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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를 세우신 예수 (마 9:3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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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우시고, 이 사도들을 향하여 목회의 지침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그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본다면, 좀 더 쉽게 깨달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1. 9:35~38 : 목자의 필요성을 언급하십니다.
2. 10:1~4 : 예수님께서 친히 목자를 세우시는 내용입니다.
3. 10:5~15 : 세우신 목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이는 세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이방인에게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2) 목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과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3) 목자로서의 자세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라는 말씀에 그 성격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에 따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목자의 필요성(9:36~38)

예수님의 공생애의 대부분을 표현하는 말씀이 35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렇게 사역을 감당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시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시게 됩니다. 그것은 이들을 가까이서 인도해 줄 목자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안타까운 마음을 제자들에게 토로하시면서, 기도의 제목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지만은 일군이 적구나.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단독으로 일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제자들을 이러한 복음 전파와 치유 사역의 동반자로 부르시고자 계획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와 계획을 움직인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는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민망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백성들이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권세자들에게 시달리고, 이들의 연약함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는 그러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신 것 같습니다. 이들이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지만, 예수님 혼자서는 이 일을 다 감당할 수 없기에 느끼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일군을 청하라고 기도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을 세우심(10:1~4)

결국 예수님은 이러한 안타까움에서 12제자들을 따로 세우시게 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을 세우시기 위해서 나름대로 준비를 하시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자원하는 심령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신 후에 사도로 임명하십니다(막 3:13).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밤을 지새우시면서 기도하신 후에 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눅 6:12-13). 이렇게 제자들 중에서 12명을 택하여 특별히 “사도”라는 이름으로 세우시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도(The Apostles)”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보내는 분이 그 권위와 능력과 사명을 전권으로 위임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 시절의 “제자(Disciple)”란 말은 일반적인 의미의 말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을 “제자”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이와 달랐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 능력과 권세와 사명을 전권적으로 위임받은 사람을 “사도”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12명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사도로) 세우셨다”라는 표현이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마가복음에는 “사도로 세우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세웠다”는 말의 직접적인 의미는 “만들다, 창조하다”의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서 12사도를 세우신 사실은 아주 의도적이고, 획기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12명이냐?”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구구한 이론이 없습니다. “12 사도”로 못 박은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염두에 두신 것이라고 모든 학자들이 다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후대의 성경학자들은 “교회가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이란 사실”을 논증해 내고 있습니다. 교회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이스라엘처럼 “새로운 이스라엘(New Israel)”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이스라엘(Old Israel)은 자기들만이 구원의 대상인 줄 착각함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명을 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바로 “새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점에서 “사도”란 바로 교회의 중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사도성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도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10:5~15)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은 이러한 사도들에게 여러 가지 지침을 내려 주십니다. 이러한 지침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이나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모든 교회의 목회의 뼈대가 되는 내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세상이 변함에 따라, 이러한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불가능할지는 몰라도, 그 성격은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이방인에게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에게로 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그 당시 12사도에게 해당되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승천을 앞두고 이 사도들에게 다시 명령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 28:19~20이 바로 그 내용인데, 여기에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유대인의 범위를 넘어선 선교를 명령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이방인들에게보다는 먼저 이스라엘에게로 가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진 선교의 테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무엇보다도 먼저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도 행 1:8에서 선교의 범위를 예수님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복음전파의 범위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땅, 그리고 사마리아와 나아가서는 땅 끝까지로 확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연관시켜 영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활동이 어떤 면에서는 먼 곳에 나가서 전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부터 먼저 전도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2) 사도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과 고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는 사도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사명을 7~8절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이러한 사명을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신 일과 비교해 보십시다.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거의 같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모습에서 오늘날 교회의 4가지 사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선포 혹은 설교(Kerygma), 말씀의 가르침(Didache), 봉사(Diakonia), 친교(Koinonia)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4가지 사명은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사역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말씀을 선포(Kerygma)하셨습니다. 이 선포라고 하는 성격의 사역은 사실 아주 엄격한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 연속극에서 사극(Historic Drama)을 볼 때, 가끔 왕의 명령을 전하는 모습을 봅니다. 왕명을 받은 사람이 왕명을 전할 때, 뭐라고 합니까? “어명(A royal command)을 받으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왕의 명령을 받을 사람은 그 사자 앞에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한 후에 그 왕의 명령을 받습니다. 심지어 그 왕의 명령이 비록 “사약(The king's bestowal of poison as a death penalty)을 받아 마시고 죽으라”라는 명령일지라도 무릎을 꿇고 절을 한 후에 받습니다. 그리고 그 왕의 명령에 지체함이 없이 순종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Kerygma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Kerygma에는 어떤 타협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 Kerygma에 해당되는 모습이 바로 “설교”인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씌어진 하나님의 말씀(The Written Word of God)으로 “성경”, 또 하나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The Incarnated Word of God)으로 “성만찬”,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The Spoken Word of God)으로 “설교”라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또는 구약의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며 가르치신 모습을 봅니다. 이를 디다케(Didache)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의 성경공부에 해당되는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는 모습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봉사(Diakonia)와 친교(Koinonia)”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봉사를 말하는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말에서 집사라는 말인 Deacon이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일에 봉사하는 집사님들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아주 귀한 사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도의 자세 :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라는 말씀에 그 성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권세,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세와 더불어 어떤 자세로 이 사도의 임무를 감당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9~15절 말씀입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러한 사도의 자세의 성격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8절 하반 절에 있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9~15절의 구체적인 말씀이 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의 자세의 성격은 궁극적으로는 마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10장 전체에 나타나는 사도에 대한 가르침과 산상수훈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무방비에 관한 말씀(The disciples are defenseless)

9-10절.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또 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에 해당하는 산상수훈은 5:38-42의 말씀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 박해에 관한 말씀(The disciples are persecuted)

10:17-23,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이에 대한 산상수훈의 말씀은 5:10-12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제자들이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다는 사실에 관한 말씀(They are under God's care)이 있습니다.

10:28-3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에 대한 산상수훈의 말씀은 6:25-3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렇게 예수님은 이미 가르치신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제자들과 사도들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교회에서의 모든 목회적인 삶은 이 세상 속에서의 크리스천의 삶과 같은 성격의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실은 교회가 사도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12명의 사도들을 세우셨습니다.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새로운 이스라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도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사도들만이 이러한 사도성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일반 제자들도 삶 속에서 이러한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사도들은 이러한 산상수훈의 정신에 입각한 예수님의 목회적인 가르침을 감당함으로 사도와 제자 모두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 주어진 삶을 감당하는 모습에서 사도성이 세워질 수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비록 사도들에게 주신 지침의 말씀이지만, 이 정신이 산상수훈에서 왔다는 사실은 일반 제자들 역시, 이러한 교회의 사도성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교회에 아무리 사도라는 이름의 지도자가 있다 할지라도, 일반 성도들이 사도의 사도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세와 마음이 없다면 사도의 사도됨의 모습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이러한 교회는 결국 사도성을 간직하지 못한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이와는 반대로 일반 성도들의 마음과 자세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사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 역시 교회의 사도성은 존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각기 처한 자리에서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이러한 제자로서의 삶의 모습을 배우면서 익혀 나아가는 데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모습 속에 우리는 사도의 권위 즉 교회의 권위를 지켜 나가며, 감당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습과 자세가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노  강 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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