는 축복스럽게도 1885년 이후 청교도적 신앙의 물줄기를 받았습니다. 그 후 1903년 원산 부흥운동과 1907년 1월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부터 평양을 중심하고 기독교 문화권이 형성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는 서울을 중심한 기독교 문화권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종교의 사회화와 종교관용주의 정책의 결과 이 땅에는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한 무수한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50대 교회 중에 한국에 20개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명실 공히 한국이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8.15 60주년을 맞이하여 본문에 의지하여 '네 아비에게 물으라'는 제하로 설교하기를 원합니다.

Ⅰ. 기독교를 수용하는 한민족입니다.

선교와 통상의 문호를 열어 준 중요한 계기는 1866년의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면(General Sherman)호의 방화사건이었습니다. 그해 8월 9일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을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목사를 비롯 5명의 백인과 19명의 아시아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는 이 소식을 듣고 문정관을 급히 파송하여 배를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문정관에게 통상과 선교의 목적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는 분명히 천주교가 아니라 야소성교(耶蘇聖敎)를 전하러 왔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관민들은 이들을 공격하여 타살하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을 증거하였고 그에게 한문 성경을 전해 받은 한국인이 그것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본인이 마포삼열 선교사를 찾아와 고백을 함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의 사건은 한국 개신교 선교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쇄국 정책으로 밀폐되었던 한국은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한국의 정세는
① 정치적으로 관료주의 전제군주체제였고 외교적으로는 배타적인 쇄국정책에서 서구문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② 경제적으로는 화폐제도에 입각한 초기 자본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③ 사상적으로는 유교 도덕이 전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나 형식적이었고 정치와 함께 부패되었습니다.
④ 불교는 타락하여 무당과 함께 천박하게 되어서 건전한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자리를 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⑤ 외교적 정황은 1894-1894년의 청일전쟁 1904-1905년의 노일전쟁으로 한반도는 일제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904년 2월 5일은 일본이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습니다. 1905년 11월 15일에는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습니다. 1907년 8월 1일은 친위대가 해산되고 탄약고가 일본에 접수된 날이었습니다.
1907년 12월은 일본군에 대항하는 의병 6,300명이 경기도 양주로 집결한 때였습니다. 1908년 한해만도 일본군과의 교전 회수 1976회에 참전 의병수 82,676명을 헤아렸습니다. 이어 1909년 교전회수 1,738회에 참전 의병수 38,953명을 헤아릴 때였습니다.
이 의병항쟁은 1910년 조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독립군 전쟁으로 발전하는 끈기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1909년 일본정부는 한국 병합에 관한 방침을 마련하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때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안중근 의사는 만주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등 박문을 주살하는 의거가 있었습니다. 지금 안중근 의사의 직손 안웅고(의학박사)씨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완용의 살인계획(미수)을 기독교인 이재영이 일으키는 등 기독교인들의 항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국운이 기울어갈 때 외국의 종교 기독교는 한국 민족의 정신적 위안을 얻는데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 신자가 되는데 결코 주저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들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섭리로 보아야 합니다.
교회로 나온 사람들은 조국의 일을 다른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강한 공동체적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민족의 수난과 함께 기독교적 수난까지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리스도인의 국가관이 정립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순교와 순국을 뗄 수 없는 등식관계에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Ⅱ. 민족교회로 성장하는 한국교회입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 절망으로 변했을 때 기독교는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게 함으로 새 희망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운동의 역사나 바벨론의 포로민의 비운과 역사를 구원론적 입장에서 받아 들였을 뿐아니라 더 나아가 민족 운동의 선구자로서의 성격마저 띄게 되었습니다.
이동휘씨는 "무너져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으라 예배당을 세우라 자녀를 교육시켜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 100만이 되는 날에는 독립의 날이다"라고 설교함으로 국권회복과 민족부활의 비젼을 던졌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간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알렌(Dr. C. Allen)의사는 1년 동안 여러 곳을 다녔지만 만족할 만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알렌은 1884년 9월 14일 상해를 떠나 7일 만인 9월 20일에 지금의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22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여 그는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주재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외국의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주재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알렌만은 서양의술의 힘으로 허용되었습니다.
알렌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올 무렵 민씨 일파의 보수파와 개화당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갑신정변의 금위대장인 민영익이 중상을 입고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장안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한의사 14명을 동원하여 보았으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때 알렌이 나타나서 3개월 만에 민영익의 상처를 완전히 낫게 했습니다. 1885년 1월 17일 민영익은 알렌의사에게 사례의 편지와 함께 10만금을 보냈습니다. 이때 서양의술이 입증되고 궁중의사 즉 어의로 임명되었습니다.
알렌은 예조판서 조병호를 통하여 병원 설립허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죽음을 당한 홍영식의 집을 광혜원 혹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붙여 병원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의료사업이 시작되었고 그는 국왕으로부터 3번이나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때는 성경을 읽다가 발각되면 목베임을 당하고 외국으로 추방당하는 것이 상례이나 알렌에게는 예외였습니다.

그 후에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들어오고 릴리아스 호튼의사(Dr. Lillias Horton)가 와서 광혜원의 여자부를 책임맡는 동시에 왕비의 전속의사가 되었습니다.
그해 12월에는 서대문밖(지금의 아현동)에 시약소가 개설되었습니다. 제중원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었습니다.
장로교 선교부는 1887년 이 병원을 남대문 안으로 옮겼습니다. 알렌은 선교사직을 사임 주미한국공사관 직원이 되었고 대신 호튼이 맡아보았습니다. 서양의사와 병원은 이름 모를 질병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목마른 대지에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교육사업 또한 의료 사업 못지않게 활발했습니다. 아펜젤러는 이미 1885년 11월에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고종으로부터 학교설립 허가를 얻어 놓았습니다.
이태왕은 인물을 배양한다는 뜻의 '배재학당' 이라는 이름을 내렸습니다. 언더우드교사는 1885년에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 붙어 있는 건물을 이용하여 유아원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경신 중·고등학교와 연세대학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1896년에 스크랜튼이 이화학당을 세우고 장로교 선교부는 여자만을 위한 정신 중·고등학교를 1888년에 세웠습니다.
1894년에 숭실학교와 숭실여학교가 세워졌고 1906년에 숭실대학과 세브란스 의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09년에 이화학당내에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1915년에 연희전문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기독교계 학교 수는 모두 823교나 되었습니다.

일본총독 데라우찌는 그의 연설에서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학교의 학생 수가 20만이 넘었다고 한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교육사업의 대혁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초기에 세워졌던 기독교 학교들은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1) 평양 - 숭실학교. 숭의여학교, 광성학교, 정의여학교
2) 광주 -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3) 국산 -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4) 목포 -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5) 재령 - 명신학교
6) 강계 - 영실학교 7) 원산 - 보광학교
8) 이천 - 양정여학교 9) 전주 -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10) 마산 - 창신학교, 의신여학교 11) 신천 - 신성학교, 보성여학교 12) 대구 -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13) 함흥 - 영생학교, 영생여학교 14) 순천 - 매산학교 15) 성진 - 보신학교, 보신여학교
16) 공주 - 영명여학교, 영명학교
17) 인천 - 영화학교 18) 수원 - 삼일학교, 매향여학교
19) 부산 - 일신여학교
20) 개성 - 한영서원, 호수돈여학교, 미리홈여학교

상술한 의료 사업이나 교육사업이 모두가 선교사업의 결과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날마다 노방전도를 시작했고 언더우드 교사의 사랑방에서 집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1893년에 모인 제 1회 선교사 공인회에서는 선교정책이 채택되었고 여기에서 선교영역이 편성되고 순회전도와 선교지구가 확정되었습니다.
각 기독교 전도 운동은 강한 애국 민중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6년 독립협회가 서재필에 의하여 조직되어서 정부의 무능한 정책을 비난하고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습니다.
중요한 인물로는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안창호, 이상재 등 기독교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신민회 흥사단 임시정부에서 기독교 계열의 사람들이 주동이 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한국교회가 민족 교회로서 성장한 뚜렷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Ⅲ.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국교회 입니다.

1) 안악사건
황해도 지방 청년들의 안악 우편국 폭파를 음모했다고 날조하여 그 지방의 항일 투쟁의 기독교 청년 김구, 이승길, 김홍양 등을 구국 체포한 사건입니다.

2) 해서 교육 총회사건
1908년 황해도에 김구, 최광옥, 도인전, 이승길, 김홍양 등을 중심해서 교육총회가 조직되어 교육과 계몽운동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1910년 안중근 독립운동자금과 결부시켜 위 인물들을 고문하고 자백을 강요해서 15년 이상의 중형에 처했고 회원 40여명을 제주도와 울릉도에 유배시킨 사건입니다.

3) 105인 사건
1910년 11월5일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석하려고 떠났던 당시 데라우찌 총독이 선천에 잠시 하차했을 때 기독교인이 그를 암살하려 했다고 모략 날조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신민회 중심의 기독교계 인사 이명룡, 김동원, 윤치호, 유동열, 양기탁, 양전백 등과 목사 6명, 장로 50명, 집사 80명을 포함하여 서북 인사와 교회 지도자 500여명을 투옥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중 125인이 기소되었는데 98명이 기독 신자였습니다. 기소된 자 중 105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것은 철저히 일제의 음모였습니다.

4) 3.1 독립운동 사건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3.1 독립운동사건은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는 한국교회의 강한 공동체적 의식이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립 선언서에 서명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 이었다는데서 이 운동의 흐름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망한지 10년만에 일어난 3.1 운동이 항일 운동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3.1 운동은 우리 근대사에서 특히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3.1 운동 이전의 민족운동은 무장을 한 의병들에 의한 운동과 무장을 하지 아니한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3.1 운동은 이 두 가지를 합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본에 대한 감정은 쉽게 정돈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친일청산의 의지가 엽기적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민족자긍심을 되찾기 위해 친일청산이란 명분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친일청산은 프랑스나 중국을 모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보다는 좀더 차원적이고 창조적인 형태로 전향되어야만 합니다. 2002년 8.15를 앞두고 광복회가 친일파 708명의 명단을 공개했으나 2차 조사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광복회는 장철(張 鐵) 회장이 새로 부임한 이후 친일파 조사작업은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그 대신에 5300여 명의 애국후손회원들의 복지와 애국지사 발굴관리에 초점을 맞춰 사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저마다 자기 조상을 과대 포장하기에 분주합니다. 조상을 들추다가 오히려 사실이 드러나므로 사족(巳足)이 되어 낭패를 보는 웃지못할 일도 있습니다. 여기 모 일간지에 K 논설위원이 기고한 것을 보면 친일 청산의 엽기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도쿠나가 겐지(德永源治)는 관동군 헌병을 하다 경찰로 전직한 경우였다. 1937년 통화성 유하현 경무과 특무계장이 된 그는 1943년 조선독립운동단 10여 명을 검거하고, 45년 동북 실지(失地)회복중앙당원들을 잡아들여 '만주국 경찰소사(小史)'에까지 공적이 올랐다.
도쿠나가 밑에 있던 조선인 특무 한 사람 때문에 지금 한국 정치판이 시끄럽다. 본명은 김일련(金一鍊), 창씨개명한 이름은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 최근 한나라당 조사에서 현지의 독립운동가 후손은 "가나이 에이이치는 칼로 독립군 목을 쳐서 유하강변 버드나무에 매달아 놓았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1940년 만주국엔 2801명의 조선인 경찰관이 있었다. 가나이 에이이치의 죄상(罪狀)이 60년 만에 드러나게 된 것은 그의 딸 덕분이다. "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거짓말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던 이 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대담하게도 과거의 친일(親日)인사를 심판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역사는 우리 근대사에 실패한 역사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후손들에게 매우 교훈적인 역사이기도 합니다. 6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친일 청산은 좀 연구를 해야만 합니다. 그 당시에 청산하지 못했던 역사적 과오로 인한 배려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청산하지 못하고 그들을 등용한 비굴했던 민족양심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일제 과거사 청산은 명분에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른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대립은 언제 어디서나 생산적이어야 합니다. 양자는 모두 국가 의존적 사고로 공통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알 것은 과거사는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단죄한다고 청산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제거, 보존, 고양의 동시적 대상입니다. 그 어떤 것이든지 일방적으로 제거의 대상은 아닙니다. 과거를 무조건 제거나 청산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서는 국가와 민족 앞에 창조적 전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일제에 아부 하면서 기득권을 누렸던 자들을 해방 후 제때 청산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은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그들을 반공전선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을 복구하는데 조국의 산업화에 등용했던 민족양심의 아이러니도 함께 청산해야 할 것입니다. - 아 멘 -
(강 구 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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