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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귀한 자 (사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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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사람이 사는데 필수적인 요소가 ‘텔레비전’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텔레비전의 프로그램가운데 어떤 것을 주로 보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답변을 한 것이 ‘드라마’였습니다. TV의 프로그램이 아주 다양한데 의외로 사람들이 드라마에 푹 빠진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인기 리에 끝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아실 것입니다. 시청률이 50%가 넘었습니다. 말이 50%이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국민의 2명중에 1명은 이 드라마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드라마에 뭔가 마력처럼 끌려가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드라마는 실제가 아닙니다.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웃지 못할 일이 있더라구요. 어떤 성도가 평상시 나오지 않던 새벽기도에 매일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그 가정에 큰 일이 생긴 줄 알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가 즐겨보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병으로 죽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큼 드라마에 빠져야 이런 현상이 생기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위력이 대단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 사람들이 드라마에 빠지는 것일까요? 미디어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만 그 중에 대표적인 이유는 드라마를 보면서 자기를 마치 드라마의 인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라마의 주인공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동일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적으로 ‘대리만족’이라 부르기도 하고, 철학적으로는 ‘자기존재의 확인’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 드라마가 끝난 뒤에 열등감이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가졌고, 특히 뚱뚱한 사람들의 기가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끝난 뒤, 대한민국의 김삼순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개명을 생각했고, 실제로 개명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떤 방식이든지 자기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마치 드라마의 인물이 되어 자기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신앙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되고, 그것을 알면서 풍성한 삶은 만들어지고, 인생의 어떤 시련과 어려움도 극복하고 낭패와 실망을 이기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의 존재가치는 어떤 것입니까? 본문은 바로 그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4절에서 성경은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대합니다. 이것이 나의 실체입니다.

  본문은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인지 이유를 알려줍니다. 적어도 3가지의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우선,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7절에도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물론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연도 동물도 세계와 우주도 만드셨습니다. 모든 창조가 끝날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을 봅니다. “보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모든 것에 이런 말을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가장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천지창조는 인간창조를 위한 서곡이요, 전주곡처럼 보이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가장 기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작품’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보통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걸작품’입니다. 요즘 아이들의 노래 중에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것이 있던데 인간은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것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아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혼신을 힘을 기울여 만든 귀한 작품에 대해 가장 크게 갖는 애착은 바로 그 작품을 아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귀한 작품은 팔지 않습니다. 온 정성을 기울여 만든 작품은 평생 그가 보관하면서 보고 또 보고, 그것을 자기가 죽은 뒤에도 후손에게 물려줍니다. 작가의 힘이 실린 작품은 돈으로 가치를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고, 정말 아끼는 것입니다.
또한 만든 사람만큼 그 작품에 대하여 아는 자가 없습니다. 시계를 만든 자가 시계를 잘 압니다. 자동차를 만든 자가 그 자동차를 잘 압니다. 자기 손을 걸쳐 만든 작품의 구석구석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아끼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나에게 쏠려 있습니다. 나를 세상에 보내고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에서 한 순간도 멀어질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하나님만큼 우리를 아시는 분이 없습니다. 그분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아는 것보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나의 약점과 강점을 아시고, 나의 부족과 연약함을 아십니다. 나의 사정과 형편을 아시고, 나의 삶의 모든 것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존귀한 자입니다. 이것을 새기면서 힘과 용기로, 긍지와 자부심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1절의 말씀을 다시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위로의 선포요, 이것이 또한 존귀한 자인 확실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보통 부르신 것이 아니라 지명하며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양과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주셨다’고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셨고, 내 이름을 생명 책에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여기 지명하여 부르셨다는 말에서 우리는 부르심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발견합니다. 그것을 다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구속하였다는 말로 그 의미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여기 구속이란 말은 보통 구원이란 말과 비슷한데 의미는 다릅니다. 구속이란 말은 값을 지불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부르기 위해 그만큼의 값을 치렀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분을 고난받게 하셨고,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며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의 절규를 외면하시면서 참으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구속하였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으로 부르심에 대한 가치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이 놀라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놀라운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셨던 모든 사람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확인합니다. 분명 우리가 존귀한 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아브라함을 부르신 모습을 통해 우리로 복을 주시기 위함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당대와 후대에 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부름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복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날마다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받고 누려야 합니다.

  모세의 부름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백성의 신음소리를 듣고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백성을 위한 섬김과 봉사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모세는 평생 그 부르심의 뜻을 잘 이룬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이 땅에 많은 사람을 위해 나를 불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우리는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을 알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내 모든 삶이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구원받아 행복해서는 안됩니다. 나를 통해 다른 사람도 믿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름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를 이런 관점에서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나는 믿는 자의 본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나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에게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니면 아무런 영향이나 힘을 주지 못하는가? 내 삶이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부르심을 목적을 잊지 마십시오.

  셋째,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여기서 끊어야 합니다. 왜 존귀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다음의 말씀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 살기에 우리가 존귀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우리가 존귀한 이유는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에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고 이끄시는가를 다시 두 가지로 보여줍니다. 먼저,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처음부터 시작되고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 이스라엘이 실제로 두려움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와 아픔 속에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놀라고 있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라고 그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키워보면 아이들일 종종 잠을 자다가 무서워 놀라고, 울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잠을 자는데 갑자기 번개가 치는데 어른인 저도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이런 경우에 더욱 아이들은 자다가 놀라 엄마 아빠 방으로 달려오게 됩니다. 이럴 때 엄마, 아빠가 어떻게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편안하게 하고 잠을 재웁니까? 그 아이의 가슴을 토닥거리며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엄마 여기 있다, 아빠 여기 있다” 하며 아이를 진정시키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고 아이는 편안하게 잠을 잡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다루십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떨 때, 놀랄일이 찾아올 때, 하나님은 내 마음을 토닥거리며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하나님 여기 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놀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시키고, 우리를 안심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사랑의 음성을 이렇게 들려주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우리의 인생에도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가 있으며, 불 가운데로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도 때론 고난과 역경을 만납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이 찾아오고, 거친 파도가 밀려오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못하고 마치 인생의 패배자처럼 그렇게 침통하게 보낼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나를 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도,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요, 이것이 그 모든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연약할 때에 더욱 나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우리는 어떤 인생의 역경과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분이 지금 바로 여러분의 곁에 계십니다. 그분을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불러보십시오. 그분을 간절히 찾아보시고, 그분의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나는 존귀한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이고, 하나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기울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시면서 힘있게, 당당하게, 자신 있게 한 주간도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 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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