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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인정하라 (행 9: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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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음력 설 연휴 마지막 날 밤에 ‘백정의 딸’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습니다.
실제인물을 극화한 것이라 관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신분 사회에서 백정은 사람으로 취급도 받지 못하는 데, 백정의 딸 언년이가 스크렙톤 선교사 주부를 만나면서 온갖 멸시를 극복하고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하여 당당히 졸업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동생은 병원에서 잔심부름을 하다가 정식으로 의학을 공부하여 한국 최초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백정의 딸로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당당히 서는 그 여인을 보면서 신분의 차이로 인해 비천하다는 이유로 짓밟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한 인간으로 서 인격체로서 사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몰론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합니다.
사회구조가 그러니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경 속에서도 한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영혼을 인정하면서 사랑을 쏟을 때 존귀한 존재로 귀한 사람으로 쓰임 받음을 보면서 사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을 인정하는 편입니까? 배척하는 편입니까?
사람을 세우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넘어지게 하는 사람입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우리가 본 본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 그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가 그 배경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강력하게 체험 한 후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님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감격 때문에 그는 오히려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이제 예루살렘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복음전하는 교제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울을 두려워하며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도 그걸 것이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무조건 잡아들이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를 아는 사람이 과연 쉽게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그를 인정해 줍니다.
그가 어떠한 경험을 했는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그를 받아들입니다.
과거의 경험으로는 그를 받아 주고 인정할 수 없지만 바나바는 그를 받아들입니다.
인정해 줍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바울이라는 귀중한 한 사도를 얻게 됩니다.
이 세상의 역사를 바꾸어 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인정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배우게 됩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곧 그 사람, 그 자체를 인정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환경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격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습관이 다릅니다.
가치관도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쉬울 리 있을까요?
한 가정에서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고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상사와 부하 직원 간에 동료간에 형제간에 친구 간에.
우리 가정에서도 그렇잖아요? 
남편은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고 능력을 인정받고 싶고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서로 인정해 주면 가정 안에 공동체 안에 화목이 꽃이 핍니다.
그러나 인정해 주지 않으면 사람은 고독해 집니다.
무시로 인해, 고독해지면 부정적이 되기 쉽습니다.
곧 양심과 분노와 미움이 싹트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느혜미야가 성벽재건을 할 때 그의 대적들인 호론 사람들이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느헤미야를 조롱하고 무시하며 군사적 위협을 가해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를 조롱하고 무시함으로 그를 낙담시키기로 작정하고 자신감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울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느4:3)
사실 이로 인해 느혜미야의 마음이 약해지고 흔들입니다.
한 민족의 지도자,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도 무시당하고 조롱 받으면 낙담하고 약해지는 데 일반적인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여기서 그 사람의 소중한 재능이 제한 받습니다.
100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 70, 50, 40,으로 떨어지고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재능, 은사를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화평과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복수를 하기도 합니다.
보도되는 사건들 가운데 가꿈 무시당함으로 인해 보복당하는 기사들이 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무시당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그리고 공동체에 있어서 좋지 않은 결과를 낳고, 하나님 안에서 손해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은 먼저 우리 안에 있는 편견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의 범주 안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조롱받기 까지 합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본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아이십니다.
그런데 저들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이유에서 목수의 아들이라는 이유에서 배척하고 무시합니다.
오늘 바울인 사울도 그런 것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잘 압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스데반을 죽이려고 하던 사울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가 예수를 말하지만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바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편견이 바울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시하는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 우월감,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서로를 무시하게 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교만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무시하고 그 제자들을 무시한 것입니다.
사회적인 지위와 역할, 신분 등, 모든 면에서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권세 있는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분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방해거리가 된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혹 그런 마음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사회적인 경험을 더 많이 했다.” “내가 더 많이 배웠다” “내가 기도를 더 많이 했다.” “내가 십일조를 더 많이 하고......”
이 영적인 교만이 목회자를 무시하고 성도를 무시합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깨트리는 무서운 적입니다.

사람들 속에는 은근히 남을 무시하고 정죄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김동길 박사가 그런 고백을 하더군요.
지금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만 한때 이분이 정치를 한답시고 모 정당(국민당)의 대료표도 하고, 이런 저런 책임을 맡아서 했었는데 지금은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물러났습니다.
그 때의 심정을 이야기 하더군요.
자기 안에도 은근히 남을 무시하고 낮추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더랍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하셨습니다.
아담을 보고서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사람’자체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인격, 개성, 그 자체를 존귀히 여기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사람들 마음속에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을 넣고 그리고 무시하는 말 속에 독을 넣어 찌름으로 ‘심히 좋은’ 가능성들을 잠재워버립니다.
선한 것을 개발하려는 의지를 여지없이 꺾어버리고 맙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1. 다양성을 인정하라.

각자가 다양성을 인정하십시오.
////// 엡 4:7절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라고 합니다.
각 사람마다 저마다의 다른 재능과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정도가 다릅니다.
//////롬 14: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연약한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라”(롬14:1,3)
성경에서도 믿음이 연약한 자와 믿음이 좋지 않은 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배경도 다릅니다.
각기 다른 부분을 인정하고 우리는 교제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이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내 방식대로 내 생각대로 끌어가야겠다.”고 한다면 불협화음이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해 주면서 서로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가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다른 그 어떤 사람에게 불편했습니까?
“나는 저런 스타일은 싫다”고 하십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것을 존중해 주세요.
그러면 편해집니다.
내 마음이 넓어집니다.
시원해집니다.
그렇게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2. 들어주라.

이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말을 무시하고 건성으로 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사람에게는 존재인식이 있습니다.
때문에 자기의 말을 들어 주는 사람에게 자기의 마음과 몸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고 내 말이라면 다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아무리 월급을 많이 주어도 나를 무시하고 나를 일군으로만 부려먹는 곳에서 일하기보다, 비록 월급은 조금 적어도 내 제안을 들어주고 내개 재량을 베풀어 주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고, 나에게 격려해주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들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 동역 의식을 가지고, 서로 서로가 말을 들어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록 그 사람의 말이 합당하지 않은 방법이라 하더라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함께 생각해 보자고 격려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제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하고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어울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울과 함께 하기를 두려워합니다.
누구도 그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사울의 말을 들어줍니다.

오늘 분문에 보면 바나바가 사울을 위하여 변론해 주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 그가 사울의 모든 것을 다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받아 줍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이로 인해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를 얻게 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한 사람의 중요한 일꾼을 얻게 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한 사람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들어주십시오.
여러분이 남편의 말을 들어주면 여러분은 남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얻게 됩니다.
아내의 말을 들어 주면 훌륭한 내자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의 말을 들어 주면 여러분은 수많은 응원군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믿고 맡겨라.

그러면서 믿어주고 맡겨주십시오.
바나바는 바울의 말을 들어준 것만이 아니라 그의 말을 믿었습니다.
곧 그를 인정하고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그의 일을 맡깁니다.
이로 인해 사울은 큰일을 하게 됩니다.
사울은 바나바와 동역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가 생겼다는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그 교회에 지도자를 파송합니다.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가서 보니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충만합니다.
그 교회가 점점 더 성장하고 강해지자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데 바로 바울을 택합니다.
그가 다소에 가서 사울을 부르자 바나바의 부름에 기꺼이 응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방의 선교사로 동역하며 나갑니다.
사람은 인정해 주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동역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부족함이 있지만 서로 들어주고 믿어 주고 인정하면서 나갈 때 우리는 좋은 교회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단번에 되지 않아도 인내하고 참아 가면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의 틀을 고쳐 세워간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교회가 되어질 줄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람을 세우는 자리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연약한 자라 할지라도 보족한 자라 할지라도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정해 줌으로 인해 한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역할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는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박 영 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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