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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과 평안을 주는 사람 (잠 29:15~17, 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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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 ‘모소’라는 대나무가 있습니다. 이 대나무는 지구상에서 자라는 가장 특이한 식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심으면 5년 동안은 어린 싹밖에 볼 수 없다고 합니다. 5년 동안 물주고 가꾸어도 고작 3센티 정도 자란다고 합니다. 5년이 지나면 모소 대나무는 기절할 정도로 빨리 자랍니다. 90일 만에 약 27미터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소 대나무가 실제로 자란 건 언제이지요? 처음 5년입니까? 아니면 마지막 90일입니까? 나무의 보이지 않는 부분 즉 땅 밑의 뿌리가 체계의 열쇠입니다. 땅위로 보이지는 않지만 자라고 있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게 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이게 자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이게 안 자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언짢은 사람입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망가서 보이지 않는 동안 부쩍 자랐습니다. 이제는 바울에게 있어서는 빌레몬과 버금갈 정도로 소중한 일꾼이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도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요나의 기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유대인을 싫어하고, 유대인과 원수 된 이런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이런 감정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싫을 것입니다.
  “남이 못되는 것이 나 잘되는 것보다 더 좋다”고 합니다. 이런 감정이 누구에게나 있는 흔한 감정입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잘 된다는 것이 싫습니다. 오네시모 같은 도둑이, 종이 예수를 믿다니 이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네시모에 대한 마음이 닫혀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바울이 열어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이런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고 이제는 기쁨과 평안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 딸아이가 한 번은 우리 집에 잠시 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전기불이 나갔답니다. 전기불이 나가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요즘의 삶이 그렇습니다. 전기불이 나가면 보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 것도 못합니다. 샤워도 못하고, 빨래도 못하고, 밥도 못하고 물 정수도 안 됩니다. 전기는 불입니다. 우리에게도 불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성령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됩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매듭 하나가 풀리면 모든 것이 풀립니다. 인간관계가 풀리면 기쁨도 있고, 평안도 있고, 재미도 있는 삶이 됩니다. 근본적인 것을 풀고 기쁨도 평안도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빌레몬을 통하여 얻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으로 말미암은 기쁨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라고 합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오네시모를 용납하여 바울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쁨이 되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수가 될까 목회자가 될까 깊이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둘 다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목회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좋아서 목회하기로 했습니다. 화해자로 자처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매듭을 푸는 것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갈등이 있으면 제 돈 들여가면서 화해시키고 만나서 밥 사주면서 이해시키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사람 때문에 얻는 기쁨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공부도 물론 재미있고 글 쓰는 것도 좋지만 이게 더 좋아요. 그래서 목회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빚진 것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받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기쁨과 평안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 아시지요? 재물이 기쁨입니까? 재물 그 까지껏 쓸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명예도 다가 아닙니다. 그런데 물질이 기쁨의 대상이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나아가서 사람이 근심의 대상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녀가 기쁨의 대상이고, 가족이 기쁨의 대상이고, 친구가 기쁨의 대상이고, 성도가 기쁨의 대입니다. 그런데 원수가 되고, 애물단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의 슬픔과 기쁨이 어디에서 옵니까? 결국 상황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사람이 괜찮으면 기쁨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괜찮아도 사람이 어려우면 슬픔입니다.
  사람이 기쁨의 대상이기도 하고, 슬픔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자식이, 형제가, 친척이, 친구가, 이웃이, 심지어 부모가 철천지원수가 될 때가 있습니다. 기쁨의 대상이기는 커녕, 고통거리가 되고 애물단지가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대상입니까? 생각만 해도 좋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만 해도 기쁘잖아요? 손자 손녀는 생각만 해도 즐겁고 귀엽지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기쁨입니다.

  “돌아온 탕자”라는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이 러시아 상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헨리 나우웬이 보고 같은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가 아들을 안고 있는 그림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아버지의 기쁨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랬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 동생에게 그렇게 하는 것을 불평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기뻐합니다.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의 기쁨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 때문에, 우리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잠언 29:17에는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고 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징계 받은 자녀는 부모의 기쁨이 됩니다. 기쁨의 대상인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성도 때문에 기쁨을 많이 얻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20에는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저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9에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큰 기쁨이 되십시오. 모든 기쁨으로 기뻐한다는 것은 대단히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4:1에는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정말 이런 교인, 이웃, 스승, 제자가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어떤 기쁨에 비하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가족이 기쁨입니다. 지금 여러분 옆에 앉아 계시는 성도가 여러분의 기쁨입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기쁨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스바냐 3:17에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합니다. 우리 때문에 미소 짓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때문에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에게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먼저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사람이 사람에게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곧 구원받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쁨의 대상이 되듯이, 남에게 기쁨의 제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됩시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고 합니다. 오네시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안이 됩니다. 사람과 매듭이 풀어지지 않으면 평안도 없습니다.
  바울에게 평안하지 못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장 옥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고통이 끊이지 않는 선교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열거한 고난을 보세요. 매를 맞고, 강에 빠지고, 굶주리고, 파선하고, 태장에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그러나 평안했습니다. 복음 안에서 확신이 평안하게 했습니다. 이제 작은 인간관계를 해결하므로 얻어지는 평안을 원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해결되고 문제가 해결되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인간관계를 그리스도로 해결합니다. 이런 지혜가 그로 하여금 평안하게 한 것입니다.

  현대 랍비 마빈 토케이어의 책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체룸이라는 작은 도시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습니다. 체룸으로 통하는 길은 험한 벼랑 위를 따라 가늘고 꼬불꼬불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떨어져 부상을 당했습니다. 마을의 장로들이 모여 머리를 짜냈습니다. 대책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장로들은 엿새 동안 밤낮에 걸쳐 토론한 결과 안식일이 가까운 무렵이 되어 겨우 결론을 내렸습니다. 벼랑 아래에 병원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사에 이런 근시안적 해결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근본적인 해결을 벗어나 눈앞의 작은 문제만 해결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은 빚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갈등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이 문제입니다.

  평안은 인간이 영원히 갈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이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그래서 만나자 마자 “평안하뇨?”, “평안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평안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성도의 아픔 때문에 평안을 느끼지 못하는 바울은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문제를 해결하므로 평안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사이의 문제는 갈등이나 다툼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근본적인 문제는 평안의 문제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평안합니다. 평안하면 실제로 이런 문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도 사이에 문제, 가정 사이에 문제, 친구 사이에 문제, 이런 문제가 있을 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정말 이런 문제가 해결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다락방 설교에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평안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이 주시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무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자체가 평안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 자체가 불안입니다.

  미국 교회 부흥의 역사에 윌리엄 퀘일(1860∼1925)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감리교 목사입니다. 능력 있는 설교와 설득력 있는 설교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유연하게 설교했던지 사람들이 ‘감리교의 종달새’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존경했습니다. 그에게도 사람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적막한 한밤중에 베고 있었던 베개를 끌어안고 “주님, 이 고통스러운 문제를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문제를 끌어안고 고통당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일이다. 너는 자라. 남은 밤 시간 나 혼자 깨어 있으마.” 이 말을 듣고 그는 감사하며 평안히 잤습니다. 이후 문제를 해결하고 그는 증거했습니다. “주님께서 깨어 계시니 여러분은 평안히 주무십시오.”

  우리도 찬송합시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주님만 따라가면 평안입니다. 근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을 통하여 평안을 얻습니다.

결론

  성모 마리아는 카톨릭에서 최초의 죄 없는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를 빗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두시고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마리아가 돌로 쳤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어머니, 제발 제 일에 방해하지 마세요”라고 했답니다. 최근의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오자히르’의 서문에는 “오, 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여, 당신께 의지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소서”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는 카톨릭 신자입니다. 정말 우리가 죄 없다고 선포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죄 없는 사람은 없지만 죄 사함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죄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신앙의 삶의 의미입니다. 이것 없이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죄의 근본을 해결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얽힌 죄가 우리 마음의 기쁨도 영혼의 평안도 앗아갑니다. 근본을 해결하고, 우리가 남에게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공급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기쁨도 평안도 얻게 하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성 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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