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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택하실 그 곳 (신 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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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던 멜 깁슨이 “나는 신은 믿지만 교회는 믿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큰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원래 저 유명한 인도의 간디가 했던 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간디가 믿었다는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자신이 믿는다는 신을 하필이면 기독교의 ‘교회’와 연관시켜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지 간에 간디의 이 말은 멜 깁슨의 경우처럼 오늘날 기독교의 교회를 외부에서 비난하거나 혹은 내부에서 스스로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는 공히 무슨 제1계명처럼 인용되고 있습니다.
  ‘신은 믿지만 교회는 믿지 않는다.’라는 말이 일견 기독교라는 종교의 체계 그 자체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점들을 아주 통렬하게 정곡을 찌르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개인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와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 이 둘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관계를 부인하고, 오히려 교회야말로 참된 신앙을 찾는 길에 최대의 장애물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행군이 끝나고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둔 시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아주 특별한 지시를 하나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여러 번 강조되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단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오직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예배드리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 예배처소, 한 성소를 중심으로 하나님 섬기는 신앙생활을 지켜야 한다고 엄중히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따라서 우리 개혁주의 신앙인들이 지키고자 하는 생활원리 중에 하나가 바로 ‘교회중심’의 생활입니다.
  이 시대의 불신자들이나 이단적인 기독교인들의 그토록 입을 모아 비난과 욕을 퍼붓고 있는 교회를, 저와 여러분은 기독신자가 참된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죽어도 떠나서는 아니 될 산성이요 요새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개혁주의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처럼 가나안 땅에서 오직 ‘한 곳’을 택해 주시고 그곳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도록 명령하셨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주신 말씀을 가지고서 오늘날 왜 우리가 이처럼 안팎으로 비난을 받는 ‘교회’를 중심으로 더욱 철저히 살아야만 하는지 그 이유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중심의 생활만이 우상숭배의 미혹으로부터 참된 신앙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 너희가 쫓아 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얻게 하신 땅”이란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가나안 입성이 이미 이루어진 약속이나 다름없다는 표현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얻게 하실 땅에서 그들이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라고 했으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우선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 즉 가나안 족속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 즉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던 장소들을 “마땅히 파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섬기는 곳”이란 말이 바로 ‘예배 장소’라는 뜻인데, 오늘 본문 전체에 걸쳐서 핵심 단어이자 주요 관건이 됩니다.
  그처럼 우상 숭배로 사용되던 예배 장소들을 파괴함으로써 “그 (우상의)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종교와 그 예배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바른 신앙생활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땅에 있던 우상숭배를 척결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우상들을 숭배하던 장소들부터 깨끗이 근절시켜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예배를 드려야 할 새로운 장소 한 곳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바로 4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라는 말은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던 식으로 하지 말고’라는 뜻입니다.
  가나안의 우상숭배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예배처소를 아무 데나 편리한 곳에 임의로 만들었습니다.
  가까운 뒷동산 즉 “높은 산이나 작은 산”에다가 “제단”을 쌓는다든지, 마을 입구에 있는 “푸른 나무 아래”에 “주상” 즉 돌기둥 같은 것 하나 세워 놓는다든지, 자기가 농사짓는 밭 어귀에다가 “아세라 상” 즉 풍요의 여신을 상징하는 목상 하나 세워 둔다든지, 혹은 집안 선반 위에 “조각한 신상” 하나만 갖다 놓으면, 바로 그곳이 곧 “그 신들을 섬기는 곳” 즉 예배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는 “그처럼 행하지 말고” 그 대신에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만을 예배 장소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두셨다’는 뜻은 바로 그곳에 와야만 참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며,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이란 말은 사람이 자기 멋대로 정한 장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서 정해 주신 장소임을 강조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그 거하실 곳”이란 표현은 바로 그 지정한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려고 기다려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한 곳’으로 택해 주신 예배 장소는 소위 ‘중앙 성소의 단일화’라는 개념으로 요약되는데, 훗날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후에 실로에 회막을 세운 것이라든지 더 나중에 가서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실현된 것입니다.
  하여튼 어떤 장소이든지 간에 하여튼 요점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장소’라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뚜렷이 강조하고 있는 대로, 바로 그 정해진 한 장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찾아 나아가서” 예배를 드려야만 했고, 그 각종 제물들도 반드시 “그리로 가져다가” 제사를 드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인들처럼 자기 편의에만 따라서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장소에 모여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대로만 예배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우상들과는 전혀 다른,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의 이름을 배우고 그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를 ‘자기 이름을 두시고’ 친히 ‘거하고’ 계시는 유일한 ‘그곳’으로 택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로 ‘찾아 나와서’ 그 성호에 영광을 돌리고, 또한 예물을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면서’ 그곳에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만 합니다.
  폐일언하고 교회에 나아오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신령하고도 구체적인 교제를 제대로 지속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믿는 것’은 아주 고상해 보이고 반면에 ‘교회에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참된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입니까?
  자기 스스로 끙끙 앓으면서 도를 닦으면 참 신을 찾을 수 있고 반면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엉뚱한 신을 찾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논리입니까?

  그 아무리 지혜롭고 종교적이고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신을 찾으려 하면 여지없이 자기에게 편리한 신만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자기 학문에 맞는 신, 자기 돈벌이에 힘이 되는 신, 자기 자식 교육에 도움이 되는 신, 자기 여가선용에 편리한 신만을 찾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신은 자기 망원경 속에 보이는 우주에 그 ‘제단’을 두게 되고, 자기 회사나 공장 입구에 그 ‘주상’을 세워 놓게 되고, 아니면 바로 자기 마음속에 ‘스스로 조각한 신상’ 하나를 갖다 놓고 섬기는 우상이 될 뿐입니다.

  그처럼 사람이 자기 눈으로 찾아서 발견되거나 사람의 상상력의 결과로 빚어지게 되는 신이 어떻게 참 신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진짜 신이라면 처음부터 사람이라는 존재와는 상관없이 영원 전부터 자존하고 계시는 신이 되어야 마땅하고, 바로 그 사실을 신의 자기계시를 통하여 스스로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마땅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지상교회의 삼표식 중에서 제일 처음 것인 ‘말씀 선포’를 통하여 오늘도 행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직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말씀 중심’이 될 수 있고, 그처럼 ‘말씀중심’의 삶이 되어야 진정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찾고 깨닫고 믿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 집에 앉아서 자기 혼자서 설교하고 자기 스스로 은혜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오직 교회중심의 생활만이 우리를 노리는 온갖 우상들과 이단들의 유혹과 속임수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음을 깨닫고, 바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고 일러 주신 곳, 만나자고 지정해 주신 ‘그곳,’ 이 교회에 늘 찾아 나아와서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바른 진리를 찾고 참된 신앙을 지키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중심의 생활만이 육신안락의 방종으로부터 충성된 생활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본문 8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 /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라는 말은 지금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광야의 신세대’ 바로 앞에 살았던 ‘출애굽의 구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렀던 치명적인 잘못을 되새기는 말입니다.
  물론 그 구세대는 바로 그 죄로 인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광야 40년 생활 중에 다 죽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가 여기서는 했지만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아라.”고, 못난 부모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각기 소견대로” 즉 ‘제 멋대로’ 행동하던 과오를 반복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신세대들이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지만” 그들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되면 곧 누리게 될 복스러운 생활을 가리켜 “안식과 기업”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안주할 땅을 찾아 방황할 필요도 없고, 대적과 싸워야 할 위험도 없는 “평안한” 거주의 복, 즉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또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찾기 어렵던 광야와는 달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안정된 ‘기업’을 통하여 더 이상 결핍될 것이 없는 물질적 풍요의 복도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안식’과 ‘기업’을 누리며 ‘평안히’ 살게 되는 가나안 땅인지라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바로 이어지는 11절과 12절에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앞절에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라고 가나안 땅에서 육신적으로 복을 받고 살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신 직후에 곧 이어서 다시 한 번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안식과 기업’을 누리고 있는 그 자리가 그들의 생활 중심지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입니다.
  추수를 하여 곡식을 거두고 짐승을 잡고 고기를 얻었으면 그것을 가지고 바로 그 자리, 자기 집안, 자기 동네 안에서 그대로 잔치를 벌이지 말고, 반드시 그 잔치 음식들을 몽땅 다 들고 그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그곳’으로 가지고 가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육신적 물질적으로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게 해 주시는 목적은 그것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네들끼리만 즐기고 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대신에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그 모든 축복의 소산물들을 ‘그곳’ 즉 예배 장소로 가지고 와서 “번제와 희생과 십일조와 거제와 서원물”들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 각종 예물을 바치면서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안식’은 그저 놀고 즐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부지런히 하나님 앞에 모이라고 주어진 시간이요, 그들에게 주어진 ‘기업’은 그저 자기만을 위해 쌓고 모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단에 더욱 풍성하게 바치라고 주어진 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까 7절도 다시 보시면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얻은 물질을 가지고 그것만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육신적 향락의 죄가 되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갖다 바치면서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줄 아는 것은 오직 참된 신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예배의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가나안 정착은 안식을 주는 동시에 게으름의 위험이 도사리는 것이며 부요를 보장해 주는 동시에 방종으로 흐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처럼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곳’으로 그 받은 복과 소산을 가지고 나와서 “자녀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레위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눔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역시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섬기는 수단으로 선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중심으로 살지 않고 자기 혼자서 잘 믿겠다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구세대가 저질렀던 잘못, 즉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종교를 자기 원하는 대로 이용해 먹자는 심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중에서도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은 취하고 자기 싫은 것은 거부하면서 교인 노릇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자기 종으로 여기는 무례하고 폐역하기 짝이 없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자기 소견’을 제일 앞세우게 되는 분야가 바로 예배생활과 헌금생활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가 누리는 육신적인 편안함에 방해가 되는 주일 예배 시간들, 주중의 예배와 기도회 시간들이 아주 마음에 거리끼게 되고, 그 중에서 자기 편리에 맞는 예배 시간 하나만 겨우 선택합니다.
  자기가 마음껏 돈 쓰고 즐기고 싶은 유흥에 지장을 주는 헌금이 늘 마음에 시험거리가 되어서, 그저 간신히 십일조만 하든지, 십일조 한다고 하면서도 속여서 하든지, 아니면 아예 십일조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그저 ‘자기 소견에는’ 그것을 합리화하는 핑계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처럼 자기 중심이 아니라 교회 중심이 되어야만 그런 죄에 빠지지 않고 정말 신실하고 충성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학교를 빼 먹은 학생이 집에 앉아서 어떻게 더 열심히 공부를 할 리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아니하고 집안에 앉아 있으면, 기껏해야 텔레비전을 보든지 낮잠을 자든지 하는 게으름에 빠질 뿐이고, 혹은 여러 가지 악한 유혹에 이끌릴 뿐이지, 집안에서 텔레비전 방송으로 더 경건하고 더 뜨겁게 예배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기 소속된 부대에서 탈영해 버린 군인이 어떻게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그 임무를 수행할 길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를 통하여 헌금생활을 비롯한 교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선한 봉사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면, 우리 중에 누가 개인적으로 더 많이 희생하고 자발적으로 더 많이 선한 일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기독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하는 일보다는 사회에서 직접 해야 할 좋은 일들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생존 목적 그 자체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한 가지에만 있습니다.
  그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하나님의 명하시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곳’으로 가지고 나와서 바치면서 시작해야 할 뿐입니다.
  혼자서 집안에서 ‘자기 소견’을 따라서 제 아무리 잘 하려 한다 해도 결국 자기의 안락과 방종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중심의 생활이란 결코 개인의 자유를 방해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죄인들의 고질적인 나태와 불충을 막아 주는 것인 줄을 깨닫고, 자신의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까지도 늘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바치고 선용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13절과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강조하시면서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고 재차 다짐하셨습니다.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라”는 것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자기 편리한대로,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을 따라서#336699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1절 서두에서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 즉 하나님께서 신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원히 변치 못할 절대 원리로 주신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의 산물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과 필연성과 중요성은 교회를 함부로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어떤 교권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 결코 아니라, 바로 하나님 당신의 직접 명령,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 그리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창립하심으로써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신앙의 방해물이 될 수 없고 오직 신앙고백인의 집결지, 신앙진리의 사수지, 신앙생활의 실천 장소가 될 뿐인 것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있는 한 개인 신자, 한 개인 목사가 잘못하는 일들은 분명히 많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 전체를 함부로 비난하고 거부하고 모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이 잘못한다고 무정부주의자가 되려는 것이나, 국민 중에 범죄자가 있다고 해서 자기 조국 전체를 부인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매국노이며 반역자가 될 뿐 아니겠습니까?
  꼭 마찬가지로, 제 아무리 교회 비난하는 말들이 그럴 듯하게 들려도 그처럼 ‘모이기를 폐하는 자’의 말들은 여지없는 사단의 소리일 뿐인 것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참된 진리를 찾는 데에 방해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없으면 참된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이 아예 불가능해집니다.
  교회가 어떻게 개인 신앙의 순결을 저해하는 단체가 된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없으면 온갖 향락들이 유혹하는 인생살이에서 우리의 삶을 거룩하고 순결하게 통제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온갖 우상숭배 사상과 불신문화에 싸여 살다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 불리고 높여지고 찬송되는 이 교회에 모이게 될 때, 여러분 정말 행복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 교회는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을 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이 거룩하고도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친히 만나 주시마고 약속하시고 기다려 주고 계시는, 이 지상의 유일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같이 사는 걱정, 노동의 피곤, 인간관계의 복잡한 것들에 찌들려 살다가, 이 성전의 문지방을 넘고 들어오는 순간 성도들을 만나고 하늘의 아버지 품에 안길 때 정말 영육 간의 안식과 평안에 휩싸이게 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이 교회는 악인과 오만한 자들이 모인 자리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나님 앞에서 모여 즐거운 잔치를 하는 자리이며 성도들이 한 주간 동안 받았던 축복의 열매를 제물로 가져 와서 복음의 사자들과 함께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이 지상의 유일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체험도 없이 교회 출석하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교인들일 뿐이며, 그런 체험도 모르면서 교회가 어쩌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은 인간들일 뿐인 것입니다.

  바른 신자라면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인 교회중심의 생활, ‘여호와께서 택하신 그곳’에서 바른 예배드리며 선한 일에 함께 힘쓰는 생활을 통하여 더욱 경건하고도 충성된 개혁주의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  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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